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에 반전에 반전,

연극 안에 연극 안에 또 다른 연극

연극 <데스트랩>

 

_조가영

 

 

원작 IRA LEVIN

윤색 이지현

연출 황희원

제작 주식회사 랑

장소 대학로 TOM(티오엠) 1

일시 2020.04.07 ~ 2020.06.21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악마의 씨(1968)>는 서스펜스 소설계의 대가, 아이라 레빈의 오컬트 소설인 <로즈메리의 아기(1967)>를 영화화한 것이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마침 대학로에서 개막한 아이라 레빈의 작품, <데스트랩>을 보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데스트랩>은 극작가 아이라 레빈이 쓴 희곡으로, 하나의 세트와 다섯 명의 인물로만 구성된 2막짜리 연극이다.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오랫동안 공연된 블랙코미디 스릴러’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에드거 앨런포 어워드의 수상작이다. 2020년 4월, <데스트랩>은 제작사 ‘랑’에 의해 각색되어 대학로에서 공연 중에 있다. 뻔한 사랑과 코미디를 흉내 내기 바쁘며 그저 연인들의 데이트코스를 위해 존재하는 연극들이 즐비하는 대학로에서, 단연 눈에 띄는 연극을 위한 연극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1978년 미국 코네티컷 웨스트포트에 위치한 한 저택을 배경으로 140분(인터미션 제외)동안 서사는 지루하지 않게 흘러간다.

 

 

연극이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간결했다.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불러일으킨 비극’이다. 중간중간 ‘미국 문단계 부조리’, ‘70년대 후반 동성애를 향한 차가운 시선’과 같은 전달 요소들이 눈에 띄긴 하지만, <데스트랩>은 연극의 형식과 작품 자체가 갖는 의미로 다뤄질 것이 더 많다고 여겨진다. 이야기는 신작을 쓰는 데 어려움을 겪던 한물간 극작가 시드니 브륄에게, 그의 세미나를 들었던 학생 클리포드 앤더슨의 극본 ‘데스트랩’이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클리포드는 평소 존경하던 시드니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극본을 보냈지만, 너무나 훌륭한 대본에 시드니는 질투를 느껴 클리포드를 죽이고 그 작품을 손에 넣기 위해 클리포드를 자신의 작업실로 초대한다. 시드니의 아내 마이라는 시드니의 살인계획에 불안함을 느끼고, 연극 막이 내릴 때까지 ‘데스트랩’을 차지하기 위한 혈투는 계속된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의 본성과 욕망에 사로잡혀 버린 모습을 투명하게 보여주며, 욕망과 탐욕으로 인해 인간이 파괴되는 과정을 잘 표현해낸다. 이야기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는데, 1막 엔딩부터 2막까지, 반전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관객을 혼란스럽게 휘두른다.

 

 

플롯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것은 결국 ‘시드니 브륄과 클리포드 앤더슨의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살인과 계략, 대사, 반전은 오직 그들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존재했다. 1970년대 후반 미국 게이 극작가들의 사랑을 굉장히 불안정하고 위태롭게 그려낸 것으로 보아, 당시 동성애를 향한 사회의 시선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연극 내용 자체만 놓고 본다면 ‘동성애적 요소’ 내지는 ‘인간의 탐욕스러움’ 외에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하지 않다. 연극 <데스트랩>은 텍스트 외부의 실제 세계보다는 텍스트 내부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지는 ‘반전’으로 극적인 효과는 배가 된다. ‘데스트랩’에서의 반전은 관객들에게 단순한 서스펜스만을 제공하지 않는다. 이 ‘반전’은 연극의 형식을 구축하고 내용의 전개를 이어나갔다. 실제로 진행되는 무대 연극 안에 ‘데스트랩’이라는 연극의 대본이 존재하고, 그 대본을 빼앗기 위한 인물들의 진흙탕 싸움이 곧 대본이 되는, 연극 안의 연극 안의 또 다른 연극인 셈이다. 만약 반전 요소의 반복이 없었다면 이 연극은 젊음과 성공에 집착하는 한물간 극작가가 일으킨 살인 사건으로 여겨지며 재미도 감동도 없는 그저 그런 스릴러 장르에 속했을 것이 뻔하다. 이런 부분에서 <데스트랩>은 ‘포스트모더니즘 스릴러극’, ‘메타 연극’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연극의 실재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연극이며, 연극이 연극을 이야기하는 연극인 것이다. 그렇기에 연극과 비연극, 현실과 재현의 경계를 설정하게 되고 이러한 상황을 관객은 그대로 지켜보며 같이 고민하게 된다. 시드니가 클리포드에게 대본의 생동감을 위해 하나부터 열까지 그대로 재현해보자고 제안한 부분은 이러한 주제 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심령술사’가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심령술이란,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심적 현상을 일으키는 기술을 전문적으로 가진 사람들을 일컫는다. 심령술사의 역할이 이 연극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 연극이 전하고자 하는 바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과연 그것은 실재하는가?’, ‘과연 심령술사는 믿을만한 존재인가?’ 와 같은 의문은 ‘과연 연극은 실재하는가?’, ‘과연 연극은 믿을만한 존재인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심령술사들은 1970년대 후반 급변하는 미국 사회에서 지푸라기라고 잡고 싶은 심정의 사람들이 형성한 허망된 무언가가 아닐까? 극에서의 심령술사는 정신연령이 어리고 어딘가 허술하지만 모든 것을 정확히 예측하는 예리한 인물로 등장한다. 심령술사의 오지랖과 같은 예지력은 연극이 끝날 때까지 그녀가 사기꾼인지 능력자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연극 <데스트랩>을 보고 연상되는 영화가 있다면, 전체적인 미스테리한 분위기나 엔틱한 소재가 라이언 존슨 감독의 영화 <나이브스 아웃> 과 굉장히 비슷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또한 심령술사나 연극, 젊음과 성공에 집착하고 그로 인해 갈등이 발생하는 점에서 존 카사베츠의 <오프닝 나이트>도 연상되었다.

