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극제는 존중되어야 한다
먼저 서울연극제가 존중되어야 할 까닭을 세계 각국의 이름난 연극제의 예를 들어 비교하겠다.
(1) 아비뇽 페스티벌
매년 7월부터 3주간에 걸쳐 펼쳐지는 세계적인 연극축제 아비뇽 페스티벌은 프랑스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유명한 축제로 1947년 9월부터 빌라르(Jean Vilar)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연극제를 보기 위해 해마다 세계 각국에서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모여들고, 온 도시는 연극, 발레, 예술, 음악 등 공연 예술로 가득 찬다. 연극제는 매년 색다른 형식과 주제로 주목을 받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행사는 세익스피어 극으로부터 그리스 비극, 프랑스 광대극, 모던 댄스, 발레 등에 이르는 국제 공연 행사들이다.거리와 광장에서는 거리 공연가와 악사, 마임 등 다양한 퍼포먼스가 펼쳐지고, 매일 밤 선보이는 새로운 작품들은 수많은 관객들을 매료시킨다. 아비뇽 연극제는 젊은 예술가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와 도전의 장으로, 연극제를 통해 극작가와 무대감독, 그리고 배우들이 새로이 발굴되고 있다. 이 축제의 주 공연장으로 사용되는 14세기의 건축물인 교황청 궁전의 안마당은 여름이 되면 2,2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야외무대로 변하게 되며, 그 밖에도 여러 성당과 수도원, 극장, 광장 등이 공연장으로 사용된다.
축제기간 중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관객이 매회 10만 명 이상의 관객으로 객석을 메운다.
(2) 에든버러 축제(Edinburgh Festival)
영국의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1947년에 시작되어 매년 8월에 3주 동안 개최되는 여러 문화 예술 축제의 총칭이다.
9세기 동안 몇 차례 음악 축제를 개최해 본 경험을 지닌 에든버러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황폐해진 시민들의 마음을 다독이고자 음악 축제를 기획했다.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글라인드번(Glyndebourne) 오페라단의 단장이던 루돌프 빙(Rudolf Bing)이었다. 빙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극단 기획자로, 1934년에 나치스를 피해 영국으로 건너왔다.
1943년경 그가 처음 제안한 음악 축제의 개최지는 옥스퍼드(Oxford)였으나, 1944년 후반 다른 도시들도 검토되기 시작했다.
에든버러가 물망에 오른 것은 당시 영국 문화원(British Council) 스코틀랜드 분원의 원장이던 헨리 하비 우드(Henry Harvey Wood)의 제안 때문이었다.
1945년에 헨리 하비 우드는 에든버러의 유력 인사들을 섭외해 축제 위원회를 구성했고, 첫 번째 감독으로 루돌프 빙을 선정했다. 이후 1년여 준비를 거친 후 1947년 8월에 첫 번째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이 개최됐다. 이 첫 번째 축제는 클래식 음악을 중심으로 진행됐으며 브루노 발터(Bruno Walter)가 지휘한 빈 필하모닉의 연주가 어셔 홀(Usher Hall)에서 펼쳐져 축제의 하이라이트를 이루었다.
축제가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이듬해인 1948년이었는데, 16세기 스코틀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데이비드 린지 경(David Lyndsay)의 <3대 계급의 풍자(Thrie Estaits)>를 공연한 연극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덕분이었다.
1950년부터는 영국군 군악대가 축제에 참가하면서 큰 인기를 모았고, 이것이 오늘날 개별 축제로 독립, 성장한 로열 에든버러 밀리터리 태투(Edinburgh Military Tattoo)의 기원이 됐다. 밀리터리 태투는 독립된 축제 기구로 진행하지만 여전히 에든버러 축제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999년 7월,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은 처음으로 영구적인 축제 담당 기관인 허브(Hub)를 설립해, 뛰어난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선보이는 기회뿐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주요 관광 수입원으로서의 예술 축제를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2014년 8월에는 전 세계 95개국에서 5000개의 극단이 에든버러 축제에 참가하고, 관람객이 1천 2백만이나 다녀갔다.
(3)서울연극제
서울연극제는 40년 가까이 계속된 연극제다. 에든버러나, 아비뇽 연극제처럼 문화 창달과 연극공연이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연극인들의 의해 계속되어 온 연극제다.
현재 연극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순수예술가에 속한다. 순수예술가가 대중예술가보다 경제생활면에서 훨씬 뒤져있다. 미술과 음악, 그리고 무용을 비롯한 순수예술부문에 속하는 사람들은 경제생활면에서 풍족함은 생각조차 못 한다. 오직 사명감과 자존심으로 순수예술활동을 계속한다. 그렇지만 순수 예술가들의 창조적 활동과 열정, 그리고 노력 의해, 한 나라의 문화예술이 한 걸음 한 걸음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아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대중예술가는 TV방송에 출연해 1시간 동안 잡담만 해도, 1000만원을 받는다. 연극배우는 2개월간 연습을 하고 1주일 남짓한 공연에 출연을 해도 1000원을 못 받는다. 한나라 공연예술의 두뇌라고 할 수 있는 한국희곡작가협회의 1년간의 정부지원금이 1000만 원 정도라는 것에서도 정부와 문화담당부의 홀대와 등한시를 가늠할 수 있고, 신춘문예 희곡당선금액이 이웃나라 일본의 백분의 1밖에 아니 되는 것으로도 언론매체에서의 순수예술가, 특히 희곡작가의 등단에 큰 비중을 두지 않고 있는 현실을 감지하게 된다.
서울연극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제나 저제나 형편이 좀 나아지기를 기다리며, 기대감과 함께 열정을 이어온 연극인들의 행사다. 그러나 역대 정권과 마찬가지로 새 정권에서도 대중예술가에게만 관심을 보이고, 순수 예술가를 관심 밖의 대상으로 취급을 할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동터전을 차단하는 행동까지 해 보이면, 순수 예술가들은 또다시 실망감과 허탈감에 빠지리라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들 중에는 야권성향을 띄기도 한다. 또 그 성향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을 탓해서는 아니 된다. 미국에서조차 노예제도가 당연시 되던 시대에 스토우 여사의 소설 <엉클 톰스 캐빈>이 노예해방의 단초가 되지 않았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 연극인들에 의해 동서갈등의 해소와 극복, 그리고 남북통일의 계기가 될 연극이 <서울 연극제>에서 탄생되지 말란 법이 없다.
그러니 문화관광부책임자나, 문화예술위원회의 책임자, 서울문화재단 책임자가 서울연극제 지원 폭을 증가해 주고, 연극인들의 활동영역과 그들의 터전을 지켜주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서울연극제 공연장소를 재지정해주기를 원로연극인의 한사람으로서 바라는 마음이다.
11월 30일 박정기(朴精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