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군의 시대, 다시 이순신
― 뮤지컬 <성웅>, ‘아래에서 솟아오른’ 영웅 서사
글_이주영/문화칼럼니스트 darkblue888@naver.com
전철을 타고 서울에서 아산까지 세 시간을 달렸다. 지방 공연을 보기 위해 하루의 절반을 이동에 쓰는 일은 흔치 않지만, 이번만큼은 이 과정 자체도 공연의 일부가 될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서울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도시 충청남도 아산까지 가는 주변 풍광, 전철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아산에서 기획 제작된 뮤지컬 <성웅>(선화 작/작사, 박신애 작곡, 김규종 연출, 성경 음악, 신선호 안무, 박성민 무대, 양영신 영상)의 믿거름이기 때문이다. 전철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광과 전철 안에 머물거나 갈아타는 서민들을 관찰하면서 공연장에 도착했다.
이순신은 한국 중장년층에게 ‘압도적인 상징’이다. 영화 <난중일기>(1978)를 학교 단체 관람으로 접하고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2005)으로 리더쉽을 배운 이 세대는 이순신의 영웅적 면모를 재해석한 다양한 저작들의 소비자들이기도 하다. 관련한 강연, 문화예술 교육 활동을 통해 이순신 신화는 500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진행중이며 뮤지컬 <성웅> 공연장을 가득 채운 여러 세대 남녀노소는 이 신화의 소비자들이다. 이 작품은 “또 이순신?”이라는 피로감과 동시에 “그래도 이순신이니까!”라는 기대와 흥분의 양가 감정을 동반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뮤지컬 <성웅>은 지금껏 한번도 접하지 못했던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쌓아올린’ 새로운 관점의 이순신을 재현하고 있다. <성웅>은 이순신만이 아니다. ‘아무개’라고 통칭하는 백성과 격군, 이름없는 장수 등 낮은 곳에서 묵묵히 대의를 위해 헌신한 모든 이들의 통칭이다. <성웅>은 이순신이라는 거대한 상징을 ‘밑으로부터 다시 읽는’ 낯선 시도이다.

공연장 자체가 판옥선, ‘아무개들’과 함께 이뤄가는 ‘성웅’
웅장하면서 에너지 넘치는 서곡이 여러 전란과 삶의 굴곡을 넘나들며 막이 열리자 공연장은 거대한 판옥선으로 변모한다. 판옥선의 내벽이 늑골처럼 무대 양쪽에 자리하고 격군(格軍, 노젓는 군인)들이 열심히 노를 젓고 있다. 진군을 알리는 북이 울리고 무대 안쪽에서는 거친 바다의 격랑이 객석을 향해 쏟아진다. 관객들은 어느새 확장된 무대, 즉 거대한 판옥선에 승선한 수군이 되어 주위를 살핀다. 지금 이곳은 500년 전 한반도 남해 바다 한가운데. 첫 넘버인 ‘태산처럼 나아가라’를 합창하는 이순신과 동료 장군들과 격군들, 조선 수군 전체의 기세가 공연장을 뚫고 퍼져나간다.
무대 위에 올라가 있는 배가 아닌 무대 자체가 판옥선이다. 보통의 역사 뮤지컬이 ‘거북선의 외형’이나 ‘전투의 스펙터클’을 외곽에서 묘사하는 데 집중해왔다면, 〈성웅〉은 ‘배의 내부’, 즉 전쟁의 구조적 심장으로 곧장 들어가 버린다. 이것은 단순한 공간 묘사가 아니라 관점의 전환이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요인의 일부가 아닌, 그 안에서 호흡하며 살아 있었던 ‘격군과 아무개들’, 즉 이름 없는 존재들로 이루어진 내부 시선을 무대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단순히 ‘이순신을 재해석한 뮤지컬’이 아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이 진두지휘한 해전의 실상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보편적 영웅들의 시선들을 모아 재현한 작품이다. 격군은 거대한 판옥선의 밑바닥에서 노를 젓는 최하층 노동자들이다. 하급 선원인 수부(水夫)라고도 불리운다.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채, 전란시 가장 먼저 죽어가는 이들은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해전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백의종군의 고통 속에서도 이순신을 지탱한 존재들은 바로 이 격군을 포함한 ‘아무개들’임을 상기한다. ‘격군–아무개–이순신’의 삼각 구조로 엮은 연대의 드라마이자 요즘 리더쉽의 트랜드인 상향식(bottom-up)이라는 시대의 감수성을 반영한 작품이다.
