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탁자와 의자, 비쩍 마른 자작나무 숲
그리고 지독한 고독

연극 <도둑들>

 

글_오유경(극단 그룹動·시대 연출)

원작   데아 로아(Dea Loher)
번역   장은수
연출   남상식
단체   극단 퍼포먼스온
장소   대학로설치극장 정미소
일시   2019년 9월 20일~29일
관극일시   2019년 9월 28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일어난다. 자살과 살인, 사기와 공포, 치매와 낙태, 사랑에 속고, 가족이 실종되고, 살해위협도 일어나지만, 그 무엇도 새로울 것은 없다. 어떤 일상의 사건도 그들을 흔들어 놓지 못한다. 우울과 외로움과 공허. 지독한 고독 그 자체가 자신이 되어버린 사람들. “우린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해요. 그럼 누구 인생을 사는 걸까? 그럼 남의 인생을 사는 거겠죠? 그럼 도둑질을 해서 사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모두 도둑들이에요.” 작품 《도둑들》의 ‘도둑’은 그들의 삶을 훔치는 자들. 곧 그들 자신(自身)이다.

 

 

독일의 작가, 데아 로아의 작품 《도둑들》은 린다를 둘러싼 서로 아는 혹은 서로 모르는, 혹은 서로 얼굴만 아는, 가족 혹은 그들과 이렇게 저렇게 관계된 사람들의 파편적인 삽화적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무대엔 모든 인물이 항상 늘 공존해 있다. 나이도 성별도 삶의 양식도 취미도 다른 사람들. 작품이 진행되면서 서로 상관없는 다른 일상들이 차례로 나열되듯 하지만, 작고 큰 톱니바퀴처럼 그들은 서로 관계된다. 하지만 이 연결조차 관계랄 것 없이 하릴없이 약하다. 린다는 이혼하고 혼자 산다. 그에겐 치매로 요양원에 있는 아버지, 예르빈과 오빠 핀이 있다. 린다는 늘 자작나무 숲 어딘가에 늑대가 나타난다고 믿고, 늑대가 나타나면 이 마을에도 변화가 오고 곧 자신의 삶에도 무언가 획기적인 변화가 올 거라 기대한다.

 

 

핀은 오래전 가출했다. 그는 전직 보험회사 직원으로 정리해고를 당했다. 노숙자로 길거리에서 지내다 도시에 아파트를 얻어 살지만, 극도로 고립된 생활을 하다가 결국 권총 자살한다. 린다는 늘 오빠를 찾는 아버지에게 말한다. “오빠는 아버지를 잊었다. 오빠는 우리를 잊었다.”라고. 린다가 가끔 마트에서 만나 인사를 하는 경찰관 부인은 일과 공부를 병행하느라 늘 피곤하고, 남편은 퇴근하면 늘 맥주와 축구경기를 본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지 않는다. 지쳐가고 결국 이혼한다. 동네 옷가게 여사장은 늘 돈을 뜯어 가는 애인이 있다. 하다 하다 그 애인은 돈 때문에 그녀를 살해하려 한다. 극적으로 목숨을 구한 사장. 자신이 당한 일보다 그 일로 애인이 떠난 사실이 더 견디기 어렵다. 사랑 없이 홀로 견뎌야 하는 일상이 더 두렵다.

 

 

옷가게 점원인 미라는 십대 소녀인데 임신 중이다. 아기 아버지인 장의사 요제프는 미라가 낙태 수술을 할까봐 두렵다. 미라가 단호하기 때문이다. “나는 친아빠를 모른다. 아빠를 모르는 내가 어떻게 아이를 낳느냐.” 미라는 기증된 정자로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요제프는 수소문해서 미라를 만든 기증된 정자의 주인을 찾고, 그를 찾아간다. 그는 마을의 의사, 슈미트이다. 슈미트부부는 일명 ‘쇼윈도우(show window) 부부’다. 평범한 일상을 늘 함께하고 대화를 나누지만 그들의 관계는 매우 기계적이고 도식적이다. 그들은 늘 공포를 느낀다. 그들의 정원 숲 어딘가에서 늘 무엇인지 두려운 존재가 그들을 주시하고 침범하려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침 정원에서 자신들을 지켜보던 요제프를 발견하고, 그의 막무가내의 제안으로 그를 집에 들여 며칠 함께 생활하지만, 요제프가 그들의 일상을 깨뜨릴지 모른다는 공포에 그를 살해한다. 경찰관 토마스에게 한 부인이 찾아온다.

 

 

그녀는 이 지역 사람이 아닌 이방인이다. 그녀는 여기로 신혼여행을 와서 남편이 실종되었고, 그를 43년째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이곳을 그만 떠나려 한다고. 핀의 죽음으로 린다는 그의 유품 가방을 가지러 간다. 거기서 옷가게 사장의 애인을 만난다. 그는 린다에게 자신이 핀의 친구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핀의 보험금을 노리고 접근한 것이다. 린다는 모든 것에 지친다. 오빠의 뼛가루. 유서도 메모도 쪽지 한 장도 없다. 자살한 경우는 가장 싼 관을 산다. 치매 노인 예르빈은 오늘도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다. 버스가 오지 않는 요양원 버스정류장.

