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人)이 연주하는 파우스트 (4)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Faust)’

– 임야비(tristan-1@daum.net)

자유기고가, 서울 신포니에타 기획 및 연출

극단 듀공아 / 극단 동맹 연출부 드라마투르기

리스트가 베토벤에게 슬쩍 숟가락을 얹은 음악 ‘벼룩의 노래’를 소개한다.

베토벤은 적지 않은 수의 가곡을 남겼는데, 이 중 ‘그대를 사랑해 Ich liebe dich (WoO 123)’, ‘아델라이데 Adelaide op. 46’, 연가곡집 ‘멀리 있는 여인에게 An die ferne Geliebte op.98’가 가장 널리 애청되는 곡이다. 괴테의 텍스트에 음악을 입혀 만든 가곡 중에 ‘8개의 가곡 op. 52’, ‘6개의 가곡 op.75’, ‘괴테에 의한 3개의 가곡 op.83’이 주목할 만하다.

이 중 파우스트와 연관이 있는 것은 ‘6개의 가곡 op.75’의 제3번 g단조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로 보통 ‘벼룩의 노래’로 알려진 곡이다. 이는 파우스트 1부 ‘라이프치히 아우어바흐 지하 술집’ 장면에서 메피스토펠레스가 술꾼들에게 불러 주는 노래다.

라이프치히의 아우어바흐 지하 술집

메피스토펠레스: 옛날 옛적에 어느 임금님 / 커다란 벼룩 한 마리 길렀다네

프로슈: 들어봐! 벼룩이래! 잘 알아들었냐? 거참 깨끗한 손님이구먼.

메피스토펠레스: (노래한다)

옛날 옛적에 어느 임금님 / 커다란 벼룩 한 마리 길렀다네.

마치 자기의 친아들처럼 / 여간 사랑하지 않았더라네.

임금님 명하시어 재단사를 부르니 / 전속 재단사 즉시 대령하였네.

자, 도련님의 옷을 재단하여라. 바지의 치수도 잘 재어라!

브란더: 잊지 말고 재단사에게 일러두어라 / 한치도 틀림없이 재단을 하라.

모가지가 붙어 있길 바라거든 / 바지에 구김살이 없도록 하라!

메피스토펠레스: 비로드에 비단으로 지은 옷 / 도련님 멋지게 차려입었네.

갖가지 리본으로 장식을 하고 / 가슴 위에는 멋진 십자가

당장 재상으로 임명되었고 큼직한 훈장까지 받았더란다.

자연 벼룩의 형제자매들 / 궁중의 높은 벼슬 차지했겠다.

지독히 고통을 겪은 건 / 궁중의 귀족과 귀부인님들.

왕비님과 시녀들까지도 / 온통 따끔따끔 물어뜯겼네.

그렇다고 으깨어 죽이지도 못하고 / 가렵다고 긁지도 못했다네.

우리야 벼룩이 물기만 하면 / 당장 으깨어 요절을 내련만.

합창: (환호하면서) 우리야 벼룩이 물기만 하면 / 당장 으깨어 요절을 내련만.

프로슈: 브라보! 브라보! 정말 멋졌어!

지벨: 벼룩이란 놈들은 모두 그렇게 처치해야 돼.

브란더: 손가락을 겨냥해서 재치 있게 잡아야지!

알트마이어: 자유 만세! 술 만세!

(파우스트 I, 민음사, 정서웅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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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룩의 간을 빼먹어라’라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는데, 독일의 벼룩은 간땡이가 무척이나 큰 것 같다. 아무튼 메피스토펠레스의 노래를 요약하면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으로 문전성시’와 일맥상통한다. 이 꼴은 현재의 사회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술자리에서 사장 옆에 앉은 접대부가 부장을 나무라는 꼴불견, 군대에서 대대장 커피 타주는 당번병이 중대장을 하대하는 몰상식이 그 예이다.

줄곧 파우스트 박사에 이입되던 작가 괴테는 이 장면만큼은 메피스토펠레스에 빙의한다. 괴테가 바이마르 궁정에서 공직을 하고 있었을 때 겪었던 아첨꾼들을 메피스토펠레스의 입을 빌려 신랄하게 비꼬는 것이다. 아우어바흐 지하 술집의 술꾼들은 ‘그깟 벼룩, 우리는 바로 죽일 수 있는데’라고 환호하며 통쾌하게 술을 들이마신다.

괴테와 베토벤

1809년, 베토벤이 가곡으로 이 해학에 동참한다. (베토벤의 가곡은 향후 ‘2인이 연주하는 파우스트’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베토벤의 음악은 괴테의 펜을 관통해 메피스토펠레스의 입으로 흘러나온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1849년, 이 밥상에 밉상 리스트가 숟가락을 얹는다. 슬쩍 대문호 괴테와 악성 베토벤의 정찬에 묻어가려는 고도의 전술이다.


베토벤의 석고상 앞에서 피아노를 치는 리스트

리스트는 베토벤의 ‘가곡’을 ‘피아노 독주곡’으로 재조립한다. 베토벤의 원곡은 가곡으로,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피아노 연주자가 반주를 넣는 형식이다. 그런데 리스트는 가수와 가사를 없애 버리고, 반주와 주선율을 피아노 혼자 연주하도록 편곡한 것이다.

괴테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 빙의했고 베토벤은 대문호 괴테에 빙의했으니, 리스트는 악성 베토벤에 빙의해서 이 위대한 고리에 자신을 연결한 것이다.

