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과 이론]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 주현식

*본 평문은 <공연과 이론>(통권 68호)에 수록된 글입니다.

힘에 대한 애도의 실패가 의미하는 것

: 극단 상상만발극장의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 읽기

 

주현식

 

 

 

1. 유령의 무대

  극단 상상만발극장의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2017.11.23.~12.03. 남산예술센터)는 2016년 이효석 문학상 우수상을 차지했던 권여선의 동명 원작 소설을 각색해 무대화한 작품이다. 2002년 월드컵 열기가 뜨거운 가운데 여고생 해언이 공원에서 둔기에 맞아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다. 같은 고등학교 만우와 정준이 피의자로 지목되고 해언을 미모의 경쟁자로 여겼던 태림이 목격자로 소환된다. 하지만 결국 사건은 미해결 사건으로 남게 되고, 이후 해언의 동생 다언은 언니의 죽음에 따른 상처에 시달리다가 범죄 사실을 밝히려 만우의 집에 찾아가지만 결국 만우가 범인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해언이 죽은 지 14년이 흘러 만우가 육종에 걸려 죽게 되면서 극은 끝을 맺는다. 원작 소설에 대해 문학평론가 정홍수는 “김다언이 한만우 집에 들어서는 장면과 같은 깊이를 다른 소설에서 느낀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뛰어나다. 사회적 재난과 횡액에 따른 삶의 붕괴 앞에서 애도의 방식과 문학의 역할을 묻는 작품”이라고 평한 바 있다. 오정희 등의 당시 2016년 이효석 문학상 심사위원들 또한 “오해와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내쳐진 삶이 제기하는 윤리적 주제를 추적하는 소설의 에너지가 중편의 형식으로 묵직하게 와 닿았다”고 상찬했다. 원작 소설에 관한 논평들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권여선의 소설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는 상실, 애도, 그리고 (부)정의 등에 관해 이야기한다. 왜 “당신‘은’ 알지 못하나이다”가 아니고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가 제목이었을까. 새로운 정보의 출현을 지시하는 ‘~이’라는 주격조사의 덧붙임을 통해 무지의 주체로서 폭로된 것은 누구였나. 원작자 권여선은 제목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라는 제목은 성경의 한 대목, 예수가 당신에게 인간을 용서해달라며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한 말에서 왔다. 그 말을 부정하기 위해 이런 제목을 붙인 건 아니다. ‘저들’ 곧 우리는 우리가 하는 짓을 알지 못한다. 그건 맞다. 그런데 우리가 한 짓의 의미를 당신은 알고 있는가. 당신도 알지 못하는 건 아닐까. 아니, 무엇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한 짓도 알지 못하는 건 아닐까. 당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만들어놓은 세상에 우리는 한갓 피조물로 던져졌다. 그 세상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못한 채 살아간다. 지금 알지 못해 슬프고 끝내 알 수 없어 두렵다. 막말로 우리는 몰라도 된다. 그런데 당신은 알아야 하지 않나. 우리가 한 짓의 의미를 우리가 모른 건 우리 죄가 아니지만,

 

그런 의미에서 권여선은 이 소설의 정확한 제목이 ‘당신은 당신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나이다’임을 술회하고 있다. 나에게 이러한 원작의 의도는 전능한 존재가 사라져버린 세계 자체에 대한 애도의 시도로 읽힌다. 그 애도가 실패로 귀결되더라도 말이다. 더 이상 무한한 힘의 합법성을 인정할 수 없는 상황. 신, 국가, 공동체,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의 확실성이 상실된 집단적 우울증의 상태. 그러면서도 나의 실존을 지탱해주며 개아(個我)의 너머에 있던 그 외재적 어떤 것을 이제는 떠나보내야 하는 순간. 하여 애도의 대상은 살해된 ‘해언’일 뿐만 아니라 ‘해언’을 부조리의 죽음으로 몰아넣고 방관했던 초월적 ‘힘’이다. ‘힘’에 관한 애도의 무대가 작품의 공간이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상실의 아픔을 종교적으로는 초월자에게 그리고 세속적으로는 국가에게 하소연하고 청원할 필요가 없다. 각색/연출의 박해성이 “오랜 고통이 눈 녹 듯 사라지면 좋겠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고통을 응시하고 고통과 공존해야만 할지도 모릅니다”라고 연출의 변을 밝힌 것은 그렇게 남겨진 자들이 유일하게 행할 수 있는 행위를 밝힌 것이리라. 애도의 대상이 망자를 포함하여 신, 국가 같은 힘 있는 초월적 존재로까지 변질돼버린 작금의 사태 하에서 우리가 죽을 때까지 애도는 쉽사리 완수되지 않으며, 위안은 섣불리 충족되지 않는다.                 

