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서는 안 되는 지옥

연극 <해피투게더>

 

글_박예설

작/연출   이수인
제작   떼아뜨르 봄날
장소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일시   2019년 10월 18일~20일

 

 

Happy together! 다 함께 행복하자! 모두의 행복을 외친다니, 이 얼마나 낭만적인 말인가. 하지만 당신은, 이를 실현한다는 명목하에 끔찍한 지옥이 만들어졌다면, 그리고 그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감금당하고 죽어 나갔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2012년 5월, 과거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의 생존자인 한종선 씨가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인 것을 시작으로 모두가 잊고 있었던 지옥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산의 ‘형제복지원’이란 곳에서 3천여 명 이상이 감금당하고 5백여 명 이상이 의문사한 사건을 말한다. 말로만 ‘복지원’이었지, 실상은 한국판 아우슈비츠라고 불릴 만큼 강제노동, 폭행, 성폭행, 살인 등과 같이 비이성적인 일들과 인권 유린이 난무했던 곳이었다. 이런 일이 현대에서도 자행되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믿기 힘들지만, 더 믿기 힘들었던 건 부산 시청과 경찰, 그리고 당시 정권까지 이 일에 가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이런 만행이 세상 밖으로 처음 드러났을 때도 복지원장은 고작 2년 6개월이라는 형을 받았으며,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은커녕 진상 규명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채 끝이 난 것이다. 하지만 2012년, 한 생존자가 이 사건에 대한 화두를 다시 세상에 던졌다. 잊으면 안 된다고. 그리고 이듬해인 2013년, 그가 겪은 실화와 다양한 증언들을 바탕으로 이수인이 연출을 맡은 <해피투게더>가 초연되었다.

 

 

한 남성이 무대로 걸어 나온다. 잠시 동안 관객들을 찬찬히 둘러본 후에야 그는 입을 연다. 애인과 데이트를 하는 행복한 순간에 벤치 위의 노숙자가 원피스를 입은 애인의 예쁜 다리를 실실거리며 대놓고 보고 있다면? 역에서 내려 참았던 담배를 피우는 그 행복한 순간에 구걸하는 사람이 있어 마음을 베풀었건만,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그가 되려 거지 취급한다고 욕을 한다면? 이어서 그는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그들과 같은 거리의 부랑자들을 누군가가 치워 주길 내심 바라고 있지 않았냐고. 그들만 없으면 조금 더 행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냐고. 그러기 위해서 형제복지원은 존재해야 했으며, 자신은 오히려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해 희생한 것뿐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그는 상당히 논리적이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렇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지옥에 밀어 넣었던 가해자, 복지원장 박인근이다.

 

 

이수인의 연출가 노트를 살펴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나는 어릴 적 나치의 만행, 유태인의 참상을 다룬 프로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히틀러의 말을 들어보고 싶다.”’

이로써 <해피투게더>는 히틀러에 대변되는 인물인 박인근의 자기 변론으로 막을 올리고, 이는 본 연극의 특징을 살리는 데에 한몫을 한다. 이 극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하면, 가해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분노와 피해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연민을 경계하게 한다는 점이다. 이는, 뒤에서도 살펴보겠지만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이들의 비중을 거의 동등하게 구성해 놓았다는 것과, 이렇게 가해자 박인근을 극의 선두에 내세웠다는 것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물론 그가 저지른 범죄는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고 용납해서도 안 되지만 자신의 행위에 타당성을 부여한 이유들을 살펴보면 나름 다수가 공감할 법한 문제들이다. 이에 더해 그는 관객들에게 소박하더라도 어느 정도 악이 내재된 욕망을 품지 않았었냐며 추궁한다. 그것이 맞다면 당신에게도 죄가 있다며 우리들을 신랄하게 꼬집고는 한순간에 공모자로 만들어 버린다.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당당한 눈빛 앞에 우리는 그에 대한 분노와 비난을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그가 말을 마치자 갑자기 남자들 무리가 우르르 등장한다. 그들은 9살의 한종선 씨, 육교에서 구걸하던 아무개 씨, 포항제철에서 근무하던 서상렬 씨 등을 비롯한 형제복지원의 피해자들이다. 그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차마 추억이 되지 못한 기억들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울부짖지 않는다. 그저 ‘그런 일이 있었지.’라는 식으로 담담하게 이어 나간다. 이러한 과정은 남배우들의 과도한 액션이나 무대 한 편에 따로 자리한 두 여배우들의 추임새로 다소 혼잡하게 이루어진다. 때문에 안타까운 사연이었건만 관객들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쉽게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는 앞서 말했듯이 피해자들에 대한 과도한 몰입을 방해하려는 것이다. 이야기들의 공통적인 맥락은 이러하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파란 트럭에 실리고 형제복지원으로 끌려왔다는 것. 그리고 그곳엔 영문도 모른 채 맞고 있는 자신과, 영문도 모른 채 때리는 이가 있었다는 것. 아무 죄가 없었음에도 그저 살기 위해 없는 죄를 만들어 잘못했다고 비는 모습은 그들이 왜 그곳에서 순응하며 살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폭력을 가하는 이들도 한때는 피해자였지만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잔인한 가해자로 변모하게 되었는지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극은 가해자, 피해자, 그리고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이들의 관점이 자연스럽게 교차되며 어느 한 쪽에도 치우지지 않는 구성으로 진행된다. 단순히 악으로 분류되는 이의 행위 결과만 가져온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동기와, 그 동기를 부여해주고 가능하게 해준 1980년대라는 사회적 배경 또한 극으로 끌고 오면서 관객들이 그 행위에 대해 냉철하게 분석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런 일종의 거리두기는 관객들에게 이성적인 시각을 부여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관객 자신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낸다. 혹은 성찰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지하고, 무관심하고, 외면하던 ‘내가 있다.’라는 인지를 하게 만든다.

