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와 연극의 이중성, 그리고 삶의 이중성

 

글_이연심 (무학여자고등학교 교사)

 

자신은 출연하지 않으면서 분신과 같은 배우를 통해 자신의 예술세계를 표현하고 있으니 배우라는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고맙겠는가?

 

 

얼마 전 제 7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영화 ‘기생충’이 한국영화 최초로 최우수작품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다는 소식이 온갖 매체를 뒤덮었다. 한동안 수상소식이 화제가 되었고 소식을 듣자마자 개봉을 기다리는 사람도 참 많았다. 한국 영화 최초의 수상소식 못지않게 화제가 되었던 것은 수상식에서 보인 봉준호 감독의 행동이었다. 봉준호 감독은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뒤 소감을 말하던 중 객석에서 기뻐하고 있던 송강호를 호명했고, 포토월에서는 무릎을 꿇고 자신이 받은 황금종려상 트로피를 송강호를 향해 들어 올리는 포즈를 취한 것이다. 감독이 배우에게 보여줄 있는 최고의 예우를 보여준 것이다. 배우의 입장에서 보면 수상도 감격이었겠지만, 감독이 보여준 마음이 더 감격이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영화사를 새롭게 쓴 두 사람의 관계를 ‘페르소나(persona)’라는 말로 표현한다. 배우 송강호는 감독 봉준호의 페르소나인 것이다. 이는 단순히 한 작품 속의 캐릭터를 소화한 배우라는 입장을 넘어 한 감독의 예술적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한 배우라는 의미이므로 감독에게 배우는 자신의 자화상이자 특정한 상징을 표현한다. 자신은 출연하지 않으면서 분신과 같은 배우를 통해 자신의 예술세계를 표현하고 있으니 배우라는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고맙겠는가? 배우가 있어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이가 감독이라는 사람일터이니 감독에게 있어 페르소나는 무릎을 꿇고 감사를 해야 할 대상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이 사람들의 관계를 확인한다. 배우가 표현하는 인물을 통해 감독을 확인하고, 감독이 추구하는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를 확인한다. “저런저런! 찌질한 놈을 봤나”며 혀를 차면서 인물을 비판하고 “송강호, 진짜 연기 잘 한다”며 배우를 칭찬한다. 관객은 감독이 그리는 인물과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를 동시에 보게 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봉준호 감독이 설정해 놓은 인물 ‘기택’과 그 인물에 가까워지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배우 ‘송강호’를 함께 보게 된다.

 

하나의 연극에서 1인 다역을 연기하는 배우가 있다고 해도 관객은 연기하는 그 순간의 실제 존재하는 배우허구의 역할을 만나게 된다. 이것을 연극의 이중성, 배우의 이중성, 연기의 이중성 등으로 이야기 한다.

 

 

연극도 마찬가지다. 연기는 무대 위에 ‘배우’와 ‘역할’이 함께 존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배우가 여러 역할을 연기할 때도 마찬가지일까? 하나의 연극에서 1인 다역(배우는 한 명인데 역할은 여럿인 경우)을 연기하는 배우가 있다고 해도 관객은 연기하는 그 순간의 실제 ‘존재하는 배우’와 ‘허구의 역할’을 만나게 된다. 이것을 ‘연극의 이중성’, ‘배우의 이중성’, ‘연기의 이중성’ 등으로 이야기 한다. 어찌 말하건 현실과 허구, 진짜 존재와 가짜 존재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페르소나’는 이러한 이중성을 잘 설명하는 용어 중의 하나인 것이다.

 

우리 일상에서도 페르소나가 있다.

 

 

우리는 심심치 않게 감독과 배우, 연출과 배우 사이를 칭하는 말로 ‘페르소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우리 일상생활에도 페르소나가 있다. 지방에서 자란 여성 기상캐스터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날씨정보를 전달할 때 여성 기상캐스터로서의 모습과 연애중인 여자로서의 모습은 많이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날씨예보를 할 때는

“장마가 소강상태를 보이면서 빗줄기가 약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마가 아직 끝난 것은 아니고 이번 주 수요일까지 비는 이어지겠습니다. 이상 기상 소식이었습니다.”

정갈한 옷차림에 또박또박 표준말을 사용하며 날씨를 전달할 것이다.

 

 

그러나 애인과 전화통화를 할 때는

그: 낼 쉬는데 머하노?

그녀: 안주 계획엄따.

그: 그라믄 낼 갱주갈래?

그녀: 오빠야 갱주는 마이 댕개왔다 아이가

그: 그라믄 딴데가까? 어데갈껀지 말해바라.

그녀: 기냥 시내가가 밥이나 묵고 영하나 보자.