1막은 외형적으로 전통적인 역사극의 형식을 따른다.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1597년 정유재란 당시 한양과 전라도 인근이다. 임진왜란에서 승기를 잡았음에도 조선은 일본의 야욕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정전 협상이 결렬되고 일본 해적들의 살육도 남해 여기저기서 횡횡하던 때다. 당시 선조는 이순신 장군에게 일본 급습을 지시했으나 순신은 잘못된 정보임을 인식하고 공격을 보류했다. 이를 빌미로 선조는 이순신를 문책하고 모든 직책을 앗아가 백의종군에 이르게 한다. 이순신을 견제하던 원균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칠천량 헤전에서 처참하게 패배한다. 정쟁, 선조의 의심, 원균의 모략, 첩자들의 움직임. 그리고 백의종군에 이르는 장면들은 뮤지컬 <영웅>이나 <명성황후>, <곤투오로우> 등 일제 강점기 전후 독립운동 서사를 떠오르게 한다. 전우를 대부분 잃은 칠천량 전투 소식을 들은 이순신과 장수들이 합창하는 1막의 마지막 장면인 ‘이 마음 칼날 되어’는 고통과 분노와 애절함이 점철된 대표 넘버이다.
예측하건대 이 기시감은 의도된 것인듯 하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순신을 빠르게 구축해 2막에서 완전히 새로운 이순신을 열기 위한 장치다. 이 과정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장면의 중심축이 ‘이순신 단독’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항상 백성들과 측근들과 함께 수군의 정체성으로 수용된다. 작품 속 이순신은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무기를 들고 버티는 사람이다. 무대는 순신과 함께 버티는 사람들의 소박하고, 가끔은 울분을 나누며 연대하는 공간을 ‘깃발없는 막사’로 시각화했다. 관객은 이 장면에서 더 다양한 아무개들과 조우한다. 부상병을 치료하는 약초꾼의 딸 연화, 그녀를 흠모하는 이순신의 세째아들 이면, 격군들, 수군들, 마을 의 필부 필모가 모여들어 칠천량 해전으로 폐허가 된 군영을 재건한다. 선조의 질투와 무능의 희생양이 되어도 묵묵히 감당하는 이순신의 면면은 그가 ‘아무개’들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전쟁 속에서 고통받는 백성들과 어우러지며 감내하는 처참함 속에서 이순신은 더 이상 ‘위대한 리더’가 아니다. 고통과 억울함을 겪어내고 무능하게 당하기도 하는 인간적 리더로 재위치 지워지는 과정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한국 사회에 더욱 강하게 퍼져 있는 ‘리더십 감각의 전환’이기도 하다. 절대적 권위로 조직을 이끌던 인물은 오히려 기피대상이 되어가는 시대이다. 함께 뛰어들고 부딪히며, 이름 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기꺼이 감당하는 상향식 리더가 절실한 시대에 작품 속 이순신의 면모는 더욱 빛을 발한다.

울돌목의 미학: ‘전략’과 ‘연대’를 시각화하는 새로운 무대 언어
2막의 중심에는 단 하나의 질문이 자리한다. “명량해전은 어떻게 가능했는가?”이다. 군사적 전략의 분석을 넘어, 인간적·사회적·정서적 기반을 탐색하는 방식으로 확장하기 위한 시작점이다. <성웅>을 구성하는 모든 넘버들 역시 궁극적으로는 이 질문으로 수렴한다. 울돌목 시퀀스는 창작진의 미학적 실험과 철학이 가장 밀도 있게 응축된 장면이다. 일반적인 ‘해전’ 장면이 물결, 파고, 배들의 충돌을 묘사하는 외연적 접근을 취했다면, <성웅>은 전략의 내적 구조, 전우들의 연대, 판옥선 아래의 격군과 아무개들의 리듬을 정확하게 시각화하는 방식으로 재해석한다.
울돌목 장면의 핵심은 수군으로 분한 앙상블들이 직접 재연하는 명량해전 시뮬레이션이다. 이순신이 조류 흐름을 따라 걸으며 혼잣말처럼 전략을 점검할 때, 배우들은 “조과, 조과”라는 짧은 리듬으로 응답하며 전략이 개인적 독백이 아니라 ‘함께 설계하는 전략시뮬레이션’ 임을 확인시킨다. 객석에서 보면 천을 움직이는 배우들의 동작은 한 몸처럼 유기적으로 흔들리고 멈추며, 파도와 조류가 되었다가, 배의 방향을 바꾸는 힘이 되기도 한다. 천을 이용해 물결을 만들고 그 위에 일렁이는 바다의 생명력을 영상디자인했다. 급변하는 조류를 활용한 수군들의 진퇴가 마치 바다 위 체스처럼 진짜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재연된다. 명량해전을 모르는 관객들도 천혜의 지형과 조류를 이용해 10척 전후의 아군으로 수백척 적군을 와해시키려는 전략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성웅>을 관통하는 주제, 영웅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본격적으로 시각화한 명장면이다.
