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책의 시효
글_오세곤(연극평론가)
연극계는 블랙리스트와 미투라는 엄청난 일을 겪었다. 아니, 사실은 “겪었다”가 아니라 지금도 “겪고 있다”고 하는 편이 옳다. 왜냐 하면 잘못에 연루된 사람들에 대한 합당한 문책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계속 시간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해자들은 무뎌져버린 사회 분위기를 틈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의 잘못을 묻어버리거나 마치 자신의 잘못이 아닌 양 왜곡시키고 있는데 반해 피해자들은 심지어 언제까지 그 얘기만 할 거냐는 식의 비아냥거림에 오히려 상처가 더욱 깊어지고 있다. 그런 현상은 가까이는 세월호에서부터 여러 복지원과 수많은 양민학살 등 국가폭력 사건에서까지 숱하게 목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과연 문책에는 시효가 있을까? 문책(問責)은 “일의 책임을 캐묻고 꾸짖음”을 뜻한다. 그러나 단순한 꾸짖음에 그치지 않고 일정한 기준에 의한 처벌까지를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시효(時效)는 “어떤 사건이나 상태가 지속됨으로써 권리를 얻거나 잃게 되는 법률적인 기간”을 뜻한다. 즉 공소, 소멸, 보험 등 여러 단어들과 결합해 사용하지만 사실은 법적인 용어이고, 따라서 법으로 규정할 수 없는 사안에 적용할 경우 법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최근 한국연극협회가 한국연극평론가협회에 보낸 “(2020연극의 해)추진위원회 참여 요청 건”이라는 제목의 공문이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되었다. 김미도 현 회장에 대한 추진위원 참여 요청을 거절하면서 한국연극평론가협회는 “한국연극협회의 내부 문제들이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연극협회가 연극계를 대표하여 ‘연극의 해’를 추진하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이유를 밝혔다.
여기서 “한국연극협회의 내부 문제”가 무엇인지는 세세히 밝히지 않았으므로 그 범위가 정확히 어디까지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블랙리스트와 미투 등 위계폭력 연루자들에 대한 처리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사실 한국연극협회 현 집행부가 출범한 것이 봄이었고 지금은 연말이므로 정서적으로는 벌써 거의 1년이 지난 것으로 느껴지지만 실제 과거 여러 불미스러운 일들에 대한 명쾌한 처리 소식은 들리지 않으니 위의 지적은 충분히 타당해 보인다.
물론 위에서 언급했듯 문책에 따른 조치는 잘못할 경우 법적으로 문제 제기가 있을 수 있으므로 신중을 기해야 하고 그러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해명도 가능하긴 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시간 경과에 따른 사회적 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계속 환기시키는 성의가 필요하다. 즉 현재 필요한 조치를 위해 어느 정도까지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수시로 밝히는 것이 옳다. 이에 대해 아픈 기억을 자꾸 건드려 피해자들을 더욱 괴롭게 하지 않을까 하는 따위의 우려는 적절치 않다. 만약 그냥 쉬쉬하며 시간이 지나간다면 상처는 제대로 아물지 못 하고 깊은 흉터를 남기거나 오히려 덧나서 불치의 암세포로 전이되고 말 수도 있다.
그런데 한국연극협회 공문에 포함된 “연극의 해 추진위원” 명단을 보면 과연 한국연극협회가 분명한 문책 의지를 지니고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 거의 당연직으로 여겨지는 각 단위협회장들이 포함된 건 논외로 하고, 대표적인 블랙리스트 피해 연극인이 포함돼 있는가 하면, 반대로 적극적이건 단순 부역이건 블랙리스트 실행자로 의심받아 그러한 내용이 블랙리스트 조사보고서에 명시돼 있는 인사까지 포함돼 있다. 또 전 정권 당시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각종 혜택을 독점하여 소위 화이트리스트가 아니었는지 의심받는 인사도 끼어 있고, 정부 산하 기관장으로서 국회 회의록에까지 여러 부적절한 행위가 낱낱이 기록돼 있는 연극인도 있다.
물론 조사보고서나 국회 회의록만으로 100%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본인들은 사실 관계가 다르다며 억울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통 연극인들은 생각하기 어려운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거나 있는 인사들에 대해서는 당연히 대단히 엄격한 기준을 적용할 수밖에 없다. 즉 일단 의혹이 불거진 한 그것이 완전히 아닌 것으로 판명나기 전에는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것은 공무원이나 교원들에게 적용되는 원칙과 비교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다. 사실 예술가들에게 적용할 도덕 기준이 공무원이나 교육자보다 낮아도 될 만한 이유는 없다. 예술은 공산품과 달리 창작의 과정까지도 공정해야 비로소 그 가지를 인정받을 수 있다 할 때 그 과정을 주도하는 예술가들의 도덕성은 예술의 가치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블랙리스트와 미투 포함 예술가의 도덕성을 따지고 판단할 기구가 필요하다. 일정한 기준을 마련하여 의혹의 대상을 공지하고 사실 확인을 하고 합당한 조치를 취하는 권한의 공식 기구가 필요하다. 종교계에도 있고 교육계에도 있는데 예술계라고 그런 제도를 두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왜냐하면 이런 일을 개인 차원으로 할 경우 자칫 명예훼손이라는 대단히 까다로운 법적 기준에 걸려 오히려 본질이 훼손되거나 왜곡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의 건강은 정의(正義)의 실현(實現)을 토대로 한다. 잘못한 사람은 처벌과 비난을 받고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사람은 배상과 위로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정의는 이렇듯 간단하다. 그러나 그 실현은 대단히 어렵다.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세월에 걸쳐 쌓아도 몇몇이 순식간에 부숴버릴 수도 있는 것이 정의이다. 그러나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끈기를 갖고 쌓아가되 결코 누구도 흔들 수 없도록 항상 감시하고 지켜야 한다. 그것만이 스스로의 건강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임을 명심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모두가 힘을 합쳐 영원히 건강한 연극 동네를 만들게 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