어쩌면 흐트러진 머리에 트레이닝 복을 입고 소파에 누워 아주 편안한 자세로 통화를 하는 모습까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주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듯 때와 장소, 상대 등에 따라 다른 행동과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마치 상황에 맞춰 연기를 하는 배우처럼 우리에겐 여러 모습의 페르소나가 함께 존재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자신과 자신이 수행하는 배역으로 살고 있으며, 우리 모두는 다양한 상황에서 그(그녀)자신(-self)과 사회적 페르소나를 연기하는 그(그녀)를 함께 만난다. 이 역시 이중성이다. 이것을 어떤 학자는 삶의 이중성으로 설명한다.

 

 

‘페르소나’는 그리스 어원의 ‘가면’을 나타내는 말로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한다.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개인이 사회와 접할 때 쓰게 되는 역할 또는 가면”을 페르소나로 표현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를 통해 일상생활에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즉, 일종의 가면을 쓰고 사회 속에서 역할을 수행한다는 얘기다. ‘사회적 가면’이라는 말로도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이론이다. 우리는 누구나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인간이 사회를 떠나서 살 수 없는 만큼 이 가면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가면이라고 하면 가식적이고 거짓의 의미가 부각되어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배우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연기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듯이 사회적 가면 역시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므로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것은 아니다. 마치 다양한 배역을 연기하는 1인 다역의 배우처럼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는 ‘착한 학생’이어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일 잘하는 아르바이트 직장인’이어야 하고, 또 어떤 상황에서는 ‘아직은 어리광을 부리는 귀한 아들(딸)’이어야 한다. 어디 그뿐일까? 하루에도 참으로 많은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그야말로 매일 1인 다역의 연기자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자신과 자신이 수행하는 배역으로 살고 있으며, 우리 모두는 다양한 상황에서 그(그녀)자신(-self)과 사회적 페르소나를 연기하는 그(그녀)를 함께 만난다. 이 역시 이중성이다. 이것을 어떤 학자는 ‘삶의 이중성’으로 설명한다. 삶의 이중성, 연극의 이중성, 연기의 이중성은 실제 ‘존재하는 나’와 ‘남에게 보이는 나’가 공존한다는 점에서 같은 속성을 갖는다. 배우가 자신이 맡은 역할에 맞게 그럴듯하게 연기하지 못하면 문제가 되듯, 판사나 의사가 그 역할에 맞게 행동하지 않으면 문제가 된다. 또 배우가 작품에 따라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지 못하고 한 작품의 특정 역할만을 연기할 수 있다면 문제가 되듯, 우리의 일상에서도 상황에 따라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면 문제가 된다. 타인과의 관계는 하나의 페르소나만으로 일관하여 형성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집안에서 소중한 ‘딸’이 학교나 직장에서도 ‘딸’일 수는 없는 일이니,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우리들은 1인 다역을 연기하는 배우와 같다.

 

세상은 극장이고 인생은 긴 연극이며, 우리 모두는 그 연극 속의 라는 배역을 맡은 배우인 셈이다. 배우가 무대 위에서 최선을 다해 연기하듯 인생이라는 연극의 막이 내릴 때까지 최선을 다해 를 연기해 볼 일이다.

 

 

20세기 후반의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회학자로 평가 받는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은 우리의 삶은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자아를 연출하는 공연과 같다는 관점을 제시한 바 있다. ‘연극’과 ‘성공적인 사회생활’의 깊은 연관성을 생각하게 하는 관점이라 하겠다. 이 글의 목적이 연극교육의 중요성을 피력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니 이러한 얘기는 다른 기회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아무튼 고프먼의 관점은 그 옛날 셰익스피어가 세상을 바라 본 관점과 상통(上通)한다.

이제 셰익스피어의 희극 <뜻대로 하세요(As You Like It)>의 한 장면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해 보자. 이 연극은 아덴 숲을 배경으로 남녀의 사랑이야기, 인생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다. 모닥불 앞에서 우울증 환자 ‘제이퀴즈(Jaques)’가 허심탄회하게 던지는 대사를 들어 볼까?

“세상 전체가 하나의 무대이고 모든 남녀는 배우일 뿐이지요. 다들 등장과 퇴장이 있고 한 사람이 평생 여러 역할을 하는데…
(All the world’s a stage, and all the men and women merely players. They have their exits and their entrances; And one man in his time plays many parts)…”.

세상이 무대고, 인생은 한편의 연극과 같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세상은 극장이고 인생은 긴 연극이며, 우리 모두는 그 연극 속의 ‘나’라는 배역을 맡은 배우인 셈이다. 배우가 무대 위에서 최선을 다해 연기하듯 우리는 ‘인생’이라는 연극의 막이 내릴 때까지 최선을 다해 각자의 ‘나’를 연기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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