 

 

연극이 떠도는 유령의 무대가 되었던 것은 종국에는 힘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신과 국가란 힘 자체의 절대적인 힘은 어디로부터 비롯되는지와 관련된 질문을 상기시킨다. 소설이 다언, 상희, 태림, 만우 등 다양한 인물들의 시점에 의해 직조되었다면 연극은 인물들의 ‘독백적 대화’들이 교차됨으로써 무대 위에 부재하는 존재, 망자인 해언의 현존을 가능케 했다.

 

상희 그 잡동사니 같은 평범함이 나를 다시 현실세계로 이끌었어. 혐오감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애들을 쳐다보는데, 그들 역시 날 같은 감정으로 보고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어.

만우 봤는지 몰라요.

상희 그런 애였어 해언은, 우리를 순식간에 나머지 같은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다언 말없이 상대를 응시하거나 짤막한 대답만 툭 던지고 고개를 돌리는

  소설에서 각자의 시점에 따라 장이 별도로 배치되었던 것과는 달리 연극에서는 다른 시공간에서 발화되는 각 인물들의 목소리가 제약 없이 한 장면에서 혼재된다. 이것의 효과는 극단 상상만발극장의 이전 작 <코리올라너스>(2016)에서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무너뜨리려 했던 의도와 비슷하게 관객에게 해석적 자율권을 보다 더 부여하려는 수단의 일환일 수도 있겠다. 혼재된 대사가 가진 의미의 다층성은 관객의 보다 능동적인 해석 행위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혹은 살해된 해언의 인물상을 다언, 상희, 태림, 만우 등 다른 인물들이 지닌 각자의 관점으로 형상화하게 되어 해언의 수수께끼 같은 성격이 보다 두드러지는 효과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만화경처럼 각 인물들의 관점이 뒤섞인 무대는 살아 있는 인물들보다도 죽은 인물 해언의 존재감을 전경화하는 데 기여한다.

  다언 어차피 혜은이라고 지어도 아빠가 계속 해언이라고 부를 테니까 차라리 그쪽으로 정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서 언니는 김해언이 된 거야. 만약에 언니가 혜은이었다면 나는 다은이가 됐겠지.

  상희 다언이도 그 해 우리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교내에서 떠들썩한 화제의 주인공이 됐어. 해언 동생이어서가 아니라 자매 둘이 너무 달라서.

  언에 관한 다언과 상희의 기억은 온전히 다언과 상희의 기억일까?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무대가 해언과 얽힌 기억으로 진행된다면 그 기억의 점유자는 산 자 다언과 상희일 뿐만 아니라 죽은 자 해언이기도 하다. 우리가 망자에 관한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면 산 자로서의 주체적 자율성은 침범되고,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그 망자일 것이므로,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에서 죽었지만 죽지 않고 산 자들의 육체를 빌려 반복해 출현하는 것은 부재로서 현존하는 해언이다. 다언, 상희, 태림, 만우 등 남겨진 자의 육체적 물질성 속에서 해언의 유령은 육화되고, 결합되며, 공간화된다. 요컨대 해언은 무대에 없지만 그럼에도 해언의 무언가가 무대 위에 남아 있는 것 같다. 해서 산 자와 죽은 자, 주체와 대상, 그리고 물질과 기억의 경계는 유령의 수수께끼적 흔적에 의해 요동친다. 독백적 대화 속에서 지각되는 시공간의 왜곡, 도약은 바로 죽었지만 충분히 애도되지 못해 산 자의 장소로 되돌아오려는 망자, 유령의 욕망으로부터 연원한다.