 

 

연극이 마냥 좋았던 것은 아니다. 한국 제작사 ‘랑’에서 새롭게 각색한 <데스트랩>은 스릴러적인 요소를 대사가 아닌 조명, 음향으로 해결하려고 한 경향이 컸다. 원작 브로드웨이 연극과 비교해보면 뚜렷하게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원작에는 음향이 거의 존재하지 않고 조명 또한 장이나 막이 바뀔 때만 꺼진다. 조명과 음향으로 관객을 놀라게 하여 일시적으로 스릴러 요소를 줄 순 있었지만, 여운이 깊게 남지 않았다. 대사에 무게가 조금 더 실렸더라면 조명과 음향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충분히 서늘한 느낌을 구현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각색된 대사가 아쉬웠다. 물론 여성이나 소수자를 대하는 방식이 현시대의 흐름과는 맞지 않는다는 점은 1970년대에 쓰여진 작품의 시대착오적인 면이라고 해도, 각색한 대사는 영미권의 문화를 이해해야만 블랙코미디로 다가와 그것의 가치를 알고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꽤 많아서 죽도 밥도 안되는 대사들로 자칭 블랙코미디가 되기를 바라는 면이 있었다. 원작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려는 의도였겠지만 다소 부진했다. 수준 낮고 가벼운 말장난을 이용해, 또는 무대 위에서의 실수를 웃음으로 승화하여 코믹 요소를 채우려고 했다. 개인적으로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반전의 계속되는 반복으로 현실감이 떨어졌다. 처음 몇 개의 반전(두 차례의 반전)에서 생각지도 못한 서스펜스를 느꼈다면, 반전이 반복되면서 2막 끝부분엔 상당히 루즈해지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또한 비현실적인 상황을 계속해서 연출하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반전을 짜내려는 의도가 보여 억지스러웠고 부자연스러웠다.

 

 

기대가 컸던 만큼 다소 아쉬운 점은 많았지만, 대학로 연극에서의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진지한 태도로 ‘극’의 본질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고, 딜레마와 심오한 것을 좋아하는 필자의 취향을 저격한 연극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 모든 사건이 종결되고 ‘시드니와 클리포드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가미된 하나의 완벽한 스릴러 이야기’를 서로 갖겠다고 달려드는 심령술사 헬가 텐 도프와 시드니의 변호사 포터 밀 그림을 통해 연극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명료하게 알 수 있다. 결국 <데스트랩>은 연극의 존재에 대해 열렬하게 피력함으로써 그것의 서사가 갖는 힘과 희소가치성을 느끼게 해주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이다. 하나의 이야기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며, 이야기는 곧 자본과 이어지고, 이야기가 대본이 되면 그 대본이 끼치는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무엇을 기반으로 창작되는지 등 의미 있는 고민으로 연극은 관객을 이끌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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