판옥선 내부를 구성했던 6개의 구조물은 2막에 이르러 움직임의 그리드(게임 등에서 격자형태로 움직이는 전략)가 된다. 각 앙상블은 격군의 리듬을 몸으로 받아내고, 이 움직임이 곧 조선 수군의 ‘전략적 패턴’으로 읽힌다. 울돌목 해협의 와류, 조류의 방향, 배의 각도와 속도 변화가 앙상블들의 직선적이며 획일적이고 정밀한 움직임으로 구현된다. 관객은 비로소 수군들의 호흡과 움직임이 만들어낸 전략이 명량해전을, 그 이전의 한산대첩을 성공으로 이끈 ‘연대의 호흡’임을 감각한다. <성웅>의 울돌목 장면은 전쟁의 탄도학이 아니라 사람의 생체 리듬으로 구성된 해전을 감각하기 위한 무대미학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김규종 연출은 지난 11월27일 필자와의 서면 질의를 통해 이 장면은 “휴먼에러가 만들어내는 파열음이 에너지의 근원” 이라고 부연했다. 물결을 표현한 천 위의 프로젝션 맵핑은 구조물의 정밀한 위치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구조물이 배우들의 손으로 운용되면서 발생하는 작은 오차는 피할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이 에러가 정확성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있는 전략으로 발현된다는 점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자연의 불확실성, 인간의 불완전성, 그러나 집단적 연대가 만들어내는 극적 융합과 화합을 목격한다. 이러한 연출의 선택은 16세기 명량해전이 가진 본질, 즉 ‘완벽하지 않은 조건 속에서 만들어낸 기적의 전투’라는 역사적 맥락과 놀랍도록 잘 부합한다. <성웅>의 울돌목 장면은 그래서 전략적 인간학의 무대화이다. 또한 이 작품이 정의하는 ‘성웅’을 재구성하는 무대 언어이기도 하다.
또한 울돌목 전략 장면은 작품 전체에서 소근소근 반복되어온 질문을 제대로 우렁차게 던진다. “우리 시대의 성웅은 누구인가?” 이제 성웅은 더이상 카리스마적 리더가 아니다. 울돌목을 움직이는 것은 한 사람의 천재적 리더가 아니라 수십 명의 격군, 아무개, 앙상블 배우들의 호흡과 약속이다. 영웅의 서사적 권위를 무너뜨리고, 연대의 미학, 집단의 전략성, 민중의 에너지를 중심에 놓았다.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은 기존의 이순신 서사와 결정적으로 결별한다.

애도 불가능성의 연극적 형상화
<성웅>의 미덕 중 하나는 ‘애도’를 다루는 방식이다. 전쟁 영웅 이순신을 다룬 서사는 흔히 영웅의 승리나 육탄전의 처절함을 강조하는 쪽으로 기울기 쉽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애도 불가능성, 즉 무한히 발생하는 애도의 시간에 집중한다. 이순신이 결코 애도할 시간조차 갖지 못한 역사적 기록을 충분히 연구해온 창작진들이 이순신 장군에게 전하는 선물같은 장면이다. 칠천량 전투에서 전사한 이억기가 꿈결처럼 등장해 순신과 술 한 잔을 기울이는 장면은 그의 전략적 고뇌와 별개로, ‘인간’ 이순신의 고통과 상실을 드러내는 극적 발견이자 위로이다. 역사상 애도되지 못한 수많은 아무개들을 위해 이순신 장군이 현신해 500년 전 그들에게 추모와 애도를 전하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이 장면은 연극적 환타지로 장면화되었다. 김규종 연출은 “이억기 역의 김한결 배우는 성량과 기량으로 캐스팅된 인물이 아니라 성실함과 일 년 넘는 반복 연습을 통해 완성된 존재였다.”라며 작품 속 이억기와 이순신의 정서적 교류와 전우애가 실재 연습실에서부터 이어져온 시간의 층위를 설명한다. 이런 배경을 알고 다시 이 장면을 보면, 작품 전체가 무엇을 중심에 놓고 있는지가 명확해진다.
이순신은 영웅이기 전에 동지들과의 연대 위에서 존재하는 또다른 아무개이다. 그 연대가 끊어진 동지들을 마주하는 순간, 비로소 본인의 상처와 고통이 흘러나온다. 순신이 술을 바다에 붓는 행동은 단순한 연출적 장치가 아니라, 전쟁 속에서 이름 없이 사라진 수많은 아무개들을 애도하는 집단적 제례다. 서울예술단이 2023년 초연한 창작가무극 <순신>이 순신의 전우들을 직접 호명하며 신화적 제의를 무용과 창가로 담아냈다면, 2025년 <성웅>은 연대의 제의를 드라마와 음악으로 확장하였다.