 

2. 애도를 향하여

  그럼에도 다언은 해언에 대한 애도를 완수하기 위해 한발 한발 나아간다. 언니 해언을 살해한 것으로 의심받는 만우의 집을 다언이 찾아가기 전까지의 과정은 우울증으로 무기력한 다언의 모습을 소묘하고 있다.

  다언 돌아온 엄마는 사적으로 개명작업을 시작했어. 언니 교과서하고 참고서, 노트 수첩에 적힌 이름

       을 바꿔 적고, 앨범에 언니 사진을 하나하나 찾아내서 뒷면에 굳이 혜은이라는 이름을 적고, 아

       빠 죽은 다음부터 쓰기 시작한 가계부를 죄다 꺼내서 언니 항목으로 소비된 지출을 화이트로 지

       우고 이름을 바꿔 적었어. 언니 체육복 운동화 학용품 하나하나에 다 김혜은

       …….

       엄만 다른 얼굴을 원하고 있었어. 내가 보고 싶던 얼굴은 어디로 갔지 이 자리에 왜 네 얼굴이

       있는 거지…….

       엄마가 언니 이름을 바꿨으니 난 나를 바꿔야겠구나.

       …….

       눈, 코, 광대, 하악, 턱 끝 깎아내는 안면윤곽수술은 세 번.

  상실한 대상을 에고로부터 쫓아내거나 떨어뜨리지 못하고 그것을 자신과 동일화시키는 내적 투사의 일종으로 성공하지 못한 애도, 우울증을 설명하고 있는 프로이트의 논의를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다언이 만우와 직면하기로 결심하기 이전까지 다언의 모습은 우울증에 걸린 사람의 전형을 보여준다. 해언이라는 이름을 원래의 이름이었던 ‘혜은’으로 바꿔서라도 죽은 해언을 곁에 붙잡아두고 싶어 하는 엄마의 모습과 그런 엄마를 위해 언니 해언과 똑같은 얼굴로 몇 차례의 성형수술을 받는 다언의 모습을 통해 남겨진 자들이 상실된 대상 해언으로부터 거리를 두지 못하고 상상적 대상으로서의 해언을 반복 재현하는 우울증적 병리 상태가 무대화되고 있다. 언니 해언의 살해 장소인 공원을 꿈에서건 현실에서건 계속해서 찾아가는 다언의 행위도 우울증으로부터 비롯된다. 죽음의 공간 이미지에 다언이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상실된 해언에 관한 기억과 그 기억에 함몰된 자신으로부터 적절하게 거리를 두지 못하는 다언의 우울증적 이미지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망자를 자기 자신 속에 반복해서 투사하려는 다언의 우울증적 행위는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자면 ‘포르트-다(fort-da)’ 놀이를 떠올리게 한다. 손자가 실로 묶은 패를 가지고 놀면서, 실패를 멀리 던지면 실패가 보이지 않아 ‘없다’라는 뜻의 ‘포(fort)’를 외치고 실패를 끌어당기면 실패가 보이게 되어 ‘여기 있다’는 뜻의 ‘다(da)’를 외치는 장면으로부터 프로이트는 상실을 극복하는 상징적 과정을 분석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부재하는 언니 해언의 이미지(‘포’)를 반복해서 지금 여기에 재현(‘다’)하려는 다언의 행위는 결국 만우의 집에 찾아가 애도의 감정을 형태화하는 데까지 이어진다. 원작 소설과 달리 무대에서 다언과 만우가 함께 춤을 춘 것은 ‘포르트-다’ 놀이의 반복적 형식이 댄스의 움직임 속에서 실현된 결과는 아니었을까?

  가스렌지 켜는 소리. 냉장고 닫는 소리. 달걀 깨는 소리. 다언은 소리를 견뎌낸다. 서서히 달걀이 튀겨지는 소리. 음악이 들리기 시작한다. 접시에 음식 담는 소리, 젓가락이 접시에 닿는 소리. 다언은 음악에 따라 조금씩 몸을 움직인다. 조금씩 움직인다.

  선우 오빠, 난 진짜 그 언니 장난 아니었다고 들었거든

  만우 어, 그랬지 / 선우 오빠는 어땠어?

