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人)이 연주하는 파우스트 (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Faust)’

– 임야비(tristan-1@daum.net)

자유기고가, 서울 신포니에타 기획 및 연출

극단 듀공아 / 극단 동맹 연출부 드라마투르기

드디어 1인(人)이 연주하는 파우스트를 끝맺고 2인(人)이 연주하는 파우스트 챕터로 넘어왔다. ‘1인’ 연재가 피아노 독주곡이었다면, 2인 연재는 주로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노래들, 즉 가곡(Lied)이 될 것이다.

본격적인 연재에 앞서 간단하게나마 가곡(Lied)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리트’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노래(song)’라는 넓은 의미의 일반 명사다. 이에 반해, 좁은 의미의 ‘리트’는 18~19세기에 작곡된 독일의 예술가곡(Kunstlied)으로 독일어 시에 음악을 붙인 독창 형식의 성악곡을 의미한다. 보통 독일 문화권에서 일컫는 ‘리트’는 후자 즉, 좁은 의미의 음악 장르를 뜻한다.

‘리트’의 필수 요소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시와 음악이다. 시를 쓰는 시인과 음악을 부치는 작곡가라는 두 명의 창조자가 있어야 한다.

두 번째는 성악가와 피아니스트 즉, 두 명의 연주자가 필요하다. 리트를 연주하고 감상하기 위해서는 최소 두 명의 연주자가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세 번째는 문학과 음악의 ‘예술적 결합’이다. 바로 이 지점에 리트의 존재 의미가 있다. 이 결합이 창출하는 예술적인 가치가 희미하다면, 굳이 이 둘을 합칠 이유가 없다. 글이 음악을 깨뜨리고 음악이 글을 해친다면, 음악은 그냥 음악대로 연주만 하는 것이 낫고 시는 시대로 낭송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 결합의 원리는 위의 독창자와 반주자, 시인과 작곡가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성악가와 피아니스트가 어울리지 못한다면, 굳이 동행할 필요가 없다. 운율이 없는 시에 억지로 음악을 붙일 이유도 없고, 시상을 살리지 못하는 음악에 굳이 문학을 욱여넣을 필요도 없다. 둘이 결합했을 때 득보다 실이 많아야 예술적 의미를 갖는다.

두 명의 창조자와 두 명의 연주자. 그리고 이 둘의 예술적 결합. 리트는 한마디로 ‘어울림의 예술’이다.

시와 음악. 성악(독창)과 기악(피아니스트). 이 둘을 완벽하게 결합한 작곡가가 바로 슈베르트(1797~1828)다. 슈베르트는 가볍고 민속적이었던 ‘노래(lied)’를 예술성과 심미성을 갖춘 ‘예술가곡(Kunstlied)’으로 격상시킨다.

슈베르트는 리트를 예술적 경지로 끌어 올릴 내적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그 첫 번째는 문학적 소양이다. 슈베르트만큼 문학을 사랑한 작곡가는 없을 것이다. 슈베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많은 시를 탐독했다고 한다. 특히 괴테를 좋아했는데, 가곡 역사상 최고의 걸작 ‘마왕(Erlkönig; D.328)’은 슈베르트가 18살 때 괴테의 시에 감명을 받고 순식간에 작곡한 곡이다. 31년이라는 짧은 생 동안, 슈베르트는 총 600여 곡의 가곡을 작곡했는데, 그 중 80여 곡이 괴테의 시와 소설에 음악을 부친 것이다. (이 중 ‘파우스트’와 연관된 곡은 총 5곡이다) 이러한 문학적 소양 덕택에, 슈베르트는 훌륭한 노래가 될 시를 골라낼 수 있는 뛰어난 안목을 가질 수 있었다.

