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의 감각/ 정윤희

처의 감각

 

정윤희

극본: 고연옥

연출: 김정

출연: 윤가연, 백석광, 이수미, 최희진, 황순미, 임영준, 최순진, 권검민, 김정화

공연일시: 2018.4.5 – 4.15

공연장소: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관극일시: 2018.4.8. 15:00

 

 

현실과 신화를 오고가는, 경계가 흐릿한 이 이야기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너무나 또박또박하게 자신들의 심연을 들려주고 있다. 그것들은 그저 그들 스스로가 욕망을 향해 발걸음을 뗄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변호하는 한낱 비겁한 말들에 불과하지만, 얼마나 인물들이 그것들을 진지하고 또 유려하게 꺼내 놓는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 속에서 일종의 아름다움마저 느끼게 된다.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속은 쓰디쓰기만 한데 그들에게서 나오는 언어들이, 그리고 몸짓들이 무대 위에서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이 진지한 대사들을 옛 시절의 무술 동작과 같은 현란한 움직임과 코미디로 덮은 연출로 말하자면, 댄 밀맨의 소설 <평화로운 전사>에서 깨달았던 이치들을 다시금 상기시키게 했다. 난 언제나 내 몸과 감각들이 지금보다 더 활짝 열려서 탐스러운 보름달을 온 몸으로 받으며 창공으로 뛰어오르는 것과 같은 경쾌한 삶이 항상 내 주변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상상하곤 했다. 용기를 내어 춤을 추지 않고서는 그 삶에 다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근원을 찾아가는, 원시의 감각을 찾아가는 몸짓 그 자체가 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무용을 시원스럽게 흡수하고 있는 연출은 언뜻 보기에는 진지하기만 한 현실을 산뜻하게 승화시킨 감각적인 테크닉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그러한 연출이야 말로 원시의 감각과 추억을 향수하고 있는 이 작품에 가장 적중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초점이 분명한 진지한 대사와, 본연적인 몸짓을 연기하기 위해서 배우들은 자신들의 매력을 한껏 끌어올려야 했을 것이고 그것들은 무대에서 충분히 발휘가 되었다.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무대에 서 있는 그들이 매우 우아하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등장인물 ‘남자’의 인생 양 극단에 서 있는 두 여인 ‘곰 아내’와 ‘여자친구’는 극중에서 매우 상반된 분위기를 지닌 인물들이다. 곰 남편이 유년시절 자신의 몸을 핥아주고 보듬어 주던 감각을 기억하고 있는 인물 ‘곰 아내’를 연기한 배우는 현대 무용가이기도 하다 한다. ‘곰 아내’는 신비로움과 동시에 남다른 감각에서 비롯된 예지와 지혜를 갖고 있는 여성이기도 하다. 배우는 보호본능을 자극할 만큼 아담하지만 힘 있고 다부진 움직임을 선보였으며, 그의 순박한 말투는 한없이 순진한 극중 인물의 성격을 잘 전달해 주었다. 반면 ‘여자친구’라는 인물은 감각의 저편, 이상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인물이다. ‘남자’는 고단한 현실과 부담스러운 가정에 자기도 모르게 섞여 들어가 사는 와중에도 항상 ‘여자친구’에 대한 환상을 품고 산다. ‘남자’는 왠지 ‘여자친구’가 자기와는 다른 수준의 삶을 살고 있는 것만 같아 차마 다가가지 못하지만, ‘여자친구’는 그 아름다운 글귀들로 가득한 편지 속에서, 실은 그녀가 현실에서 도태되어 떠돌며 살고 있으며, 그런 자신을 동경하듯 바라보며 오랫동안 곁에 있어준 ‘남자’가 좋았었다고 말한다. 아주 섬세한 감성으로 작은 추억들을 회상하는 배우의 대사처리와 음성, 그리고 연기가 매우 세련되었고 발레의 동작을 연상시키는 그의 몸짓 역시 그러했다.

 

여인숙 주인과 이웃 남자를 연기한 배우들의 몫도 빼놓을 수 없다. 여인숙 주인의 익살맞은 입담은 어김없이 관객들의 웃음을 터뜨리곤 했지만 슬쩍 흘리는 듯 내뱉은 멘트 속에 담겨진 날카로운 진실이 섬뜩함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웃 남자의 대사는 여자들의 동정을 사는 호소들 속에 달콤한 유혹의 말들을 살짝 살짝 꺼내다가, 결국은 폭력적으로 돌변한다. 가장 전형적으로 나쁜 사람의 캐릭터를 배우는 소름끼치는 연기로 소화해냈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들을 변호하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고 했다. 하지만 욕망하는 인물들이 어쩜 이렇게 호소력 있게, 그리고 매력 있게 다가올 수 있는지, 또 그러한 존재들이 그토록 비극적인 선택을 반드시 했어야만 했는지 아직도 소화되지 못한 채 필자의 내면에 남아있다. 그러한 아이러니야 말로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매력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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