이 작품의 또다른 미덕은 아무개이기도 한 이순신에게 되찾아 준 아버지로서의 정체성이다. 가족이 등장하고 에피소드를 구체화하는 차원이 아니다. 이순신 자신이 인간으로서, 아버지로서 붕괴되는 지점을 직시하는 순간 작품은 정서적 절정에 이른다. 아들 이면을 잃고 절규하는 마지막 장면은 이 작품의 진정한 대단원이다. 명량해전의 승리가 아니라, 아비로서의 절규가 작품의 감정적 중심이라는 점에서 <성웅>은 이순신 서사의 새로운 확장이다. <성웅>에서 이면은 이순신이 드러내지 않았으나 막연히 기대어 온 미래였다. 책임의 그림자와 영웅 서사의 틈새에서 누락된 가장 인간적인 감정의 실체였기 때문이다. 아들을 상실한 고통과 슬픔에 울부짖으며 경련을 일으키는 이순신역 양준모 배우의 진정성은 관객들을 통곡의 바다로 이끈다. 이순신은 승리의 순간보다 상실의 순간 더 크게 흔들린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이다. 그 흔들림이 있었기에 그는 더 강한 리더가 될 수 있었으며 역사적으로 이듬해 노량해전에서 이를 또 한번 입증한다.

‘영웅을 다시 쓴다’는 것의 의미
이 작품이 다른 이순신 서사들과 가장 뚜렷이 구별되는 근본적 키워드는 바로 ‘격군’과 ‘아무개’다. 김규종 연출은 앙상블 배우들의 놀라운 에너지와 호흡에 대한 비결을 묻는 필자에게 앙상블은 아무개 그 자체였다며 1년 넘게 지속된 연습실 분위기를 전했다. 작품에서는 아무개지만 동시대에서는 앙상블로 참여하는 청년 예술가인 이들은 작품과 실재를 오고가며 작품 안에 스며들었다. 김 연출은 백성들의 힘으로 폐허인 군영과 막사를 재건하는 깃발 없는 막사 장면은 실제 배우의 이름을 서로 불러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했다. 즉, 이 작품은 기록되지 않은 아무개들이 2025년의 아무개 배우들에 의해 다시 살아나는 구조를 갖는다. 이것은 단순한 연출적 장치가 아니다. <성웅>이 가진 존재론적 깊이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사유이다. 전통적 영웅 서사의 위계, ‘영웅-전사-백성’ 구조를 해체하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영웅이 아닌, 밑에서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믿음과 희생, 땀과 죽음을 함께하는 동행자로 재정의하기때문이다.
2023년의 창작가무극 <순신>이 이순신의 개인적 고통과 애도하지 못한 전우들을 해원하고 치유하는 제례였다면, 2025년의 뮤지컬 <성웅>은 포스트 신자유주의 시대 대중들의 새로운 욕망을 반영하는 연대의 서사이다. 지구 전체를 뒤흔드는 지도자의 결핍과 파편화된 공동체 속에서 ‘함께 버티고, 함께 책임지는 리더’에 대한 갈망이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작품 속 이순신은 가장 아래층의 격군과 아무개를 가장 앞에 위치 지우고 공동체적 연대를 기반으로 전략을 함께 수립한다. 개인의 고통과 상실을 숨기지 않으며 승리가 아니라 관계를 통해 리더십을 확립한다. <성웅>은 이순신을 다시 우상화하는 작품이 아니라, ‘제대로 인간화’함으로써 다시 존경할 수 있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 인간화의 중심에 다시 격군과 아무개가 자리한다. 이 작품은 서민들의 연대가, 제대로된 인간적 리더가 모두를 성웅이 되게 이끄는 과정을 무대의 언어로 깊이 있게 담아내었다.
서울에서 안산으로 향하는 전철을 가득 채운 다양한 언어권의 서민들과 공연장인 아산 경찰인재개발원 안병하홀 객석을 가득 채운 여러 세대의 남녀노소가 교차된다. 포스트 신자유주의 가속과 정치적 양극화, 신냉전의 압박 속에서 영웅이란 무엇인지, 실존하는 현실인지 돌아본다. 뮤지컬 <성웅>은 아래에서부터 서서히 구체화되는 아무개의 염원이 모여 아무개 그 자체가 되는 과정을 담아내었다. 실존하는 현실 속 영웅들이 그 안에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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