슈베르트 교향곡 제 8번 ‘미완성’의 악보

두 번째는 천재적인 음악성이다. 작곡가를 소개할 때 ‘천재적’이라는 말처럼 진부한 단어가 없지만, 슈베르트에게는 이 단어를 쓸 수밖에 없다. 그가 작곡한 600여 곡의 예술가곡 중에 적어도 250곡 이상이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널리 애창된다. 타율로 따지면 4할이 넘는 강타자이고, 속된 말로 ‘히트곡 제조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중 상당수가 20살 이전에 쓴 곡들이고, 그 곡들이 하나같이 깊은 예술성을 지닌다는 점을 생각하면 ‘천재’라는 단어가 초라해진다. 여기에 하나만 덧붙이자. ‘가곡의 왕’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슈베르트의 모든 업적이 성악에만 몰려 있다고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그의 기악곡에서도 그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미완성 교향곡을 필두로 후기 피아노 소나타, 피아노 연탄곡들, 현악 사중주와 현악 오중주를 들어보면, 슈베르트야말로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진정한 후계자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쉽게, 메이저리그의 4할 타자가 프리미어 리그의 최고 골잡이를 겸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31년이라는 그의 너무나 짧은 생은 모차르트(35세에 사망)와 더불어 서양 음악사상 가장 안타까운 요절이 아닐 수 없다.


가곡 마왕(Erlkönig; D.328)의 악보 (부분):
맨 윗줄이 성악 파트의 악보, 아래 두 줄이 피아노 파트의 악보다.

마지막은 ‘조화와 감각’이다. 슈베르트가 지닌 문학적 소양과 천재적인 음악성은 ‘조화’라는 용광로 속에서 한데 엉긴다. 슈베르트는 기민한 감각으로 시와 음악의 융합 속에서 예술적 결정체를 추출한다. 그것이 바로 ‘예술가곡(Kunstlied)’이고 ‘슈베르트 예술의 정수’다. 말년의 모차르트가 화두를 던지고, 베토벤이 실험했던 ‘예술적 결합’은 두 선배를 존경했던 슈베르트에게 계승되었다. 결국 그는 문학과 음악의 예술적 결합을 최종 완성했고, 이를 예술가곡으로 아름답게 꽃 피웠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 결합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 여러 가지 굵직한 요소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피아노 파트의 강조’였다. 사실 슈베르트 이전의 가곡은 ‘노래가 9할, 반주가 1할’이었다고 생각하면 쉽다. 성악가가 주인공이고 피아노 반주자는 존재가 희미했다. 그런데 슈베르트는 피아노의 역할을 끌어올려 ‘노래 대 반주’의 비율을 6:4 내지는 5:5 수준으로 바꾸어 놓았다. 슈베르트는 단순 반주에 불과했던 피아노 파트를 성악가와 대등한 위치에 놓음으로써 성악과 기악의 조화를 이루어 냈다. 피아노가 독립적으로 움직이자 복합적인 표현이 가능해졌고, 이를 활용해 텍스트에 깊이를 더하고 입체적인 시상을 구현할 수 있었다.

몇 가지 유명한 예를 들어보자. 유명한 ‘마왕(Erlkönig; D.328)’에서 아이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마왕의 대사는 g단조의 무거운 타건과 함께한다. 반면 죽어가는 아이의 대사에서 피아노는 가냘픈 약음으로 꺼져가는 생명을 표현한다. ‘송어(Die Forelle; D.550)’의 피아노 파트는 누가 들어도 경쾌하게 유영하는 송어 역할이며, ‘까마귀(Die Krähe; D.911/15)’에서 까마귀 역을 맡은 피아노는 시적 화자와 까마귀 간의 거리에 따라 그 음악적 표정이 달라진다.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들장미(Heidenroslein; D.257)에서는 소년과 장미의 천진난만한 분위기를 아기자기한 멜로디 위에 얹어 놓았으며, 아베마리아(Ave Maria; D.839)에서는 성스러운 기도에 물결치는 간절함을 덧붙인다. 저녁놀(Im Abendrot D.799)에서는 피아노 페달링으로 화음을 퍼지게 하는 효과를 주어, 덤덤하게 넘어가는 노을의 장관을 음향적으로 묘사한다. 이런 공감각이 시상과 합쳐지면서 청자는 마치 시적 화자 옆에 앉아서 저녁놀을 바라보는 듯한 감동을 경험하게 된다.


물레 앞의 그레트헨 (‘실 잣는 그레트헨’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제 2인(人)이 연주하는 파우스트의 첫 곡 ‘물레 앞의 그레트헨(Gretchen am Spinnrade D. 118)’을 살펴보자. 첫 곡으로 이 곡을 선택한 이유는 이 곡 안에 위에서 언급한 ‘리트의 세 가지 필수 요소’와 ‘슈베르트의 세 가지 내적 요소’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선 괴테의 텍스트를 살펴보자.

