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피의 결혼’ Bodas de Sangre
글_임야비(서울 신포니에타 기획 및 연출)
자 갑시다! 사방으로 나눠서, 피의 시간이 다시 왔어요.
– 로르카: 피의 결혼 2막 2장 중 (황동근 역)
오페라 피의 결혼(Bluthochzeit) 2막의 시적 비극
볼프강 포르트너(Wolfgang Fortner) 작곡, 엔리크 베크(Enrique Beck) 독어 번역
독일의 현대 작곡가 볼프강 포르트너(Wolfgang Fortner; 1907~1987)가 스페인의 극작가 로르카의 걸작 ‘피의 결혼’을 음악화한 작품을 소개한다. 전체 분위기는 모두의 예상대로 굉장히 어둡고 불길하다. 음악은 2시간 내내 어렵고 듣기 불편하다.
거두절미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3번만 반복해서 들어보기 바란다.
로르카가 창조해낸 원초적이고 뭉뚱그려진 욕망의 덩어리가 포르트너의 정교한 해부를 거쳐 세련된 음악적 파편으로 재탄생 되는 과정을 온몸으로 느낄 것이다.
아무래도 원작의 스페인어를 독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시적인 요소가 파괴되었을 것이다. 그 파괴된 운율을 현대음악 기법(12음 기법, 음렬주의)으로 치환한다. 이것이 포르트너가 이 연극을 해부하여 오페라로 재탄생 시킨 전략이다.
음악 자체가 너무 전위적이고 대사가 독어이기 때문에, 실제 극을 연출하시는 분들께 이 음악을 연극에 적극적으로 사용하시라는 권유는 못 드리겠다. 하지만 장(Szene) 사이의 간주곡(Zwischenspiel)들과 무대 밑으로 손바닥을 집어넣어 연극을 통째로 뒤집어 버리는 통렬한 사운드는 피의 결혼의 전위적인 연출에 제격일 것이다.
구성과 음악을 들여다보자
로르카의 희곡은 3막 7장 (1막 3장, 2막 2장, 3막 2장 총 7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포르트너의 오페라는 2막 7장 (1막 1~4장, 2막 5~7장 총 7장)으로 구성된다. 희곡의 2막의 1장과 2장 사이 즉, 결혼식을 위해 마차를 타고 교회로 떠나는 장면에서 오페라의 1막과 2막이 갈린다. 오페라 2막에서 피로연, 신부의 도망 – 추격 – 죽음이라는 극적 흐름을 폭발시키기 위한 의도다. 하지만 이 구분만 다를 뿐, 각 장의 내용은 원작과 오페라가 동일하다. 원작과 오페라의 진행을 표로 비교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포르트너의 오페라에서는 각 장의 앞뒤로 오케스트라 연주곡을 삽입해 놓았다. 각 막의 시작과 함께 연주되는 2곡의 기악곡은 서곡과 전주곡 역할을 하고, 1-2, 2-3, 3-4, 5-6장의 사이에는 3분 내외의 간주곡(Zwischenspiel)이 삽입되어 있다. 6-7장 사이에는 간주곡이 없는데 초현실적인 숲속 ‘추격’ 장면과 비극의 대단원인 ‘죽음’ 사이의 호흡을 끊지 않기 위함이다. 오페라의 구성을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연주시간은 이 곡의 초연자인 지휘자 귄터 반트(Günter Wand)가 귀체르니히-쾰른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녹음한 음반(Profil; 1957년 6월 16일)을 참조하였다.
곡의 이해를 위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몇몇 특징을 추려보자.
서곡에 해당하는 Allegro는 독약을 파는 요란한 약장수다. 들어 본 적 없는 소음이 불길한 드라마의 시작을 알린다.
1장에서는 어머니(메조 소프라노)를 귀 기울여 들어보자. 어머니는 사실상 스페인 시골의 ‘자연’이자, 이 극을 관통하는 ‘살아있는 도깨비(duende)’이다. 그녀는 예전부터 살아왔고 극 중 현재에서도 살아 있으며, 극이 끝난 후에도 계속 살아갈 것이다. 그녀의 애매한 음성과 긴 담담함에서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의 고독’ 중 6대의 걸친 집안의 어머니 ‘우르술라’가 연상된다.
첫 번째 간주곡은 기괴한 자장가 풍으로 그대로 2장으로 연결된다. 레오나르도의 장모와 아내는 둘 다 여성의 가장 낮은 음역인 알토다. 장모와 아내는 자장가가 아닌 장송곡을 부른다고 봐도 무방하다. 검은 자장가는 당장이라도 아이가 잠이 아닌 죽음에 빠질 것 같은 느낌이다.
두 번째 간주곡에서 황무지를 표현하는 선율의 흔적이 얼핏 들리지만, 바로 무조(無調)로 해체된다. 3장에서 상견례는 무난히 진행되지만 신부의 흔들림이 감지된다.
