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오판진(연극평론가)

극단 동이 제작한 연극 <묵티>는 2025년 11월 1일부터 11월 9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하였다. 이 작품은 김윤식 작, 강량원 연출, 우 연 드라마투르그, 임일진 무대미술이었으며, 프로듀서는 김유진이었다. 무대에 등장한 배우는 강세웅 강현우 김문희 김정아 김진복 박지연 배선희 송주희 유은숙 이재호 최호영이었다.
공연의 제목 ‘묵티(Mukti)’는 생소한 단어여서 관심이 갔다. 그것은 산스크리트어로 ‘해방’을 의미하는데, 공연 중에는 사람 이름으로도 사용하고, 신을 부르는 호칭으로도 쓰여서 다층적인 의미가 느껴졌다.
이 공연의 희곡은 2024년 제14회 벽산예술상 희곡상 수상작이다. 좋은 공연을 만들기 위해서는 희곡의 완성도가 높아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기초가 튼튼했다. 이런 단단한 희곡이 있었고, 배우들의 열연이 무대 디자인이나 조명 등과 합을 이루어서 독창적인 작품이 될 수 있었다.

이주민들을 바라보는 시선1 : 신성(神性)
이 작품의 화두는 이주민, 이민자였다. 작가는 희곡에서 외국에서 온 이주민들을 신으로 표현하였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방랑하는 신, 배우자를 찾아온 신, 새로운 땅을 정복하러 온 신, 높은 신을 보좌하다 난민이 된 신, 가족에게 정착하고 싶은 신, 구직하러 온 신. 어떤 장면에서는 묵티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런 신의 면모를 도드라지게 강조하였고, 다른 장면에서는 신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인류의 역사나 현실을 되짚어주기도 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현실 속에 있는 이주민들은 노예와 같은 밑바닥 인생을 사는 존재가 아니라, 그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모습, 즉, 깊은 철학과 가치관, 소명 의식을 간직하고 있는 신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떤 이주자의 고향인 네팔에서 사용하는 인사말 ‘나마스테’가 ‘내 안의 신성함이 당신 안의 신성함에게 경의를 표한다.’라는 의미인데, 이 언어에서 인간을 신성한 존재로 보는 인간관을 엿볼 수 있다. 이 공연의 제목인 ‘묵티’라는 말에도 ‘나마스테’처럼 신성한 인간관이 묻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위기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본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공연에 등장하는 어떤 이주민은 인간 이상의 신성한 존재라고 볼 수 있었다. 가령, 불타고 있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잠자고 있는 남자 사장, 복주를 구하기 위해 그 이주민은 온몸에 물을 뿌린 후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뜨거운 화기와 유독가스에 상처를 입거나 죽음에 이를 수도 있어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는 위기에 처한 사람, 복주를 살리기 위해 불길 속으로 들어갔다. 이런 이주민의 선택을 보면, 일반적인 인간 이상의 숭고하고 신성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공연에 등장하는 모든 이주민이 긍정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중앙아시아에서 온 군인 ‘라원’은 세계군인 체육대회 때 탈영하여 한국에서 불법으로 체류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국에서 군인으로 복무했을 때 명령받아서 사람을 납치하거나 고문하는 일을 했다. 라원은 매우 부도덕하고 불법적이며, 잔인한 일을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다시는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라원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주민들은 대한민국을 새로운 희망이자 정착하고 싶은 땅으로 여겼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들의 삶은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았다. 이주민들은 한국인들에게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기 일쑤였고, 그들에게는 위험하면서도 값싸거나 힘든 일밖에 주어지지 않았으며, 계속 도망을 다녀야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다른 이주민들과 함께하면서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주민들을 바라보는 시선2 : 노동력(勞動力)
이 작품에서 천착한 것은 최근 들어 급증한 외국에서 온 이주민 문제였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한국인 사이에도 이주민들은 적지 않았다. 즉, 외국인뿐만 아니라 내국인들도 유학이나 직장을 찾아서, 또는 여러 이유로 다른 지역, 멀리는 외국으로도 삶의 터전을 옮기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공연에도 귀농하여 연근을 키우면서 힘겹게 살고 있는 부부가 나오는데, 이들도 이주민이었다. 그런데 외국에서 온 이주민들은 국내에서 이주한 이 부부를 남자 사장님과 여자 사장님이라고 부르면서 다른 존재처럼 대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연근 농장의 사장 부부 또한, 외국에서 온 이주민들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귀농한 부부를 도와서 힘든 연근 농사를 짓고 있는 이주민들은 내국인들이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불법 체류자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연근 농장 여자 사장의 이름은 택주, 남자 사장은 복주였는데, 두 사장은 자신들에게 큰 힘이 되는 불법 체류자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한 마디로 동등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래서 불법 체류자들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은 영유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가령, 이주민들이 숙식을 비닐하우스에서 하기에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지만, 이런 불편을 개선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알지도 못했다. 본인들이 직접 생활하는 계기가 생기자 그제서야 비로소 이주민의 열약한 처지와 상황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듯 외국에서 온 이주민들은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조차 보장받지 못했다. 그런데도 여자 사장인 택주는 “그래도 난 잘 해줘.”라는 말을 아주 쉽게 했다.
한편, 위례라는 나이든 여인, 창석이 할머니에게는 베트남에서 시집온 은옥이라는 며느리가 있었다. 위례는 자기가 시집와서 고생했던 것을 잊어버렸는지, 결혼이라는 합법적인 제도를 통해 외국에서 이주한 은옥을 곱지 않게 보았다. 아니, 오히려 원망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는 욕설까지 내뱉었다. 이런 욕설은 남편과 아들이 죽고, 기구한 삶을 사는 은옥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은옥의 남편이 살아있었을 때,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 은옥에게 심한 폭력을 행사했는데, 위례는 자기 아들을 막아서거나 며느리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기 아들과 손주가 죽음에 이른 모든 책임을 며느리에게 돌렸다. 물론 은옥이 두 사람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결혼 초기부터 가정의 힘든 일은 며느리인 은옥이 혼자서 감당했는데도 말이다. 시어머니 위례는 베트남에서 온 은옥을 동등한 사람이 아니라 일하는 기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주민들을 바라보는 시선3 : 혐오(嫌惡)
공연 중반부에, 한국에서 몸부림을 치면서 새로운 삶을 찾는 이주민들을 위협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한국인보호연맹 소속의 ‘국호’가 그 사람이다. 그는 경찰도 아니고, 출입국 관리소 직원도 아니면서, 불법 체류자들을 체포하러 다니는 인물이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총까지 들고 다니면서 그것으로 이민자들을 위협하여 제압하고 체포하였다. 국호는 개인사적으로 불법 체류자에게 초등학생이었던 자녀를 잃은 인물이었다. 사고를 낸 가해자가 불법체류자였는데, 오토바이 사고를 낸 후 피해자를 방치하고 뺑소니를 쳤다. 그래서 국호는 전국으로 돌아다니면서 불법 체류자를 붙잡고 있다. 국호는 이주민을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가운데 우리 사회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캐릭터로 보인다.