가곡을 피아노 독주로 편곡한다는 것은 텍스트가 주가 되는 성악과 음악이 주가 되는 반주를 연주자 혼자 다 하겠다는 이야기다. 즉, 리스트는 한 손으론 괴테의 텍스트를, 다른 손으론 베토벤의 음악을 자신의 피아노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는 이 편곡을 통해 평생의 우상인 두 거인(괴테, 베토벤)을 자신의 열 손가락에 움켜잡은 셈이다. 역사에 위대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싶어 안달이 났던 리스트만이 할 수 있는 발상이다.


Karl Czerny(1791-1857; 오스트리아)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피아노 앞에서 좌절을 맛보게 해준 그 체르니가 맞다.

리스트는 자신이 베토벤의 적자라는 사실을 주변에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녔다. 그 이유는 자신이 체르니의 제자라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체르니는 베토벤의 여러 제자 중 한 명이었고, 리스트는 체르니의 수많은 제자 중 한 명이었다. 이렇게 적통성이 희석될 수 있는 족보 위에서, 리스트가 베토벤 음악의 편곡을 소홀히 할 리 없었다.

본격적인 음악 설명에 앞서 ‘곤충 벼룩’과 ‘해충 벼룩’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대해 잠깐 짚고 넘어가 보자.

‘곤충 벼룩’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외형적 특징은 ‘작다, ‘가볍다’일 것이다. 그리고 이 작고 가벼운 벼룩의 움직임에서 우리는 ‘빠름’, ‘예측불허’, ‘튀어 오름’이 자동으로 연상된다.

‘해충 벼룩’하면 반사적으로 ‘질병’, ‘더러움’, ‘미천함’이 떠오른다.


악보 1) 음악의 개시부

리스트는 작고, 가벼운 벼룩의 빠르고, 예측불허한, 튀어 오름을 작곡 기법으로 녹여냈다. 이 악보를 작곡가의 의도대로 연주하면 기괴한 사운드가 창출되는데, 이는 병적이고, 더럽고, 미천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연결된다.

하나하나 살펴보자.

벼룩의 ‘작음’은 p (피아노; 여리게, 작게)다. 벼룩의 ‘가벼움’은 고음(高音)으로의 도약이다. 베토벤의 가곡에서는 저음역에 남자 가수의 강하고 묵직한 목소리가 있지만, 리스트의 피아노 독주 편곡에서는 저음역 대신 고음역을 부각시켜 ‘작고 가벼운 벼룩’의 음색을 만들어냈다.

이어서 리스트는 벼룩의 ‘빠름’을 poco allegretto(약간 조금 빠르게)로, ‘예측불허’와 ‘튀어 오름’을 극단적인 템포 변화와 staccato(스타카토; 짧게 끊어서 튕기듯이 – 음표 머리에 붙어 있는 점 표시)로 표현했다.

위와 같은 작곡법으로 리스트는 소리로 이루어진 ‘곤충 벼룩’을 만들어낸다. 고막 위의 벼룩은 우리의 인식과 결합되면서 ‘해충’의 심상을 불러일으키는데, 바로 이때 벼룩의 해로움이 메피스토펠레스의 악마성과 뒤섞인다. 이런 식으로 리스트는 간사한 메피스토펠레스를 해로운 벼룩 안으로 쑤셔 넣었다.

악보 2) 음악의 종결부

메피스토의 입에서 튀어나온 벼룩은 왕의 비호를 받으며 귀족들을 괴롭히지만 왕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그들은 벼룩을 죽이지 못한다. 하지만 아우어바흐 술집에 모여 이야기를 듣는 백성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벼룩을 죽일 수 있다.

그렇다면 소리로 만들어진 벼룩은 어떻게 죽일 수 있을까? 벼룩을 창조해낸 방법의 정반대로 하면 해충은 소멸한다.

곡의 마지막 부분에서 p (피아노; 여리게, 작게)는 ff (포르티시모; 더 세게, 더 크게)로 ‘고음(高音)으로의 도약’은 ‘저음(低音)으로의 하강’으로 돌변한다. 너무 작고 가벼워서 영점을 잡기 힘들었던 표적인 벼룩이 크고 둔중해진다. 빠르고 극단적으로 변화했던 템포가 진정되면서 조준이 가능해지고, 통통 튀던 staccato가 사라지자 slur(이음줄)로 포획된다. 더 이상 점프할 수 없는 벼룩은 마지막 마디의 쉼표와 마침줄(끝세로줄)로 압살(壓殺)된다.

물론 하지만 리스트가 고음부에 몰아넣은 메피스토펠레스는 압살 직전에 벼룩 속에서 잽싸게 빠져나왔을 것이다. 음악이 편곡된 지 170년이 지났지만, 메피스토펠레스는 여전히 문학 속에 생생히 살아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접대부와 당번병은 여전히 술과 커피를 따르고 있고, 부장과 중대장은 아직도 눈치를 살피고 있다.

압살되어야 할 것이 살아 있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잊혀지고 있는 안타까운 마음에 곧 잊혀질 것 같은 명반을 소개한다. 한국 피아니스트 유영욱이 연주한 리스트의 베토벤 편곡 음반이다. 현재 연세대 음대 교수로 재직 중인 유영욱은 학구적인 베토벤 전문가답게 원곡인 가곡에 대한 이해와 리스트의 기교적인 면을 멋지게 소화해냈다.

글을 마치며 한 번 더 강조하고 싶다. 이 곡에서 리스트는 편곡자일 뿐이다. 욕심쟁이 헝가리인의 천재적인 노력이 있었지만, 이 음악의 원저작권은 베토벤과 괴테에게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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