[리뷰] 창작집단 오늘도 봄 <부서진 풍경>

글_백승무(연극평론가)

 

부조리극은 2,500년 연극 역사 중 가장 최근에 생긴 장르이다. 서사나 볼거리도 부족하고, 때로는 의미까지 지우니 재미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70년 넘게 그 명맥을 잇는 것은 그 문제의식과 가치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뜻이다. 언어, 이성, 의미, 목적의식을 해체하는 부조리극은 반성과 성찰을 위한 훌륭한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허나 소통이나 논리, 합리성 없이 삶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부조리극은 쉼표나 물음표는 될 수 있을지언정 혁명이나 전복이 될 수는 없었다. 처음 등장할 때의 강력한 충격과 낯섦은 100년이 가기도 전에 무디어지고 물렁해졌다. 바야흐로 부조리극은 이미 화석화되었다. 일관된 화제(話題)가 없는 대화, 엉뚱하고 무의미한 행위의 반복, 갈등이나 충돌의 부재 등이 겹치면 기계적으로 부조리극을 떠올린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현대인의 정신적 장애나 문화적 아노미를 연결하고, 거기서 적당한 주제와 성찰을 끌어낸다. 부조리극을 대하는 우리의 이 조리 있는 태도는 놀랄 만큼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사진 제공: 창작집단 오늘도 봄

 

장르의 존립 가능성을 위협받던 부조리극이 오늘날 새로운 가능성을 대면하고 있다. 바로 정동의 감각이다. 언어와 상식을 배반하는 부조리극의 장르적 문법은 정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있다. 정동(情動; affect)이란 개인이 느낀 감정 상태가 표정이나 목소리, 제스처, 행동 양식 등으로 외부에 드러나는 현상을 말한다. 희로애락과 같이 특정 자극에 의해 일시적으로 강렬하게 일어나는 감정 반응이고, 종종 자율 신경계의 변화와 같은 생리적인 반응을 동반하기도 한다. 그래서 정동은 언어화되거나 의식적으로 인식되기 이전의 무의식적이고 생리적인 에너지(들뢰즈)라고 할 수 있다. 사태를 직면할 때 보이는 즉각적 반응이기 때문에 언어보다 앞서고 직관적이며 감각적이다. 인간은 이렇게 언어화(듣기와 말하기, 해석과 분석) 이전에 몸이나 표정을 통해 많은 정동적 정보를 생산하거나 수용한다. 배우가 눈앞에 있다는 현존(presence)은 정동의 충격과 감각을 직접적으로, 즉각적으로, 강렬하게 받아들이게 돕는다. 그래서 연극적 정동은 감염력과 전파력이 강하다. 배우와 관객 간 몸의 대화가 강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부서진 풍경>은 이 정동적 힘을 이용한다. 배우들은 자동화된 일상적 행위를 억제할 뿐만 아니라, 익숙한 연극적 관습마저 교묘하게 피하면서 낯섦과 기이함을 생산한다. 공연 내내 유지되는 ‘쌔한’ 느낌은 기존의 코믹함과 자연스러움을 회피하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혹은 말로 표현되기 이전의 정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사를 통한 이해’보다 ‘정동을 통한 경험’이 우선이다. 언어(대사)가 지배적이면 인간의 뇌는 경험보다 이해 중심으로 작동한다. 서사가 지배적이면 인간의 뇌는 주인공의 관점에서 감정이입하려는 성향이 발동한다. 하지만 <부서진 풍경>에는 관객의 관점을 주도하는 인물도 없고, 배우들도 언어보다 정동에 치중한다. 그 정동적 감각이 인식의 토대이다(리처드 커니). 몸(의 감각)은 인식의 조력자가 아니라, 인식의 정체이고 본령이다. 심지어 ‘말’조차도 피부에 와닿는 공기의 진동으로 수렴된다(H. U. 굼브레히트). 말을 포기하고 몸에 천착했을 때, 몸의 정동적 역학에 몰두했을 때, 부조리극은 새롭게 환생할 수 있다.

 

사진 제공: 창작집단 오늘도 봄

 

<부서진 풍경>에서 말의 무의미와 대화의 실패는 기존의 부조리극과 유사한 방식으로 이뤄진다. 지겹도록 반복되는 음악, 목적지 상실을 은유하는 지도와 길, 안경이 깨지고 시계를 분실하는 사건, 엉뚱하게도 달걀과 양말을 찾는 소동 등 상식을 배반하고 일상을 거스르는 에피소드가 진행된다. 언어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부조리적 상황은 여기까지이다. 문제는 이 상황을 어떻게 감각적으로, 충격적으로 전달하느냐이다. 달리 말하면, 배우의 현존이, 세계의 현존이 관객에게 어떻게 경험되느냐이다. 배우의 사소한 손동작, 미세한 표정 변화, 관객을 향한 눈빛, 몸의 각도, 턱의 높이, 고개 돌리는 속도, 치켜뜨는 눈 등이 그 경험을 결정한다. 대사의 의미보다 음성적 능수능란함이, 일반적 행위보다 대사에 반하는 행위가, 명확한 동작보다 상식을 깨는 기이하고 낯선 동작이, 정상적 휴지(pause)보다 지연된 불편한 휴지가 관객 경험을 좌우한다. <부서진 풍경>은 언어보다 정동을, 의미보다 경험을 중시하는 것은 맞지만, 정동의 힘을 연기와 연출의 주도적 원리로 전면화하지는 않는다. 순간적 소름과 감각적 이질감이 이어지고, 불편함과 과도함, 부재와 결핍이 상충하고, 부자연스러움과 비상식적 흐름이 누적되는 장면들이 천연덕스럽게, 능청스럽게, 자연스럽게 몸으로, 감각으로 전이되는 그런 정동적 공연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음악과 음향이 몸의 움직임과 결합하여 리듬적 구조로 조직화되는 것도 풀어야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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