이주민들을 바라보는 시선4 : 변화(變化)
이주민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을 살펴보면, 한쪽으로는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해 이주민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주민은 범죄의 온상이며, 화근이기에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함께 살아야할 신성한 이웃이라고 보고 따뜻하게 대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어떤 판단이 옳은지, 쉽게 말할 수 없다. 가령, 택주와 복주의 관점에는 연근 농사를 위해서 체류 기간과 체류 지역을 어긴 불법 체류자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값싼 노동력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들이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연근 농장 사장님은 외국에서 온 이주민들에게 따뜻한 방 하나 만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비닐하우스가 불타고, 남편 복주가 큰 상처를 입게 되자, 그제서야 여자 사장, 택주는 조금 달라진다. 그녀는 불법 체류자들과 함께 파라솔을 쓰고, 함께 연근 밭으로 내려가 일하기 시작했다. 이젠 사장과 노동자의 관계가 아니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하는 동료로서 그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결국 여자 사장은 처음으로 이주민들을 사람으로 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은 처지와 상황이 바뀌어야 마침내 달라지거나 성장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외국에서 온 이주민들을 노예처럼 대하던 여자 사장, 택주가 외국 이민자들과 한 파라솔 아래 앉아 있는 장면은 이런 측면에서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국에서 온 이주민을 대하는 곱지 않은 시선은 오히려 외국에서 온 며느리와 살고 있는 위례에게서 더 심각하게 나타난다. 위례 할머니에게는 자기 집에 빈방이 있는데도, 불법체류자 신분인 외국인에게 그 빈방을 세놓지 않았다. 돈이 필요해서 월세를 받고 싶지만, 막상 자기 옆집에 이주민이 산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이나 핀잔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은옥은 위례와 헤어지면서 조언하길, 외국에서 온 이주민들에게 빈방을 세놓으라고 권유한다. 이 장면을 통해 위례가 달라진 시대를 받아들여서, 현실적이고, 유연하게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보였다.
극단 동 공연 관계자들은 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좋은 공연을 만들기 위해서 직접 연근 농장을 찾아갔다. 그곳은 관곡지 연근 농장이었다. 거기서 고된 노동을 체험한 후, 무대 위에서 연근 캐는 장면을 형상화할 때 더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실마리를 찾았다. 더불어 이 공연의 희곡을 쓴 김윤식 작가는 다른 사람보다 먼저, 그리고 더 긴 시간 동안 연근 농장에 가서 일하면서 희곡을 완성했다. 좋은 작품은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그곳, 바로 우리의 땀과 눈물이 있는 삶의 현장에서 출발하고, 어려운 문제의 해답도 거기서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이주민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관한 해답도 거기에 가면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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