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한 철가방을 태운 화려한 마세라티

-연극 <철가방 추적작전>-

 

글_김한슬

 

원작 : 김윤영
각색 : 박찬규
연출 : 신명민
제작 : 두산아트센터 
장소 : 두산아트센터 Space111
일시 : 2019년 4월 9일 ~  5월 4일 

 

‘철가방 배달’ 하면 떠오르는 것은 많다. 자장면, 오토바이, 그리고 불량 학생까지. 수많은 사람은 소위 말하는 불량 학생들을 보며 ‘쟤네는 중국집 배달이나 하고 다닐 거다.’라고 말하곤 한다. 빨간 헬멧에 묵직한 사각의 철가방을 들고는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중국집 배달원들은 언제부턴가, 불량 학생 이미지의 대표 상이 됐다. 실제로 그들이 그런가 아닌가는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는 모순이 있다. 부잣집의 불량 학생들도 철가방을 들던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 학생들 역시 두 분류로 나뉠 수 있다. 돈이 있는 아이와 돈이 없는 아이. 불량 학생도 예외는 아니다. 돈이 있는 불량아는 철가방을 들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돈이 없는 불량아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런 아이들의 선택 중 하나가 철가방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철가방을 든 불량 학생에서 ‘가난한’을 생략한다. 이 작은 오류로부터 이어지는 커다란 사회적 경제 계급 문제가 대두되는 게 두려운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연극 <철가방추적작전>은 그 틈을 파고들어 ‘가난한’이라는 단어를 중심에 위치시켰다. 그리고 공공임대아파트라는 또 다른 소재와 함께 그동안 생략됐던 이야기를 무대 위에서 1시간 30분 동안 보여준다.

 

 

<철가방추적작전>은 강남의 외딴섬이라 불리는 수서동을 배경으로, 학교에 나오지 않는 정훈이를 담임선생인 봉순자가 추적해가는 간단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줄거리가 간단하다고 그 극이 가진 힘을 얕잡아 봐서는 안 된다. 그 간단한 줄거리 안에서 공공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의 현실, 사회와 학교의 모순된 시스템, 그리고 타인의 시선까지 유연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연극은 진행되는 내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한껏 드러냈다. 예를 들어 상황설정부터가 그랬다. 같은 반 친구의 졸업앨범비를 훔쳤다는 소문에 휩싸인 후, 학교에 나오지 않는 공공임대아파트에 사는 학생을 추적한다는 설정. 이 설정만으로도 정훈의 학교에 만연해 있는 경제적 계급을 느낄 수 있다. 애초에 정훈이 공공임대아파트에 살지 않았고, 경제적으로 넉넉한 집안의 아이였다면 연극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연극에서는 이러한 주제 외에도 또 다른 관점을 추가시킨다. 상황을 ‘인정’하는 관점을 말이다. 연극에서는 봉순자의 추적 과정과 그동안 정훈은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를 번갈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봉순자의 추적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학교의 시스템이 불합리함을 느껴감에도 불구하고 정훈을 다시 학교로 데려오려는 봉순자, 그리고 학교 밖에서 오히려 안정을 찾은 정훈. 둘의 모습은 상당히 모순적이다. 원작 소설 속 봉순자는 끝까지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하지만 연극 속 봉순자는 달랐다. 기나긴 추적 끝에 마침내 다시 마주한 정훈의 울음과 호소에 결국은 ‘인정’해버리고 만다. “저 지금 배달하는 데 되게 좋아요. 거기선 누구랑 비교당하지도 않고요. 제가 어디 사는지 궁금해하지도 않고요. 저한테 꿈같은 거 물어보지도 않고요. 무엇보다 아빠 같은 인간 안 봐도 돼서 좋아요. 쌤, 저 진짜 괜찮아요.” 다소 직접적인 대사이기는 하나 이를 통해 우리는 봉순자와 함께 정훈의 상황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극의 마지막에 봉순자는 정훈이 일하는 중국집을 찾아가 정훈에게 장갑을 건네준다. 이 장면은 아무리 열심히 살고, 달리고, 추적해도 변하지 않는 사회를 바꾸는 대신에, 그냥 정훈의 입장에서 최선인 상황을 이해하고 ‘인정’한 봉순자의 변화에 마침표를 찍어준다. 홀로 무대에 남아 정훈이 내온 자장면을 먹는 봉순자의 모습을 관객들은 가만히 바라본다. 정적 속에서 울려 퍼지는 후루룩거리는 소리는 아직 상황을 ‘인정’하지 못했던 관객들마저 끝내 인정해버리게 만든다.

