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 달은 떠오른다

-연극 <월화–신극, 달빛에 물들다>

 

글_이유영(공이모 회원)

 

총괄디렉터   양정웅
   한민규
연출   이치민
제작   강원도립극단
장소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일시   2019년 8월 17일~18일
관람일시   2019년 8월 18일 15시

 

‘나는 배우다!’

 

<월화-신극, 달빛에 물들다> (사진제공: 강원도립극단)

 

일제강점기 당시 연극판은 남성 중심이었고, 그 속에서 ‘여’배우는 기생과 같은 천대를 받는다. 아니, 실제 인식 자체가 기생≒여배우였다. 오죽하면 여배우가 필요할 때 기방에서 구했다는 말을 하겠는가. 이러한 시대에 속에 혜성처럼 등장한 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를 연극 <월화–신극, 달빛에 물들다>(이하 <월화>)는 무대화한다.

<월화>는 이월화가 당대 최고의 여배우로서, 진정한 ‘月華’가 되는 모습을 그린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내적 욕망, 즉 ‘여배우도 배우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인식을 전환을 위해 세상의 시선에 맞서 싸워야 하는 고독한 혁명가 같은 모습에 중점을 둔다(작가가 보는 이월화는 변혁과 혼돈의 시기에 피어난 혁명의 꽃이라고 한다─팸플릿 내용 참조).

 

<월화-신극, 달빛에 물들다> (사진제공: 강원도립극단)

 

여전히 배우가 아닌 ‘여배우’라고 불리는 작금의 현상에 이월화의 목소리는 강력한 힘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연극 <월화>가 내재한 힘이다. 하지만 이월화와 혁명의 연결고리가 분명하게 전달될까? 이 물음의 답은 선뜻 내리기 어렵다. 인물의 성격이 단선적으로 보이는 경향이 강할수록 그 인물의 욕망과 동기는 설득력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배우다’라고 외치는 이월화는 보이지만, 이런 모습이 투사의 모습처럼 보이는 점은 다소 과장되어 보이는 아쉬움은 떨칠 수가 없다.

이월화에게 필요한 것, 정말 혁명의 꽃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진짜 月華가 되기 위해서는 그 존재 하나만으로 성립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직선 위 대척점으로 존재하는

 

<월화-신극, 달빛에 물들다> (사진제공: 강원도립극단)

 

<월화>의 흥미로운 점은 ‘최성혜-복혜숙-이월화’의 구도였다. 민중극단의 <영겁의 처> 주인공 오디션 당시, 신극이 추구하는 연기 스타일에 얼마나 부합하는지에서부터 드러난다. 최성혜는 철저히 탈언어화된 상태에서 움직임만 보인다. 이유는 간단했다. 태초의 인간은 말이 아닌 몸짓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2010년대라면 최성혜의 움직임의 연기가 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때는 바야흐로 1920년대, 신극의 출발이자 ‘말’ 중심의 연극을 추구하던 때였기에 최성혜가 보여준 움직임의 연기는 인정받기 어렵다.

 

<월화-신극, 달빛에 물들다> (사진제공: 강원도립극단)

 

복혜숙은 최성혜와는 달리 언어의 연기를 선보인다. 그러나 뭔가 뒤섞인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연기이다.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노라가 집을 나가기 전의 장면을 연기하지만, 과장된 몸짓과 신파조의 억양을 버리지는 못한 상태였다. 복혜숙이 오디션에서 선보인 연기는 신극이 추구하는 언어의 연극과 신파극의 중간 어디쯤에 있으며, 최성혜와 이월화의 중간에 위치한 연기 스타일이었다.

 

<월화-신극, 달빛에 물들다> (사진제공: 강원도립극단)

 

마지막으로 오디션을 본 이월화. 그녀는 신극이 추구하는 연기 스타일에 부합했다. 자신의 일기를 각색해 그야말로 언어의 연극을 선보인다. 어떤 움직임도 아닌, 말로 감정을 담아 전달한다. 말로서만 감정을 충분히 전달하고, 감정이입을 시키는 월화의 연기. 그러니 신극 <영겁의 처>의 주인공은 이월화가 될 수밖에 없었다.