파우스트 1부에서 순진한 소녀 그레트헨은 젊은 파우스트에게 첫눈에 반한다. 사랑에 눈을 뜬 그레트헨은 주체할 수 없는 정염에 괴로워하면서 홀로 물레를 돌린다. 아래의 텍스트는 이 장면에서 그레트헨이 파우스트를 갈구하며 읊조리는 운문으로 총 10연 40행이고 1, 4, 8연은 반복된다.

——————–

——————-

괴테는 막 사랑에 눈을 뜬 여인의 애달픈 심정과 솟구치는 정염을 운문으로 길게 뽑아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물레’다. 그레트헨은 왜 하필 물레를 돌리면서 이런 대사를 하는 걸까? 괴테가 물레라는 소품에 부여한 역할을 두 가지다. 하나는 여염집 처녀 그레트헨의 배경을 강화하기 위한 실제적 소품이고, 다른 하나는 앞으로 벌어질 비극적 운명을 암시하는 상징적 소품이다. 서양 문화권에서 물레와 물레에서 뽑아내는 실은 신화적 이미지와 결합하여 ‘운명’을 상징한다. 문화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보통 자매인 ‘운명의 세 여신’(Moirai, Norn)이 실로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클로토(Clotho; 실 잣는 자)는 물레에서 실을 뽑고, 라키시스(Lachesis; 할당하는 자)는 실의 길이를 재어 인간에게 배분하며, 아트로포스(Atropos; 돌이킬 수 없는)는 실을 자른다. 세 여신은 각각 탄생, 수명, 죽음을 의미한다.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되는 운명의 세 여신 (출처: google)

대문호 괴테는 그레트헨의 물레를 ‘인간의 굴레’로 탈바꿈한다. 물레 장면 이후 그레트헨의 운명은 격하게 소용돌이친다. 그녀는 어머니와 오빠를 죽음으로 몰고, 파우스트 사이에서 갓 낳은 아이를 살해한다. 결국 자신도 감옥에 갇혀 최후를 맞는다. 물레는 운명의 세 여신이 상징하는 탄생(파우스트의 아이 출산), 수명 결정(실 잣는 그레트헨), 죽음(아이, 발렌틴, 어머니, 그레트헨 자신)을 예고하는 불길한 상징물이다. 결국 그녀의 노래처럼 파우스트와의 입맞춤(an seinen Küssen)에 모든 것이 소멸(Vergehen)한다. 물레는 멈추고 실은 모조리 끊어진다.

천재 연극쟁이 괴테가 공들여 연출한 ‘실 잣는 크레트헨’ 장면은 후반부의 비극을 암시하는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악보1)

이제 음악을 들어보자.  

4분 남짓한 이 가곡은 6/8박자의 매우 단순한 구조이며, 통상 그레트헨으로 분한 소프라노가 부른다. 슈베르트는 두 개의 주제로 전체 음악을 구성한다. 하나는 구슬프고 불길한 d단조의 멜로디로, 소프라노가 괴테의 텍스트를 매우 긴 호흡으로 부르는 성악 부분이다. (악보1의 파란색 사각형) 다른 하나는 피아노 반주부로, 물레 돌아가는 모습을 표현하는 반 마디의 반복되는 멜로디다. (악보1의 붉은색 원)

가사는 괴테의 시와 완벽하게 동일하나 제 10연 (그리고 입맞추리라, / 언제까지나. / 그이의 입맞춤에 / 내 몸이 녹아버릴지라도! – Und küssen ihn, / So wie ich wollt, / An seinen Küssen / Vergehen sollt!)이 후렴처럼 한 번 더 반복되고, 마지막 두 행은 추가로 한 번 더 반복된다. 음악의 코다(coda; 종결부)는 원문에서도 반복되는 1, 4, 8연의 첫 두 행 (내게서 평화는 사라졌네. / 마음은 그저 무거울 뿐. – Meine Ruh’ ist hin, / Mein Herz ist schwer)을 다시 한번 읊조리며 곡을 끝맺는다.

이제 가장 중요한 예술적 결합이 남았다. 괴테가 희곡으로 창조한 그레트헨의 독백 장면을 슈베르트가 어떻게 음악으로 연출했는지를 본격적으로 분석해 보자.

슈베르트는 소프라노의 호흡이 긴 주제(악보1의 파란색 사각형)를 물레에서 뽑혀 나오는 ‘운명의 실’로, 굴러가는 듯한 피아노의 반복되는 멜로디(악보2의 붉은색 원)를 ‘운명의 수레바퀴’로 치환한다. 또, 어둡고 무거운 라단조의 조성을 이용해 소프라노의 목소리에 동경과 불안을 적셔 놓았고, 피아노의 회전에는 언제 멈출지 모르는 불길함을 심어 놓았다.

