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水平)을 위한 ‘나’와 ‘당신’의 무게
연극 <아트>
글_박이도
작 야스미나 레자(Yasmina Reza)
번역 홍서희
연출 성종완
제작 더블케이필름앤시어터
장소 백암아트홀
일시 2020년 3월 7일 ~ 5일 31일
“개인”의 합, 인간관계
복작복작 뒤엉켜 사회를 이루고 살아온 역사가 오래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타인과의 관계가 어렵다. 오늘날에도 매주 인간관계에 대한 도서목록이 베스트셀러인 것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지 새삼 깨닫는다. 우리는 존재 이후, 타인과 원만한 관계를 원하는 욕망과 나를 더 이해받고 싶은 욕망 간의 간극을 겪어왔다. 그로부터 발생하는 갈등을 줄이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관계’의 본질이란 나의 생각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공감의 장이 형성되는 과정 그 자체다. 따라서 긍정적인 의미의 관계를 위해서는 서로의 생각을 이해해보려는 상호 이타적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글처럼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생각이 ‘말의 언어’로 치환되어 타인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왜곡으로 인해 늘 불안정한 것이 바로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까지 느껴진다. <아트>의 극작가인 야스미나 레자는 다소 복잡할 수 있는 ‘언어와 관계’의 항을 ‘친구 간의 갈등’이라는 아주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연극이라는 내부세계를 그려낸다.
연극 서사로 해체해본 나와 당신의 ‘사이’
연극 <아트>는 우정이라는 소재 속에 타인을 바라보는 개인의 시선을 발견하고 노출시킨다. 관객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우정 관계에 있는 “개인”을 관찰하게 된다. 연극 서사에서 우정이 해체되는 과정은 ‘예술과 사람에 대한 관점 차이’라는 두 가지 축에 따른 갈등에서 비롯되는데, 야스미나 레자는 균열의 원인을 ‘차이’에 대한 몰이해,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는 비협조적 태도에 있다고 이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살면서 관계를 이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야스미나 레자는 세르주, 마크, 이반이라는 세 명의 ‘개인’을 통해 관객이 보편적인 일상을 관찰하고 메타적으로 성찰할 기회를 갖도록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삶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오,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연극 <아트>는 찰리 채플린의 말을 인용하기에 적절하다. 개개인에게 핀조명이 조준되는 순간 우리는 마치 영화의 클로즈업처럼 인물의 비극적인 개인사에 몰입하고 스스로를 반영한다. 대화 한번 해보지 못한 타인(극 인물)에게 공감하는 놀라운 순간이다. 한편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티끌과 같은 이유들로 서로를 상처 입히는 세 인물은 오만, 질투 등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인간중심적 관점의 날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당신은 감히 그들을 미워할 수 없으리라. 세 인물의 사소한 행동들 모두 ‘나’라는 인간에게 발견되는 다층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레자는 인간의 다면적 속성에 대한 고민을 ‘상징적 소품’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풀어낸다. 세르주는 하얀 캔버스에 하얀 줄이 그어진 앙뜨로와의 현대미술작품, 마크는 풍경화, 이반은 정물화라는 소품을 대표한다. 여기서 앙뜨로와의 작품은 극 중 갈등의 단초가 되는데, 마크는 난해하다는 이유만으로 작품을 선호하는 세르주를 비난하고, 세르주는 그러한 마크를 무시하는 반면, 이반은 의견충돌로 관계가 해체되는 현실을 외면하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다. 앙뜨로와의 작품은 단순히 하얀 캔버스 위, 하얀 물감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세 인물은 우정의 문제, 상대적 관점의 문제, 예술적 가치관의 문제, 인간 가치의 문제까지 확장함으로 다발적 주제들을 병치시킨다. 관객은 이들의 어긋난 관계의 틈에 안착하여 자신의 삶을 고민하게 되고, 무질서하게 병치된 다양한 문제를 스스로 판단하고 새로운 정서적 경험을 얻어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관객은 침묵하는 새하얀 그림과 같이 세 인물의 ‘우정’이라는 프레임에서 결핍된 것은 결국 ‘이해심’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고정된 방, 단 세 명의 등장인물, 한 개의 그림으로 시작한 단순했던 연극무대장치들은 점차 굵직한 하나의 상징으로 변모하며 ‘관계하는 인간’에 대해 서서히 핵심적 고찰을 드러낸다.