 

<월화-신극, 달빛에 물들다> (사진제공: 강원도립극단)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점은 신극에 맞는 연기 스타일이 ‘최성혜→복혜숙→이월화’로 넘어가는 구도이다. 신극의 측면으로 보면 세 배우가 선보인 오디션 연기는 화살표의 방향대로 더 세련된, 최신의 연기라고 할 수 있다. 오디션의 심사위원들이 이들의 연기에 보인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최성혜의 연기가 끝나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복혜숙의 연기를 보고선 나름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 그러다 이월화의 연기를 본 그들은 단번에 주인공으로 결정해버린다. 결국 이월화의 연기는 그들이 인정하는, 그래서 세상에 선보일 수 있는 빛의 영역에 있는 것이라면 최성혜는 누구의 인정도 받지 않는 어둠으로 월화의 대척점에 위치하는 셈이다. 그러면 복혜숙은 이 둘의 중간 어디쯤에 서 있다.

 

<월화-신극, 달빛에 물들다> (사진제공: 강원도립극단)

 

이러한 일직선으로 흐르는 구도는 여배우로 살아가는 방식에도 드러난다. 배우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하룻밤을 허락할 수 있는 최성혜와 이러한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하고 있는 복혜숙, 그리고 이들의 생각에 철저히 반대하는 이월화는 어둠에서 빛으로 넘어오는 직선상에 위치한다. 물론 월화의 생각과 태도는 당연히 옳다. 하지만 월화의 신념이 옳다는 것을 보일수록, 월화와 반대에 있는 두 여성에게 눈이 갈수록 홀로 고고한 학처럼 서 있는 그녀의 존재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월화-신극, 달빛에 물들다> (사진제공: 강원도립극단)

 

인물 구축 면에서는 다소 단선적으로 보이지만, 인물의 성격을 들여다보면 흥미 있는 발견을 할 수 있다. ‘최성혜←이월화’로 화살표 방향이, 즉 위에 놓인 위치가 역전된다는 점이다. 인물의 행동에 의도나 동기가 분명히 전달되고, 설득력을 강하게 가지는 캐릭터는 최성혜다. 최성혜는 배우에 대한 욕망, 무엇보다 박승희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월화를 질투하고 왕평렬과 잠자리도 가진다. 암흑처럼 어둠 속에 있던 최성혜의 동기와 욕망이 오히려 깊이를 드러낸다.

 

<월화-신극, 달빛에 물들다> (사진제공: 강원도립극단)

 

반면, 이월화는 자신의 어머니들─낳아주신 어머니, 키워주신 어머니─에 대한 트라우마로 여배우는 기생처럼 취급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이것으로 극 전체를 이끌어가기에는 동력이 약하게 느껴진다. 복합적인 감정을 보이지 않으며, 설령 보인다고 해도 그 강도가 약하다. 그래서 월화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느껴지지 않은 점이 아쉬울 뿐이다. 하지만 복혜숙에 비하면 이월화는 괜찮은 편이다. 복혜숙은 두 인물 중간에 위치하다 보니, 인물의 성격구축에서는 그 어떤 힘도 가지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복혜숙은 이월화와 최성혜 두 양극단의 완충 역할에 그쳐, 그녀에게 연민이 느껴졌다.

 

, 공존해야 하는 영역

 

<월화-신극, 달빛에 물들다> (사진제공: 강원도립극단)

 

세 명의 여배우를 직선상에 위치해두고 과연 <월화>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이월화, 왜 그녀는 ‘여배우가 배우’가 되는 순간을 바란다는 점을 강조했을까? 자신이 죽는 순간에도 마치 자신이 죽고 난 이후의 어떤 시점에는(이 시점은 우리가 사는 지금-현재를 말하는 듯하다) 이 순간이 도래해야 할 것이라고 단언하듯이 말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드는 이유는 아마도 연극 <월화>는 ‘이월화’라는 인물의 삶에서 화려한 꽃으로 만개해가는 시점, 여배우로서 존재할 수 있는 그 시간을 보여주는 데 주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월화-신극, 달빛에 물들다> (사진제공: 강원도립극단)

 

하지만 진짜 조선 최초의 이월화의 배우로서의 삶을 보여주려면, 이월화를 둘러싼 박승희, 윤백남, 왕평렬, 그리고 복혜숙, 최성혜와 보다 복합적인 관계 속에서 인물의 성격이 심층적으로 구축될 필요가 있다. 극 전체를 이끌어야 하는 존재가 매력적이어야 관객들도 무대 위 사건에 몰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그러지 못하다. 그 예로 9년이 지났다는 자막으로 대체된, 즉 이월화가 왕평렬을 죽이고 난 이후 그녀가 중국으로 건너가 겪어야 했던 명백한 暗의 시기를 보여주지 않으려고 한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삭제된 시간은 9년 이후 조선에 다시 나타난 월화의 말로서 대신한다. 결국 무대 위 월화의 暗은 그녀의 말, 남루한 행색, 병든 몸으로 전달할 뿐이다.