(악보2)
(악보3)

그레트헨이 파우스트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조되는 제 6연 (그이의 걸음걸이-모습-미소-눈빛)은 pp (피아니시모; 매우 여리게)로 시작하여 crescendo (크레센도; 점점 세게) 되고 제 7연의 1행 (그이의 말씀)에 이르러 f (포르테; 세게)로 폭발한다.

그리고 절정부라 할 수 있는 7연의 3행 (꼭 잡아주던 손 – Sein Händedruck)에서 accelerando (아첼로란도; 점점 빠르게)로 급격하게 속도를 올린 후 7연의 4행 (아, 달콤한 입맞춤! – Und ach, sein Kuß!)의 절규로 모든 음악이 멈춘다. (악보2의 붉은색 사각형) 연출가 슈베르트는 괴테의 텍스트 사이에 ‘물레를 멈춘다’라는 지시문과 연출을 삽입한 것이다.

이 멋진 연출의 의도를 돌진하던 음란한 상상이 도덕적 벽에 부딪혀 멈춘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보다 심층적으로 생각해보면 슈베르트의 음악적 연출은 다분히 쾌락의 절정이자 죽음을 의미한다. (이 부분에서 프랑스 철학자 바타이유의 저서 ‘에로티즘’과 ‘에로티즘의 역사’가 떠오르는 건 비단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돌아가던 물레를 멈춘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그레트헨이며, 잠시 멈췄다가 다시 천천히 물레를 돌리는 사람도 그레트헨이기 때문이다. (악보3의 녹색 원)

멈추었던 물레가 살짝 돌고, 반 바퀴만 돌고 다시 반 바퀴를 돌고 나서는 원래의 회전력을 되찾고(악보3의 노란색 원) 소프라노는 반복되는(제 8연) 실을 체념하듯 다시 뽑아낸다.

(악보4)

곡의 마지막 부분에서 반복되는 소프라노의 가사 (내게서 평화는 사라졌네. / 마음은 그저 무거울 뿐. – Meine Ruh’ ist hin, / Mein Herz ist schwer)와 피아노의 물레 소리는 점점 작아져(diminuendo) 매우 여린(pp) 상태가 되고 점점 느려지면서(ritardando) 결국 가장 여린 소리(ppp)가 되어 끝나 버린다. (악보4의 붉은색 사각형)

중간에 키스를 상상하며 잠시 멈추었던 물레가 ‘절정의 죽음’이고 다시 돌 수 있는 추력을 남겨 놓았다면, 종결부에서 멈춰버린 물레는 ‘소멸의 죽음’이고 두 번 다시 돌 수 없다.

이상으로 괴테 작, 슈베르트 연출의 ‘물레 앞의 그레트헨’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 작품으로 미루어 볼 때, 슈베르트가 완성한 예술은 스스로 정립한 ‘예술가곡’의 장르를 초월해 ‘작은 총체극’까지 확장한다.

시를 압축의 예술이라고 한다. 하지만 슈베르트는 방대한 희곡에 삽입된 짧은 시를 꺼내어 음악으로 함축해 버렸다. 이 4분 남짓한 곡에 이후 벌어질 그레트헨의 비극이 온전히 들어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와 음악의 결합만으로도 대단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음악은 너무나도 아름답다. 이것이 바로 슈베르트의 예술성이자 천재성이다.

글을 마치며 계속 ‘천재’라는 단어만 반복하는 것 같아 부끄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천재’ 말고는 슈베르트를 표현할 단어가 마뜩잖다. 마지막 덧붙이는 인용으로 필자의 빈궁한 표현력을 변호해 본다.

물레 앞의 그레트헨(Gretchen am Spinnrade D.118)은 슈베르트가 17세 때 작곡한 가곡이다.

– 명곡 해설 라이브러리 ‘슈베르트’ 음악지우사

덧) 2019년에 제작된 음악과 영상이 있는 유튜브 링크를 걸어본다. 그레트헨의 비극에 영상을 끼워 맞추느라 너무 구태의연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세탁기를 소품으로 쓴 연출은 매우 참신했다. 이 세탁기에 오만가지 상상을 다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