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니치/ 김태희

경계 안에서 경계를 사유하기 – <자이니치>

김태희

작연출 : 차현석
단체 : 극단 후암
공연일시 : 2016. 9. 3 ~ 26
공연장소 : 엘림홀
관극일시 : 9월 23일

 

우리 연극계에는 자이니치를 만날 수 있는 몇 가지 통로가 있는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신주쿠양산박의 김수진 연출과 극작가 정의신이 그 대표라고 볼 수 있다. 한국 관객들은 이들의 작품을 통해 경계인으로밖에 살아갈 수 없는 재일교포들의 삶의 애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재일교포 내부가 아닌, 외부인의 시선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은 많지 않다. 극단 후암의 <자이니치>는 재일 교포 내부의 시선으로 자화상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이중적인 시선을 담아내고 있다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다. 아울러 정의신이 그려내는 핍진한 아픔과 위로의 세계가 아니라 더 강렬하게 맞부딪치는 세계의 갈등을 그려낸다는 측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흥미로운 재일교포의 세계가 펼쳐진다.
히라야마의 죽음으로 오랜만에 다섯 형제가 한 자리에 모인다. 히라야마의 유언을 집행하기 위해 모인 이들은, 늘 그렇듯 다투기에 여념이 없고 이들의 다툼 사이로 재일 교포의 현실이 드러난다. 한 공간에 모인 이들은, 형제라고 하기에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서로 다르다. 첫째 이치로는 민단 소속으로 귀국선을 타고 갔다가 북한으로 가서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자책감을 안고 살아간다. 셋째 카네토는 조총련 소속으로 이북의 사투리를 구사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미움과 불신을 드러낸다. 넷째인 토모야키는 조총련 소속이지만, 이념성이 두드러지는 카네토에 비해 야쿠자 출신인 히라야마에게 심정적으로 더 가까워 보인다. 이들은 사사건건 사상적 문제로 부딪히고 몸싸움을 벌이는데, 한국에서 프로야구 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막내 코지의 등장으로 싸움은 한층 더 격해지는 양상을 띤다.
카네모토 집안 형제들은 재일교포 사회의 갈등양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 갈등양상은 비단 조총련과 민단 사이의 갈등에 국한되지 않는다. 카네토는 열성적인 조총련 단원으로 자본주의에 물든 이들을 비판하지만, 더 큰 돈을 벌고 한국인으로 자리 잡고 싶다는 코지를 좌절시킬 수 없다. 그가 자본주의가 주는 안락함, 일본 사회의 차별, 여지없이 굳게 닫힌 한국인들의 태도와 마주할 때마다 그의 신념은 하염없이 흔들린다. 조총련과 민단이 만들어진지 벌써 오랜 세월이 흘렀고 이들이 여전히 그 옛날의 구도 안에 살아간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조총련의 2세, 3세들이 얼마나 많은 방황을 했는지에 대해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시대는 지났고 이들 안의 갈등 구도는 더 다양한 양태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카네모토 집안 형제들 사이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이 작품이 다른 작품들과 변별되는 지점은 히라야마 시신의 한국 입국 시도 때문이다. 히라야마는 한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덕분에 남은 네 형제는 브로커 박기환을 고용해 형제의 시신을 밀입국시키기 위한 계획을 짠다. 하지만 유언의 내용이 모두 토모야키의 자작극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이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히라야마의 시신을 대하는 한국인들의 태도와 박기환이라는 인물의 역할이다. 히라야마의 시신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시신이 방사능에 노출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다. 정확한 물증도 없지만 히라야마가 후쿠시마에 살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시신은 입국장을 통과할 수 없다. 그러나 박기환은 다르다. 그가 들고 온 조잡한 방사능 탐지기는 히라야마뿐만 아니라 박기환 본인에게도 경고음을 울리지만, 그에게는 대한민국 여권이 있다. 박기환이 카네모토 형제들에게 여권을 들이밀며 국적 확인을 강제하는 순간, 박기환은 더 이상 개인이 아니라 대한민국 그 자체를 현현하는 존재로 무대 위에 나타난다. 시종일관 카네모토 형제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비실거리던 박기환이 보여준 반전과 폭력성은 재일교포의 시선에 비친 이율배반적인 조국의 모습과 맞닿아있다.
박기환의 반전과 폭력성이 이 작품의 주제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데 기여를 하고 있음에 비해 나머지 서사들을 조율이 필요해 보인다. 절정으로 치달은 이들의 갈등을 화해시키고 봉합하기 위해서 필요한 단계들이 있음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지나치게 상투적인 서사들이 반복되고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가령 태워버린 시신 때문에 그의 몸에서 나온 우메보시 씨앗 하나를 고이 한국에 보낸다든가 어린 시절 실수로 낳은 아이를 동생으로 기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서사는 재일교포 사회와는 밀접한 관련을 맺지 못한 채 멜로드라마적인 드라마의 흐름으로 극을 끌고 가버린다.
<자이니치>의 시선은 재일교포 사회 한 곳으로 향해 있지 않다. 장례식장의 CCTV가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듯, 관객은 그들의 갈등을 지켜보고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도 목도하게 된다. 이 작품의 미덕은 바로 그 지점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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