 

 

“‘오늘은 오지 않을 거야’하면 버스가 오고, 버스를 기다리면 버스가 안 와.” 예르빈은 절규한다. “아들아! 제발 날 좀 데려가 다오!” 그가 매일 기다리는 버스는 그의 죽음일지 모른다. 요제프의 장례식장. 미라는 중얼거린다. “아빠에 대해 묻지 말걸. 더 이상 말하고 묻지도 말걸. 근데 이제는 너무 늦었어. 아기는 아빠를 영영 못 만나겠어.” 린다는 핀의 죽음을 아버지에게 숨긴다. 오빠의 유품인 목도리에서 오빠의 핏자국을 발견한 린다. 오빠의 냄새. 린다의 시선이 아버지, 요제프를 향하지만 공허하다. 요제프도 린다를 향해 있지만 그의 시선은 린다에게 없다. 삶의 우울. 그들 모두 너무 피곤하다.

 

 

잡다한 여러 이야기가 파편적으로 흩뿌려지고 지나간다. 여러 인생의 서사(序詞)가 죽 나열되며 무의미하게 곁을 지나간다. 아니 흘러간다. 마치 빈 어느 쓸쓸한 숲속 작은 개울의 물처럼. 때론 버석하게 마른 잎들이 서로의 부딪는 바람처럼. 무심하게 늘 그랬던 것처럼 일상 그대로. 누구도 쉽사리 그 숨죽인 우울한 고요를 함부로 깨뜨리지 못한다. 작품 《도둑들》은 부조리한 자신의 삶에 감히 말하거나 분노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숨죽인 고독만이 무대에 가득 하다.

 

 

연출은 그 무게를 덜어내듯, 각각의 이야기를 사람들의 합창 노래로 연결한다. 이 선택은 매우 탁월하다. 지속 되는 피로한 일상의 연속이 관객들의 집중을 흩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연은 적절한 순간에 12명 인물들의 쏟아지듯 아름다운 합창 노래를 제공함으로써, 쓸데없이 감정이입(感情移入)하며 처량해지는 관객의 동정심(同情心)을 아주 우아하고 세련되게 거절한다. 이로써 자칫 정체될 수 있는 극의 흐름이 무리 없이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매우 예의 바르고 고전적인(classical) 방식이다.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묵직함이 매력적인 어떤 유럽의 중년 사내가 담백하게 춤을 추고 있는 걸 보는 것 같다. 배우들의 노래는 제대로 된 발성과 화음을 연습한 결과였고 듣기에 매우 아름다웠다.

 

 

무대에는 각각 모양과 특징이 서로 다른 탁자와 의자로 가득 차 있는데,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는 무슨 서점(書店)이나 도서관인 줄 알았다. 이것은 인물들의 합창 노래와 함께 자연스럽게 재배치되는데, 작품이 각각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걸 돕는다. 이와 더불어 인물들도 재배치되는데, 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주요 인물뿐 아니라, 다른 인물의 이야기 속 배경 인물로도 연기한다. 1인 다역(多役)인 셈인데, 각각의 개성이 뚜렷이 다른 기존의 1인 다역의 방식과는 다르게, 개성이 짙은 주요 인물 하나와 어느 그림 속에 눈코입이 흐릿한 채 화면 한구석에 존재하는 여러 배경인물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공연은 하나의 서양 유화작품처럼, 섬세하게 움직이는 그림 같다. 회화적이다.

 

 

아! 본인은 이 공연이 좋았다. 오래간만에 묵직한 서양 고전 장편소설 하나를 조용히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읽어내려가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 책은 한 손으로 들기에는 조금은 무겁고 딱딱한 하드커버(hard-cover)이며, 단번에 읽어 내기에 쉽지 않게 두께가 상당히 되어 보였고, 동정을 바라지 않는 그 지독한 고독이 퍽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책에는 항상 고전적이면서도 울림이 있는 문구(文句)가 있고, 형광펜으로 줄을 치는 것이 제 맛이다. 정확하진 않지만.

‘정상적인 얘기를 하고 싶어. 날씨, 별, 그런 얘기.’
‘수면제 복용자. 자다가 깨면 전화번호를 쓴다. 인생에서 가까웠던 사람들의 이름과 사랑했던 기억과 이유를 쓴다.’
‘지금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던 낭만적인 것은 없다.’
‘우리가 나의 관심사도 아니고, 시대의 의미도 없고 상대가 알 수 없는 일상의 자락을 기대하고 즐거워한다면 달라질까?’
헤어지고 가정이 산산조각이 나는데도 말한다. ‘달라질 것은 없어.’
‘사람들은 왜 항상 떠날까?’
‘멋진 삶에는 대가가 필요해.’

더 많지만 여기서 그만.

 

 

한가지, 이런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은 지독히도 유럽적이다. 그중에서도 독일적이다. 서양 고전작품에 익숙하거나, 독일영화나 여행을 통해 그 정서의 분위기와 맛을 어느 정도 경험했고 또 취향에 맞았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맛이 낯설고 취향이 아니라면 3시간에 가까운 공연시간을 줄곧 집중하며 즐기기엔 조금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여겨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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