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잔해 위에서

극단 프랑코포니의 <단지 세상의 끝>

글_주현식 (연극평론가)

 

작 : 장-뤽 라갸르스
연출 :  까띠 라뺑
번역/드라마투르그 : 임혜경
장소 :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3관
일시 : 2019년 3월 22일~4월 7일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환상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는 사람은 가족이나 마을 사람들이 모두가 달려 나와 자신을 마냥 기뻐하고 따뜻하게 맞이해줄 거라는 착각을 가진다. 그러나 장기간 외지로 떠돈 그는 고향 사람들에게 낯선 타자로 받아들여진다. 귀향자는 “여행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먼 길 온 것도 아닌데요”(루이)라고 생각한다. 정작 그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변할 사람이 아니지”(쉬잔)라고 여겨지지만 “나도 형을 몰라, 우린 서로 잘 몰라”(앙투안)라는 말이 내비추듯, 그는 이미 설명될 수 없는 이상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는 가까이 있으나 심적으로는 멀리 있고, 확실한 존재인 것 같으면서 어디인가 미심쩍어 보인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20년 만에 고향 이타카로 남편 오디세우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부인 페넬로페는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영화 <마틴 기어의 귀향>(1992)에서 주인공 마틴 기어 역시 평화로운 시골 마을을 떠났다가 오랜만에 돌아오지만 그가 가짜라는 의문이 제기되며 이웃들에게 봉변을 당한다. “스스로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내가 나 자신에게 책임이 있고, 극단적으로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환상을 보여주기 위해”, “그들을 보러 가기로,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 내 삶의 흔적이 있었던 곳으로 가기로”(루이) 결심하지만 돌아온 탕아에게 집이라는 공간은 평온과 동시에 상처를 숙명처럼 환기한다.

 

 

극단 프랑코포니가 2013년에 이어 다시 공연을 올린 <단지 세상의 끝>(작 장-뤽 라갸르스, 연출 까티 라팽, 드라마투르그 임혜경, 2019.03.22.~04.07. 아트원씨어터)에서 주인공 루이는 단지 자신의 죽음을 알리고 말하고 싶어 고향에 돌아온다. 그렇지만 자신의 죽음에 관해 “유일한 메신저”가 되겠다는 루이의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환상”은 종국에는 실패로의 귀결, 사라짐의 절박한 감각에 접합된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채 우울증과 고독에 휩싸여 다시 고향을 떠나는 루이, 남겨지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그 여행의 과정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부서지는 언어

<단지 세상의 끝>은 언어 중심의 연극이다. 대사 전달이 주를 이룰지라도 장황한 어투를 통해 등장인물들의 메시지 전달은 일부러 지연되고 훼방된다.

쉬잔  오빠가 그렇게 떠난 건 좋은 일이 아냐,
          그렇게 오랫동안 떠나 있다니,
          그건 좋은 일이 아니라고, 나한테도 좋은 일이 아니고,
          엄마한테도 좋은 일이 아니지.
          (엄만 오빠한테 그런 말 안하겠지만)
          어쨌든 그건 좋은 일이 아니야,
          작은오빠랑 새언니한테도,
          하지만 또
          -내가 잘못 했다고 여기지 않아-

 

 

어릴 적 기억 속에만 있던 큰오빠 루이를 성인이 되어 대면하게 된 쉬잔은 긴장한다. 그래서 그녀는 한 말을 좀 더 고쳐 뒤이어 반복한다. 보다 정확한 말 또는 강한 말을 쓰기 위해 말을 고쳐서 하는 환어(換語)에 따라 그녀의 대사는 여러 겹을 지니게 된다. 먼지가 켜켜이 쌓이듯이 쉬잔의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 자체의 목소리들(환어) 사이에서 말들은 유령처럼 떠돈다. 괄호 표시나 하이픈 속의 말은 이미 쓴 글자를 지우고 그 위에 다른 글자를 쓰는 양피지 사본처럼 기능한다. 이전 ‘등장인물’로서의 쉬잔의 말에 대해 논평하는 서술자로서의 쉬잔의 말이 이러한 부호 속에서 또 다른 층으로 배회한다. 여타 등장인물의 대사가 구현되는 방식들도 비슷하다. <단지 세상의 끝에서>의 발화 양상은 그래서 요설에 가깝다. 정확한 의미를 조준해야 할 발화의 국면은 무대 위에서 부서진다. 산산이 흩어지는 말의 파편이 쌓여 무덤이 된 무대를 관객들은 목도하게 된다.