세 번째 간주곡은 명색이 결혼식 아침인데 밝음이라고는 아예 없다. 콘트라베이스와 타악기가 무덤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후반부에는 춤곡풍의 멜로디가 뼈대만 남은 불협으로 연주된다.
4장에서 박자 없는 캐스터네츠는 결혼식에서 고립되어 있다. 거의 유일하게 스페인 민속 음악의 느낌이 비치는 부분이지만 스케치일 뿐이다. 레오나르도의 등장으로 불길한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고, 신부와 레오나르도의 이중창은 전혀 화음을 이루지 못한다. 축하객들의 합창은 더 가관이다. 솔직히 합창단이 악보 없이 아무렇게나 불러도 비슷한 결과를 낼 것 같다.
(3막 1장의 숲속의 밤 장면. 세 나무꾼과 달 – 연출: Christian von Götz)
2막의 전주곡 역할을 하는 Molto Allegro는 30초의 짧은 기악곡으로 어지러운 음향을 뿜어내는데 급하게 멀리 사라지는 인상을 준다.
신부가 레오나르도와 도망간 사실을 알게 되는 5장의 후반부에서 음악은 음량적 절정에 이른다.
네 번째 전주곡은 금관악기가 자동차 경적을 흉내면서 추격 장면을 묘사한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음악으로 단독으로 연주해도 될 만큼 긴장감이 뛰어나다.
6장의 숲속의 밤, 세 명의 나무꾼의 장면은 로르카가 희곡에 지시한 대로 2대의 바이올린이 음산한 숲을 묘사한다. 달(테너)이 등장하면서 부르는 노래는 이 오페라 전체에서 가장 노래다운 노래다. 죽음을 상징하는 거지 여인은 늙은 마녀의 목소리 그 자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신랑은 절대로 노래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역할들은 모두 전문 성악가지만 신랑은 캐스팅 자체가 가수가 아닌 Speaker(연극배우)다. 신랑은 신부가 야반도주하는 순간에도, 추격하는 과정에서도 기복 없는 대사만을 한다. 그는 절대로 격앙된 노래를 하지 않는다. 극에서 그는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가장 정상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신랑은 말을 하고, 도망친 신부와 레오나르도는 노래를 한다. 6장의 마지막은 말하는 남자의 비명과 노래하는 남자의 비명이다.
6장과 7장 사이에는 지정된 간주곡이 없지만 7장의 앞부분에 약 1분간 큰 북이 레퀴엠풍으로 연주하는 무거운 발걸음 소리를 간주곡으로 볼 수도 있다. 7장은 6장과 함께 23분 가량으로 가장 긴 부분이지만 절대로 긴 호흡으로 이어져 있지 않다. 대단원은 매우 잘게 분절되어 있다. 신부의 광기 어린 변명과 어머니의 슬픔은 이어질 틈이 없다. 신부의 마지막 대사 ‘그 칼 손에도 잘 잡히지 않는 조그만 칼이, 강도 없고 비늘도 없는 물고기 같은 그 칼이 운명의 날, 두 시와 세 시 사이에 두 남자의 입술을 어둡게 변해서 죽게 했어요.‘와 어머니의 마지막 대사 ‘칼이 손에도 잘 잡히지 않는 조그만 칼이, 냉혹하게 육신을 파고 들어가 비명과 떨림이 터져 나오는 어두운 곳에서 멈췄답니다.’는 비슷한 내용이지만, 음악상 완전히 다르게 들린다. 작곡가의 의도일 것이다. 현대음악이 그러하듯이 음악은 아무런 예고 없이 멈춰버리며 극이 끝난다.
(3막 2장 어머니의 마지막 노래 – 연출: Christian von Götz)
포르트너의 오페라 ‘피의 결혼’은 필자가 TTIS에서 수년에 걸쳐 ‘음악으로 듣는 연극’을 연재를 하면서 소개한 음악 중에 가장 어렵고 거북한 음악인 듯하다.
하지만 한트케의 ‘관객 모독’이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를 관람했을 때를 기억하는가? 잭슨 폴록이나 바넷 뉴먼 그리고 로스코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내 귓구멍에 쏙 들어가는 지름의 음향만이 음악이 아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지름의 음향이 무수히 존재한다. 이제 우리는 그 음향 중 일부를 음악으로 칭하는 데 익숙해져야만 한다. 현대음악의 낯섦과 거북함은 한트케와 베케트, 폴록과 로스코를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포르트너의 작품은 ‘희곡-대사-등장인물’과 ‘공연-음악-관객’의 경계에 흩어져있다. 포르트너는 ‘희곡-대사-등장인물’의 영역에 간섭하여 대사의 운율과 등장인물의 내면을 드러낸다. ‘공연-음악-관객’에는 정면으로 침투하여 거북한 충돌을 가한다. 충돌의 충격은 정신이 든 직후부터 서서히 밀려올 것이다. 그때 충돌로 깨진 반짝거리는 파편도 덤으로 보게 될 것이다.
인내심을 가지고 3번만 들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