 

 

극은 본격적으로 형제복지원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룬다. 그곳에서 수용자들은 군대식 구호를 외치고 군가를 부르며 이유 없는 폭행을 당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검사가 형제복지원의 실체를 목격하고 박인근을 기소하여 법정에 세운다. 수용자들의 증언이 필요했지만 그들은 박인근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옹호해주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박인근은 고작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는다.

극은 계속해서 관객들과 거리 두기를 시전한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이 극은 실제 사건을 구현한 것이다’라는 테두리 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극 초반부에서 피해자들이 우르르 등장했을 당시, 그들 중 한 명은 관객들을 향해 목이 터져라 외친다. 이 극은 결단코 사실이 아닌 허구라는 점을 명심하라는 것.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했던가. 우리는 그 부정을 긍정으로 받아들인다. 즉, 이 극은 사실이라는 것으로 말이다. 무대 뒤 스크린 활용 또한 관객들을 테두리 안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다. 붕대로 칭칭 감은 것처럼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스크린에는 다양한 영상 자료가 제시된다. 극의 시대적 배경인 한국 현대사의 모습이 조명되기도 하고, 재판에서 박인근이 감형되는 과정을 차례대로 보여주기도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위 영상들이 진행되는 동시에 배우들의 연기도 함께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는 영상 속 실재했던 사건과, 현재 무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 하나로 맞닿아 있음을 뜻한다. 즉, 무대 위에서는 실제 사건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관객들은 극이 거리를 두더라도 하염없이 멀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 훨씬 더 정확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재판 이후의 형제복지원을 보여주는 극의 말미에는 박인근의 아내가 등장한다. 그녀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수용자들에게 과자를 던져준다. 허겁지겁 주워 먹는 수용자들 위로 곧이어 하얀 눈이 내리고, 아무 말 없이 일제히 하늘을 보는 그들의 모습에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담겨있다. 아주 잠깐이었음에도, 눈이 내린다는 사실에 행복해하는 그들의 모습은 극의 전반을 주도했던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하지만 감상도 잠시, 박인근은 그들에게 힘껏 눈을 던지라고 한다. 그의 명령이 몸에 밴 수용자들은 관객들을 향해 힘껏 눈 뭉치를 던진다. 그러나 그들이 던져올린 눈 뭉치는 관객들에게 닿지 못하고 그 앞에서 허무하게 떨어져 내린다. 어디선가 나 여기 있어요, 제발 우리를 잊지 마세요,라는 절규가 들려오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순간 관객들은 깨닫는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었음을. 그리고 침묵하고 있던 우리 자신의 모습들을 말이다.

당신은 <해피투게더>라는 제목을 보고 어떠한 내용을 떠올렸는가. 혹시 감동과 행복을 주는 내용을 떠올리진 않았는가. 이렇듯 제목 만으로는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제작자 장영승은 이렇게 말한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가 희생된 것 아닌가. <해피투게더>는 소수의 입장에서 우리가 같이 행복해보자는 의미가 담긴 이야기다. 소위 돈 많고 다수인 이들도 자신의 행복이 남의 불행으로부터 시작되면 행복할까? 같이 행복해야 그들도 행복할 것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같이 모두가 행복해지자는 뜻의 제목이다.”
형제 복지원은 그의 말마따나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가 희생된 곳이다. 그것도 누군가의 어머니였을, 아버지였을, 아들딸들이었을 평범하고도 무고한 사람들이 말이다.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한 지옥은 어디에도 없다. 가령,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해 지옥이 만들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복지원장과 같은 범죄자들이 있어야 하는 곳일 것이다.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에게 과거를 잊기란 힘들겠지만, 잊어도 된다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면 안 된다. 우리가 잊지 않아야 그들이 과거를 잊을 수 있는 것이다. 아직 형제 복지원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잊지 않고 그들과 함께 한다면 그땐 모두의 행복을 말하는 ‘해피투게더’가 실현되는 것이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