 

 

말의 무덤이 된 무대는 폐허의 형상을 만들어내지만 언어가 가진 규범적 짐, 의미의 소통이라는 책무로부터는 자유로워진다.

루이   “무슨 소용 있어?”
          “무슨 소용 있어?”라는 이말
          죽음으로 몰아넣는 존재
          –죽음은 날 찾지도 않고서 나와 배회했다-
          무슨 소용 있어?“라는 이 말이 나를 집으로 데려다 주었고, 거기로 보냈다.
          가소롭고 쓸데없는 여행을 그만하도록 내게 용기를 주면서
         그리고 이제 게임을 그만하라고 명령하면서
         이제 시간이 되었다

“무슨 소용 있어?”라는 말을 앞뒤로 반복하면서 루이의 말은 뒤섞인다. 말들은 마침표의 경계를 넘어서 다른 말의 경계를 침범한다. 의미의 순수성과 통일성은 반박된다. 장광설, 요설, 환어의 대사들은 미완성된 파편들이지만 여러 상이한 종류의 문장들로 이동해나가면서 역설적으로 의미의 풍부함, 자유로움을 획득한다. 말들의 폐허는 언어의 몰락을 증시하나 그 몰락의 폐허더미 위에, 의미가 성립하지 않을 것 같은 말의 뒤섞임 속에 말의 다의성이 획득된다. 몰락은 곧 부활이며, 쇠약은 곧 상승이다.

 

 

조각나는 시공간

대사가 부서지면서 동시에 발화되는 시공간도 흩어지며 사멸해간다. <단지 세상의 끝>의 시공간은 실제 물리적 시공간이 아니라 인물 내면의 혼란스러움으로부터 균열된 시공간을 구현한다.

앙투안   정말 이해는 못하겠지만
               그렇게 생각해.
               그렇다고 우리가 형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없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형이 내 기억대로라면, 그걸 부정할 수 없을 거라는 거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형은 부족한 게 없었고, 불행이랄 것도 전혀 겪지 않았어.
              못생기게 나서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그런 것 때문에 굴욕감을 느끼지는 않고 살
              았지. 형은 그런 걸 알지 못했고 보호받았지-

환어의 사용을 통한 언어의 반복, 하이픈을 이용한 서술자적 발화의 침입 등은 현재적 시간을 지연시킨다. 물리적으로 정확한 시간이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 잉여적 발화와 서술자적 논평을 내뱉는 동안은 적어도 앙투완에게 시간은 정지된 것처럼 느껴진다. 형에 대한 앙투안의 애증이 대사 속에는 반영되어 있다. 해서 무대 위에는 앙투안이 주관적으로 지각하는 시간만이 흘러간다.

 

 

집이라는 공간도 물리적 실체를 넘어선다. 말들의 처참한 잔해 위에서 집이라는 곳이 어떻게 안전과 보호의 확실한 실체가 될 수 있겠는가? 폐허가 된 말들의 주검 위에 가족 간의 소통 불능과 반목으로 시체 같은 집의 형상만이 덩그러니 남았을 뿐이다. 돌봄이나 애착의 정서와 함께 보금자리가 되어야 할 집은 도리어 가족을 위협하는 사악한 눈이 된다. 친근감이 넘치는 가정의 안정된 공간 이미지는 단지 어머니의 기억 속에만 남아 일요일이면 가족들 모두가 산책을 나가던 추억의 형태로 남았을 뿐이다.

