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선택을 존중받고 신체의 안위를 보장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연극 <344명의 썅년들>

 

글_장윤정(연극평론가)

·연출   강윤지
제작   극단 Y
장소   예술공간 혜화
일시   2019년 11월 1일 ~ 10일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를 헌법불합치라고 판결 내렸다. 이어서 2020년 12월 31일까지 국회에서 기존 낙태죄를 대체할 새로운 조항을 설립해야 한다고 선고했다. 즉, 임신중단에 대한 제도적인 문제는 사실상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다. 한 가지 긍정적인 지점은 여성들이 임신중단에 적합한 제도를 만들기 위해 직접 거리로 나서서 목소리를 높였다는 점이다. 낙태죄 폐지를 위해 여러 여성인권단체들이 등장했고 온라인상에서도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 합법화 및 도입 청원에 23만5372명이 참여했다. 임신중단은 그만큼 수많은 여성에게 피부에 와닿는 현실적인 문제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늘 그 현실과 거리가 먼 이들이 제도를 정립해왔다는 점이다.

 

 

행동하지 않는 이에게 권리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프랑스의 역사를 통해 그 지점을 확인한 바 있다. 익히 잘 알려진 시민혁명 외에도, 임신중단권 법률 제정을 위한 일련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이른바 ‘343 선언’이 그러하다. 1971년 4월 5일, 343명의 여성들이 임신중단했음을 서명한 선언문이 『누벨 옵세르바퇴르』잡지 표지에 발표되었다. 그 속에는 지식인, 변호사, 예술가, 사회운동가 등이 있었고 이들은 흔히 경제적·학문적으로 사회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이 임신중단을 할 것이라는 낡은 인식을 뒤흔들어놓았다. 그리고 이내 이 선언은 ‘343인의 창녀들’이라는 비속어로 비하 및 풍자를 받았다. 그 후 미성년자 마리끌레르는 또래 남학생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하여 그로 인해 임신하게 되었으며, 엄마 미셀 쉬발리에는 딸을 위해 직장동료들과 연대하여 마리 끌레르가 임신중지 시술을 받도록 한다. 이 과정은 위법으로 이해되어 1972년, 이들은 보비니에서 재판을 받는다. 당시 여성활동가이자 변호사인 지젤 알리미는 이들을 변호하며 자신 또한 343명 중 한 명임을 밝혔다. 이들의 재판은 이후 임신중단합법화에 관한 사회적 논쟁을 확대시켰고 나아가 2014년에는 결국 임신을 지속하고 싶지 않은 모든 여성은 임신중단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법이 제정되었고, 2016년에는 산파에게도 약물로 임신중단을 실시할 수 있는 권한이 생겼으며, 2017년 임신중단 방해죄 적용이 반임신중단 온라인 사이트로까지 확대되었다.*

 

 

<344명의 썅년들>은 이 프랑스의 역사를 연극화한 작품이다. 343이 아닌, 344인 것은 ‘지금의 내’가 포함된 숫자인 것으로 이해된다. 작품의 서사는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얼개를 구성하고 있었다. 1943년, 세탁소를 운영하며 여성들의 임신중단을 도왔던 마리루이스 지로를 교수형에 처했던 실제 사건과 343인의 선언, 보비니 재판의 역사를 짜임새 있게 엮어냈다. 산부인과 의사인 마리 끌레르의 일대기에 가까운데, 작품의 출발은 마리 끌레르가 마리루이스 지로에게서 길러지게 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마리루이스 지로는 돈을 위해 임신중단을 돕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여성을 위한 일로 읽힌다. 교수형에 처해지기 전 그녀가 자신의 지난 행위에 후회가 없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마리 끌레르는 마리루이스 지로의 죽음을 목격하며 자신은 결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그 후 의사로서 성인이 된 마리 끌레르는 지속하여 임신중단 시술을 거부하나, 자신과 같은 이름을 지닌 소녀 마리 끌레르를 만나면서 여성에게도 자신의 안정된 삶을 지속해나며 보장받을 권리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마리 끌레르가 임신중단을 할 수 있도록 시술을 하며, 그 결과 과거 마리루이스 지로와 같은 형태의 모습으로 수감된다. 마리루이스 지로가 마리 끌레르를 한 번만 안아보길 원했던 것처럼, 의사 마리 끄렐르가 소녀 마리 끌레르를 다시 보길 원하는 모습은 이들의 삶의 형태가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반복은 결코 동일한, 고착된 역사가 아니었다. 의사 마리 끌레르의 수감은 마리루이스 지로의 수감보다 진보된 역사의 일면이었다. 마리루이스 지로 이후로 343인의 선언이 등장했고, 여성이 스스로 임신을 지속하거나 중단할 선택권을 보장받아야 함이 거론되었다. 그 끝에서 의사 마리 끌레르는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에 솔직한 상태로 시술을 행했고, 작품 말미에서 의사 마리 끌레르는 처음으로 능동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펼쳤다.