 

<월화-신극, 달빛에 물들다> (사진제공: 강원도립극단)

 

물론 작가가 생각하는 이월화의 ‘혁명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월화가 짓밟히는 모습은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혁명적인 모습 뒤의 인간적인 면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 인물이 설득력을 획득하기 어렵다. 이월화의 삶 자체의 어둠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다층적인 심리를 구축하지 않은 것과 같다. 시대의 어둠, 남성들의 어둡고 추악한 힘에 대항하는 月華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월화는 분명 우리가 기억할만한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혁명가와 같은 모습을 투영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이월화의 혁명적인 모습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배우로서 치열했던 삶을 보여준다면, 더 매력적인 주인공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월화-신극, 달빛에 물들다> (사진제공: 강원도립극단)

 

본연의 모습인 이정숙을 버리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이월화가 진정한 月華가 되려면, 어둠과 밝음이 공존해야 한다. 어둠이 있어야 밝음을 알 수 있고 밝음이 있어야 어둠을 알 수 있듯이, 이월화는 이정숙과 함께 공생해야 한다. 이월화가 이정숙을 포용하고 있음을 보여줄 때 무대 위에서 살아있는 인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두 인물의 공존은, 즉 이정숙의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은 이정숙이 이월화가 되기 직전 민중극단 <영겁의 처> 주인공 오디션에서 자신의 일기를 각색한 연기를 보여주었을 때, 죽기 전 이월화의 삶에서 한발 떨어진 상태에서 자신이 월화로서 만났던 사람들이 스치듯 지나가는 장면 두 곳이었다. 그 외의 장면은 이정숙이 고개를 들기 전 항상 이월화가 우선이었다.

 

연출의 숨바꼭질

 

<월화-신극, 달빛에 물들다> (사진제공: 강원도립극단)

 

연극이 무대에서 관객들과 만날 때 직접 대면하는 것은 배우이다. 그래서 연극을 배우 예술이라고 한다. 그러나 무대에는 배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무대를 통해 작가의 목소리도 듣게 되고, 무대 전체에 스며있는 연출도 만나게 된다. 이 모든 요소를 종합적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이 연극의 묘미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월화>는 배우는 존재하지만, 연출은 부재하다고 말할 수 있다. 배우와 작가 뒤에서 가려진 연출을 찾아야 한다. “못 찾겠다 꾀꼬리!”라고 외쳐야 할 만큼 연출은 공연에서 어둠 속에 가려져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 쉬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은 조명 아래 빛나는 무대 위에서 결국 어둠 속에 가려진 연출을 찾지 못한 이유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월화-신극, 달빛에 물들다> (사진제공: 강원도립극단)

 

반면, 평면적 혹은 단편적으로 보일 수 있을 이월화라는 인물을 마지막 순간까지 끌고 가는 문수아 배우의 힘은 인정! 간혹 당찬 모습보다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으나, 끝까지 이월화 캐릭터를 끌고 가는 배우의 힘은 무대로 시선을 끌게 하는 포인트였다. 하지만 이월화를 연기한 배우는 커 보였으나, 정작 이월화가 왜소하게 보인 점은 옥에 티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볼거리는 라이브로 진행한 가야금 연주와 노래였다. 라이브로 진행되는 연주는 큰 무대 공간의 빈틈을 채워주었다. 하지만 이 또한 성배가 아닌 독배일 수 있는 이중성을 내포한다. 무대 위 사건이 관객을 완벽하게 흡수하지 못한다면, 주객전도 현상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월화-신극, 달빛에 물들다> (사진제공: 강원도립극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래서 잊지 말아야 하는 점은 존재한다. 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의 존재. 이것이 이 연극이 공연될 수 있는 강력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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