“독백”이 연결하는 두 가지 차원
“제 친구 세르주가 그림을 하나 샀습니다.”
연극<아트>는 마크의 독백으로 과감하게 시작한다. 이 연극에서 독백이 갖는 의미가 크다는 뜻이다. 연극 <아트>의 독백은 허공을 향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며, 정확히 관객을 설득하기 위한 창구의 역할을 갖는다. 연극이라는 내부세계의 서사적 흐름을 멈추고 제 4의 벽을 깨뜨려가며 자신의 입장을 토로함으로써, 관찰자로서 관망하던 관객들은 순식간에 상담사 내지는 절친한 친구가 되어버린다. 세 친구는 우정 관계가 해체될수록 관객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자기주장에 대한 당위성을 충족하는데, 이는 일상적 관계에서 느끼는 애정 결핍, 외로움, 소통의 결핍을 관객으로부터 보충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레자가 배우의 입을 통해 작가 자신의 자의식과 관객을 연결함으로써,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을 연극적으로 연출하려는 강한 의도를 내비친다고 보았다. 레자는 인물 간의 관계를 넘어, 작가와 관객의 관계까지 고려하고 있으며 관객으로 하여금 연극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협조한다. 즉 연극언어의 ‘독백’을 통해 극이라는 내부세계와 무대 밖의 외부세계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 실질적으로 인간의 관계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떤 태도인지를 제고하고 있는 것이다. 독백이 누적될수록 연극 속 세 친구의 관계는 오히려 점점 뒤틀리고 분열된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동시에 관객은 세 친구의 독백을 들으며 현실세계에서 우리가 놓쳤을 친구, 연인, 가족의 내밀한 감정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회복의 과정을 겪는다는 것이 매력적이다. 현실세계가 반영된 연극세계가 외부세계로 다시 환원되며 두 차원은 끈끈한 관계를 맺게 되고, 관객은 작품과 암시적인 상호소통의 과정을 거치며 인간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나’라는 주체와 ‘당신’이라는 주체
여러분의 모든 관계들은 안녕하십니까? 100여분의 시간 동안 구어체로 꽉꽉 채워진 연극<아트>는 가르치려 한다거나 의미를 전달하려 하는 것이 아닌, 현실적인 상황 그 자체를 구현함으로써 우리 일상의 안부를 묻고 있다. 레자는 감정이 극에 달해 파국을 맞는 듯 했던 셋의 일상에 조용히 화해의 서사를 제시하며 연극을 마무리한다. 작품 위에 낙서할 것을 허락하는 세르주와 그 마음을 받아들이고 스키 타는 남자를 거침없이 그린 마크는, 갈등의 정점 위에서 빠른 속도로 하산하는 스키 타는 남자와 같이 감정적 균열을 회복하고 있다. 이들이 주고받던 파편적 대화들보다 사실 그 안에 내밀히 깔려 있는 두 번째 언어(subtext)가 인간관계에 숨어있는 본질이며 동시에 연극 <아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 사유임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누군가와의 관계란 것은 튼튼해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끊어지며, 가늘게 늘어진 듯 하면서도 탄력적이다. 당신으로부터 뻗어진 수많은 관계들에 대해 세르주, 마크, 이반처럼 애써 정의 내리려 한다거나 규정지으려 할 필요는 없다. 세르주가 그림보다 친구가 소중하다는 것을 인정한 이후 다 함께 저녁밥을 먹으러 갔다는 이반의 마지막 독백처럼, 우리 삶의 나머지 서사를 만들어 나감에 있어 당신에게 소중한 이들이 있다면 그저 “함께” 수평적으로 걸어가는 것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