 

 

다만 상당히 입체화된 봉순자라는 인물에 반해, 정훈이라는 인물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남았다. 너무 티 없이만 그려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생활을 위해 번 돈으로 아이패드를 사버리거나. 누명을 쓰고 엉엉 우는 정훈의 모습은 마치 백지 같은 아이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는 정훈을 더더욱 완벽한 희생자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가난하지만 그림을 좋아하는 결점 하나 없이 선한 인물의 비극은 그 비극성을 극대화함과 동시에, 작위적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도 있게 만들어버렸다. 이 현실에서 정말 저렇게까지 순수한 인물이 있을까? 그런 사람이 저런 비극을 맞이해야 할까? 현실을 사는 관객의 현실적인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4월 14일 공연이 끝나고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에서 한 관객은 공공임대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희생적인 모습들만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 연극이 모든 부류의 공공임대아파트 사람들을 보여줄 의무는 없다. 하지만 과하게 순진하게 그려진 정훈의 모습 또한 어쩌면 그들을 안타까운 희생자라는 이미지로 가둬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았다. 만약 정훈의 캐릭터가 그리 선하지만은 않았다면. 강인한 성격을 가졌다면. 그때도 정훈을 보며 이토록 마음 아파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선한 인물의 비극적인 사건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철가방추적작전」이 비극인지는 아무도 단정 지을 수 없지만, 비극 속 주인공의 성격을 지닌 것만은 확실했다.

 

 

<철가방추적작전>은 꽤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극 역시 무겁게 이끌어갈 필요는 없다. 지나치게 주제 의식을 해치는 연출은 나쁘지만, 그렇지 않은 연출은 극에서 빛을 발한다. <철가방추적작전>은 그런 적절한 연출의 정석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극이 시작될 때, 첩보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긴장감 넘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대기업 액션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처럼 역동적인 영상이 무대에 비추어졌다. 이는 마치 영화를 보러 온 듯한 느낌을 줬다. 오프닝에서뿐만 아니라 공연 내내 영상 이미지는 매우 유용하게 활용됐다. 무대 벽에 뚫린 네 개의 문에 맞게 영상이 비치며 교무실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빈 벽에 시간이나 공간, 추적 일지 등이 비치기도 했다. 이는 관객이 극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명확히 따라갈 수 있게끔 했다. 특히 처음 정훈이 벽화를 그리는 장면에서 정훈의 붓질과 함께 벽에 그려지는 영상은 하나의 디지털 예술작품처럼 보였다. 이처럼 흥미로운 영상 이미지 연출은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키기에 매우 충분했다. 하지만 이러한 영상을 활용한 연출은 정확성이 떨어졌다. 조명이 켜져 있는 상태에서 회색 벽에 비추어진 영상은 뚜렷하지 않아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또한 장면이 시작될 때 한 번 보이고 사라지는 영상 이미지였기에, 그 부분을 놓치면 어떤 배경에서 장면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을 보고 나왔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가 다채로운 영상 이미지였을 정도로 연출 자체는 상당히 흥미롭고 새로웠다.

 

 

연출적 부분에 있어 조명의 활용도 핵심적이었다. 특히 연극의 핵심 이벤트라 할 수 있는 추적 장면에서 조명의 역할은 상당했다. 극에서 나온 총 두 번의 추적 장면에서 배우들은 직접 무대를 뛰어다니거나 제자리 뛰기를 했다. 하지만 행동만 있었다면 추적의 긴박함이 그렇게 생생히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에 빠른 템포의 음향과 잡힐 듯 말 듯 한순간에 맞게 밝기가 조절되는 조명이 더 해져 장면의 긴장감은 한층 살아났다. 특히 두 번째 추적 중 봉순자 혼자만 무대에 남게 됐을 때, 조명은 점차 어두워지며 봉순자에게만 핀 조명이 떨어졌다. 이러한 조명은 인물의 암담한 심리를 부각해주었으며, 어두운 무대 가운데에 쓰러진 봉순자 역 배우의 내면적인 연기가 온전히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암전에 있어서도 조명의 역할이 부각됐다. 극의 초반부 암전은 희미하게나마 배우들의 움직임이 보이는 정도였다면,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완전한 어둠으로 암전이 되었다. 이는 후반부로 갈수록 전하고자 하는 주제가 부각되며 무거운 분위기가 되는 극의 전체 흐름과 일맥상통하는 연출로 관객들의 몰입을 높여 주었다.

 

 

얼마 전, 한 남성이 아파트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살해한 ‘진주아파트사건’ 역시 공공임대아파트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래서 비난의 화살을 가해자가 아닌 공공임대아파트 주민들에게로 돌리는 경우가 생겼다. 비난의 대상이 왜 공공임대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이 되어야 했을까. 정훈과 희찬이 벽화에 낙서를 했다고 몰아가던 김민지가 떠올랐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을까. <철가방추적작전>은 봉순자와 함께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려 한다. 이는 마치 정훈이 들었던 투박하고 녹슨 철가방 같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것이 광이 나는 신형 마세라티처럼 화려하고 다채로운 연출에 올라탔을 때, 그것은 더는 투박하지 않았다. 연극을 관람하고 나서 희찬이 그토록 동경하던 마세라티를 탈 수 있게 되기를 바랐고, 철가방을 든 정훈이 다시 붓을 들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바랐다. 철가방같이 투박한 이 이야기가 마세라티같이 화려한 연출과 언제나 꼭 함께하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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