 

 

그러니 분명, 작품의 초반에 등장한 마리루이스 지로와 작품 후반의 의사 마리 끌레르의 모습은 동일하지만 다른 것이다. 의사 마리 끌레르는 늘 의사로서의 가치관, 마리루이스 지로를 통해 경험했던 과거 기억 등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정리하지 못했고, 의지 또한 불분명했다. 그런 그녀가 소녀 마리 끌레르를 향해 자신의 의지를 표명했다는 것은, 기존의 체제에 익숙해져 있던 보편적인 여성의 자기 변화를 상징하는 것처럼 읽힌다.

 

 

<344명의 썅년들>은 프랑스의 역사를 다루다 보니 마치 외국 작품인 것처럼 느껴지는 면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엄연히 강윤지 작·연출이 직접 창작한 창작극이다. 그 지점에서 필자는 매우 흥미를 느꼈다. 국내의 관객을 대상으로, 국내 사회의 현실을 꼬집기 위해 프랑스 역사를 창작극으로 만들어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 현실이 프랑스의 1970년대 중후반의 현실쯤으로 파악되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 타국에서의 지난한 싸움의 과정, 그 끝에 이루어낸 결과를 미루어 현재 우리에게 놓인, 그리고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역사를 짐작하며 현재 우리가 고민하고 사유해야 할 지점은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지점에서 이 작품은 매우 유의미하다. 서사의 꿰임 또한 매우 자연스럽고 대사 또한 설득력 있는 언어들이었기에 연극으로서도 미덕이 큰 작품이었다.

 

 

연출 또한, 소극장 내에서 고정된 장치들을 두고서 조명으로 서로 다르게 인식하도록 만듦으로써 다양한 공간을 형성해내고, 그것으로 관객에게 연극성을 감각하게 하는 효과도 컸다. 그에 못지않게 배우들의 열연은 이 서사가 타국의 서사라는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고, 임신중단이란 화두는 나라를 막론하고 모든 여성에게 공유되는 문제적 현실임을 인식하게 하였다. 결국 <344명의 썅년들>은 여러 지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임이 분명했다. 다만, 지금까지도 여성의 임신중단 권리를 위협하는 목소리들이 지나치게 극단적인 만큼, 작품 내에서도 반대 진영의 입장을 좀 더 첨예하게 보여주었더라면, 이성을 외피로 한 불합리한 발언을 하는 문제들의 민낯을 더 꼬집어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혹시 왜 지금 임신중단의 이야기인가라고 묻고 싶다면 그럼 언제 해야 하는 것인가라고 되묻고 싶다. 이 작품이 매우 소중한 이유는, 무엇보다 그동안 연극계에서 잘 거론되지 않았던 화두를 직접 발언하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며, 나아가 실제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문제적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적으로 수면 아래에 침잠하고 있는 형태의 문제기 때문이다. 관객은 이 작품을 통해 임신중단의 권리에 대해 다시금 사유하게 된다. 무조건적인 옹호가 아니라 임신을 지속하거나 중단하는 것의 주체는 여성이며, 그 결과를 오롯이 감당할 신체 또한 여성의 신체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멀리서 근엄한 표정을 짓고 바라보는 법과 제도는 결코 복잡다단한 현실 속 문제, 법이 놓치는 그 틈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지점을 연극은 펼쳐내고 있다. 몇 줄의 판결문, 온라인상에서 이루어지는 가상의 논리 싸움보다 눈 앞에 펼쳐지는 연극과 그 연극 속에서 묘사되는 실제 현실을 통해 관객은 임신중단의 문제를 더욱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체감하게 된다. 그러니 <344명의 썅년들>이 소중한 것은 마땅한 일 아니겠는가.

 

 

196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가족계획 정책’이라는 미명하에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운동이 펼쳐졌다. 운동이라 하지만, 엄연히 일방적인 정부 정책의 표어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는 ‘하나보단 둘, 둘보단 셋’이라는 표어가 등장한다. 이러한 앞뒤 다른 기준은 왜 속속들이 등장해온 것일까. 출산의 기준을 ‘경제부흥의 척도’로 인식하기 때문이며, 그 기저에는 출산에 정부가 관여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무엄한 태도가 존재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즉, 출산은 여성의 신체로 하지만, 정작 한 번도 여성이 임신과 출산의 주체로 인식되었던 역사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344명의 썅년들>은 말한다. 나는 여성이며, 여성이기 이전에 사람으로서 나의 신체를 존중하고 안위를 보장받을 권리가 있음을.

사진제공_ⓒ보통사진관 박태양

 

*『344명의 썅년들』 브로셔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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