  만우 나는 뭐   

  선우 근데 동생 언니도 되게 이쁘다 그지? 먹어요, 오빠! 언니도!

  

  다언은 고조에 이른 음악에 몸을 내맡겨 살아 있음을 느끼듯 춤을 춘다.

  다언은 만우의 동생 선우의 회상을 통해 언니 해언이 살해된 날 만우가 동생을 위해 꽈배기를 사 들고 집에 들어왔음을 확인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다언은 만우가 해언의 살인범이 아님을 인지하게 된다. 허나 나는 이 장면에서 그러한 합리적 추리 과정이 다언이 애도의 감정을 달성하는 데에 큰 몫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해언과 만우의 공통점, 그들이 유사하게 가지고 있는 몸의 언어들이다. 해언의 무릎과 만우의 육종암. 다언에 따르면 해언은 속옷 입기를 싫어했다. 속옷을 입고 등교했는지 동생인 다언이 챙겨줄 정도였다. 해언이 살해되던 날, 그날도 해언은 속옷을 입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정준의 차에서 무릎을 세워 앉은 채 해언이 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는 태림의 말을 만우에게 전해들은 다언은 그렇다면 정준이 해언의 벌거벗은 아랫도리를 다 보지 않았겠느냐며 걱정한다. 우리는 이 장면으로부터 해언의 무릎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 성적으로 유린될 수 있는 사회적 약자의 신체적 표식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만우가 육종에 걸려 다리를 절단하는 것도 해언의 무릎과 비슷하게 지배계층의 헤게모니에 종속되거나 접근을 부인당한 그룹, 서발턴의 표식일 터다. 살인 누명에 손가락질 받던 만우는 군대에 가서 육종에 걸려 다리를 절단하고, 의병전역을 하고 불구의 몸으로 세탁공장에 취직해 화상을 입으며 다림질을 하다 육종이 온몸에 퍼져 28살에 죽는다. 다언의 애도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만우의 신체적 불구와 죽음을 통해 언니 해언의 죽음에 거리를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치마를 입고 무릎을 세울 정도로 무지몽매하지만 결국 누구에 의해 살해되었는지 모른 채 처참하게 공원에서 살해되는 언니 해언의 모습과 살인의 누명을 쓰고 난쟁이 엄마와 가난한 집 장남으로 고생만 하다가 결국 육종으로 다리를 자르고 죽어가는 만우의 오버랩. 요컨대 다언 자신이 생각해 오던, 자신의 추리를 완성시키기 위해 살인범으로 간주했던 만우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무한한 타자로서의 만우의 모습을 경유해 다언은 죽은 해언과 떨어져 거리를 가질 수 있었고 자신의 상황을 성찰할 수 있었다. 소설에 나타난 다언의 결론적 언급들 : “그의 삶과 마찬가지로 언니의 삶 또한 고통스럽게 파괴되었다는 것을, 완벽한 미의 형식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내용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 있다. 살아 있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면 그 밖의 것은 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캐는 다언의 무대화된 발언들 : “언니, 이런 일 모두가 신의 섭리다, 망루가 불타고 배가 침몰해도, 이 모두가 신의 섭리다,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신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닌가요? 난 죽었다 깨나도 그렇게 말할 수 없어요. 신의 섭리가 아니라 무지예요! 이 모두가 신의 무지다 그렇게 말해야 돼요! 모르는 건 신이다. 그렇게”. 해언의 살인범으로 지목됐던 정준과 이후 결혼한 태림이 아이가 유괴되자 신에 귀의하는 위악적인 모습과는 대조되는 다언의 모습이다.