 

유령들

말의 폐허, 뼛조각처럼 분쇄된 시공간을 통해 무대 자체는 하나의 해골이 되어 간다. 무대 뒤편에 여러 색깔의 조명이 투영되는 유리 배경 사이 조그마한 문으로 인물들은 등퇴장을 한다. 유리 배경 뒤 등퇴장의 움직임은 실루엣으로 처리되어 몽롱하면서도 모호한 이미지를 낳고 황량함과 고독, 내적 심연의 바닥모를 어지러움을 이미지화한다. 의자 몇 개만을 놓아 미니멀리즘 형식으로 텅 빈 무대 공간은 인물들의 심적 공간 자체가 내포한 공허감, 고독감과 이어진다. 그러므로 <단지 세상의 끝>에서 생동해야 할 삶의 경계는 항상 죽음과 뒤섞여 있다. 현실적 삶은 죽음이라는 사건과 강고히 결합되어 있는 것이라고 연극은 말하려는 듯 하다. “다가올 죽음과 나, 우리는 이별 인사를 한다. 우리는 산책을 한다. 우리는 밤마다 인적 없고 가볍게 안개 낀 거리를 걷는 걸 아주 좋아한다. 우리는 고상하고 너그럽다”라는 루이의 말처럼, 나와 죽음은 절친한 동무다. 삶과 그 역사는 몰락하는 단계에서만 의미를 띤다. 그렇다면 죽음과 함께 산산이 부서진 자는 누구였나? 그리고 죽음과의 무도(舞蹈)로 삶을 껴안는 시선은 누구의 것인가? <단지 세상의 끝>은 유령 시점의 연극이다. 루이가 이미 죽은 자라면, 무대는 죽은 자가 산 자의 세계를 떠도는 회랑의 모습을 띤다. 자애로운 어머니, 발랄하지만 그래서 더 슬퍼 보이는 쉬잔느, 가족부양의 책임감에 시달리며 노동자인 자기 신분에 열등감을 갖고 있는 앙투안이 이미 죽은 자들이라면, 무대는 산 자 루이의 가족에 대한 잿빛 기억의 공간이다. 이런 유령들이 떠도는 것 같은 효과를 내는 무대는 기존 논의에서 다루어진 것처럼 가족 간 소통불능과 고독감에서 연원한 장면일 수도 있고, 죽음을 앞둔 작가의 몸부림에서 유래한 장면일 수도 있다.

 

 

자갈 위에서 내 발소리와 함께 난 다시 길을 떠난다

그러나 유령 효과는 중요하지 않다. 유령만큼이나 살아 있는 자 또한 잔해의 형태로 살아간다. 삶의 완성된 형태는 폐허이고, 몰락으로 부각된다. 무너진 잔해더미 위에서 파편들을 쉬지 않고 쌓아 올리는 과정이 삶이다. 잔해의 축적 속에서 부활의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파편에 불과한 환어의 군더더기 말들이 외려 다른 말들의 경계를 침범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듯. 조각난 언어들, 무너진 시공간들의 우울증적 축적 속에서 갑작스럽게 또 다른 세계로의 이동이 가능해지고 세계는 내밀한 빛을 드러낸다. 그래서 루이는 에필로그에서 “자갈 위에서 내 발소리와 함께 난 다시 길을 떠난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다시 죽음과 마주치더라도 잔해와의 대면이 내포하는 미끄러짐과 우회 속에서 의미는 적어도 추억된다. 벤야민의 말대로 “자신의 실패를 강조했던 열정보다 더 기억할 만한 것은 없[다]”. 단지 그게 세상의 끝일 터나 가볼 도리밖에 없다. “그건 망각이다, 후회하게 될, 내가 저지르지 않는 함성처럼”이더라도, 부활을 향해 도약하기 위해서는.

 

 

동시대 프랑스의 주목할 만한 여러 작품들을 극단 프랑코포니는 한국 공연 예술계에 적절히 소개해 왔다. 진부한 사실주의와 과도한 심리주의가 활개를 치는 한국 공연예술계에서 라갸르스 같은 극작가의 작품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번역되고 공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번에 공연된 장-뤽 라갸르스의 1990년도 작 <단지 세상의 끝>은 길고 중복적인 대사들 때문에 자칫 공연하기에 까다로운 작품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리듬감 있는 연출과 배우들의 숙련된 연기를 통해 연극적 긴장감과 에너지가 발산되었다. 다만 예술가가 문화의 움직임을 지진계처럼 표현하는 자이고, 그의 작품이 변화무쌍한 리얼리티를 기압도처럼 징후로서 드러내는 것이라면 일견 아쉬움이 남는다. 매 작품에서 죽음을 그리면서 자신의 작품에 유령처럼 배회하는 라갸르스의 극작가로서의 문제의식은 한국 사회에서 발생한 개인적, 집단적 죽음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려던 기존 작업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을 터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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