  물론 애도의 성공 과정이 보다 무대에서 설득력 있게 장면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만우의 집에서 계란 프라이와 맥주를 선우와 다언이 함께 먹는 장면, 만우와 함께 다언이 춤추는 모습, 그리고 불구의 만우가 일하는 세탁공장의 청경(聽景) 등은 성공적 애도의 과정, 반복적 포르트-다 게임을 통한 상실의 극복 과정을 무대 위에 핍진하게 제시했다고 보기에는 모자람이 있다. 과잉적 이미지가 페티쉬적으로 소비되는 시대에 가시적 재현에 저항하는 무대 전략이 이 연극에서 추구되었다고 해도 그렇다.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의 무대에서 힘없는 자들, 해언과 만우에 대한 다언의 애도는 달성된다. 그러나 힘없는 자들, 해언과 만우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죽음을 방치했던 공동체, 국가, 그리고 신 등, 힘없는 것들의 죽음과 결부되어 자신의 힘을 구성하고 발현시키며 전시하는 가장 거대한 힘들의 정당성이 상실됨에 따른 애도는 지연된다. 바꾸어 말해 힘없는 존재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달성 속에서도 국가, 신 등 가장 거대한 힘들의 부조리한 이미지는 우울증적으로 반복 충동과 함께 영구적으로 귀환한다. 이러한 애도의 달성과 실패라는 이중적 구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3. 다시 교차로에서

   

  극의 마지막에서는 만우의 스쿠터 뒤에 타고 있던 태림이 우연히 교차로에서 정준의 차에 탄 해언을 목격하게 되는 장면이 무대화된다. 만우, 태림, 정준의 목격자적 진술이 엇갈리고 해언의 살해 과정에 열쇠가 될 수 있는 비밀이 숨겨진 극의 핵심적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장면은 해언이 공원에서 살해되는 것보다 보다 폭력적인 장면일 수도 있겠다. 해언에게 닥쳐오는 삶과 죽음의 교차로인 까닭에서다. 이런 폭력적 장면에 대해 우리는 벗어나고 싶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에 귀환하고자 하는 쾌락적 열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다언의 대사처럼 교차로는 “희열과 공포의 교차로”인 것이다. 이 교차로에서 국가의 합법적 권위도, 신의 섭리도 죽음에 이르는 파국으로부터 해언을 그리고 만우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해서 나는 이러한 교차로의 의미를 사라지고, 상실된 존재들이 자리하는 사각지대, 맹점의 시각화라는 점에서 찾고 싶다. 국가, 신 등 힘 있는 것들, 본질적인 것들에 의해 무시되고 주변부로 쫓겨나 그림자로 떠도는 것들이 시야에 들어올 때, 이와 같은 교차로가 우리의 시야에 가시화 된다. 마지막 장면의 교차로는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들리지 않는 것과 들리는 것, 접촉되지 않는 것과 접촉되는 것 사이의 교차로인 것이다. 국가, 신, 공동체, 남성, 가문 등 본질적이면서도 힘 있는 것들에 의해 해언이나 만우처럼 힘없는 영혼들이 얼마나 많이 사라졌던가? 따라서 마지막 장면의 교차로는 초월적인 것들에 의해 그늘로 남아 상실된 것들이 출현하고 목격되며 더듬더듬 기억되는 장소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변부적 유령의 존재들이야말로 역사와 사회, 공동체를 구성하는 핵심 인자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부재로서 현존하는 그들은 우리 사회가 망각된 기억의 형태로 저편으로 밀쳐 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우리의 사회로 되돌아오는 중에 있음을 교차로의 무대는 상징하고 있다. 망각된 기억으로서의 유령적 존재들이 도착했을 때 그들을 모호한 기억의 흔적 속으로 밀어냈던 국가, 신 등 초월적 힘의 부정의 또한 교정되어 정치적 정의로움이 메시아처럼 도래할 것이다. 국가나 신 등 힘에 대한 애도를 쉽게 달성하지 말아야만 하는 이유가 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새로운 국가, 은총 있는 신을 말하기 전 아직 산 자보다 더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죽은 자들이 무수하다. 우리의 기억과 망각을 점유하는 유령적 존재들에 대한 충분한 애도가 완수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보다 합법적 국가와 보다 전능한 신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해서 유령적 존재를 위해, 유령들이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무대의 빈 공간은 더 크게 울려야 하리라. 유령적 존재들에 대한 애도의 연극적 무대가 현실 세계의 참사에 대한 애도인 듯하면서도 동시에 이지 않은 듯한 기억의 무대를 생산하면서……. 연극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의 무대 위에서 죽은 자가 애도될 때 현실, 허구, 삶에서의 애도 양식에도 동시에 공명했는지, 거기에 있으면서도 거기에 있지 않는 것 같은 비가가 울려 퍼졌는지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그러나 유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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