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와 부조화가 던지는 질문
– <토일릿 피플>
양근애(연극평론가)
작 : 이여진
연출 : 최용훈
단체 : 극단 작은신화
공연일시 : 2015/02/25~03/13
공연장소 :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관극일시 : 2015/02/25 pm. 8:00
<토일릿 피플>은 크게 두 가지 이야기로 짜여 있다. 하나는 북한을 탈출해와 남한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결(들)의 이야기, 또 하나는 한결의 심리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그 자신을 들여다보는 주영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의 진행 때문에 이 연극은 탈북자 문제를 다룬 것처럼 보이지만, 두 번째 이야기의 돌출 때문에 이 연극은 다시 개인적 윤리와 자의식의 문제로 돌아온다. 그 불편함에 대해 말하려고 이 글을 쓴다. 당겨 말하자면, 그 불편함이야말로 지금-여기, 한국 연극의 윤리적 상태로 보이기 때문이다.
많은 비평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최근 한국 연극은 극장 바깥에 실재하는 삶과 현실의 문제들을 꽤 민감하게 다루고 있다. 연극의 내적 완결성보다는 현실에 파급하는 극의 영향력에 대해 고민하는 흔적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현상은 당연히 관객들의 기대지평과 맞물려 있다. 지금 극장은, 무대는, 현재를 있게 한 삶의 조건들과 구조적 모순에 대해 날카롭게 말하고 싶어 한다. 관객들 역시 텔레비전 화면이나 스크린을 응시하는 것과는 다른, 현실 참여의 한 방식으로 극장을 찾는 것은 아닐까, 느낀다. 이 ‘느낌’은 주관적으로 감지되는 것이지만 개인적인 생각만은 아닌 것 같다. 공연을 보러 갈 때마다 객석에서 확인하는 연대에의 열망, 그 온도가 높아졌음을 자주 느낀다. 그만큼 관객의 시선 역시 날카로워진 것 같다. 연극에서 사건의 당사자들을 만난다는 것, 혹은 그들의 이야기가 재현되는 것을 본다는 것은 이미 만들어진 화면을 보는 것과 질적으로 다른 경험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 말은 부분적으로만 옳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쓸 수는 없어서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건대, 요약하자면 이런 뜻이다. ‘연극의 정치성에 대한 화두가 다시 던져졌다.’
<토일릿 피플>이 이 화두에 대해 응답하는 방식이 위에서 말한 두 가지라고 생각된다. 하나는 탈북자-난민을 다루는 것이다. 그 과정은 매우 흥미롭다. 탈북자들이 미국에서 보낸 삐라를 토대로 ‘변기로 된 보트’를 타고 남한으로 넘어왔다는 상상력, 여기에 얽힌 이야기들이 무대 위에 펼쳐지는 동안 연극은 활기를 띠고 역동적으로 진행된다. 가변적인 무대 활용 덕에 ‘하나이면서 여럿인, 모두이면서 하나인’ 한결(들)의 이동이 ‘호모 사케르(Homo Sacer)’로서의 탈북자들을 다각도로 조명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다. 한결(들)은 무대 구석에서 출발하여 어딘가에 서 있거나 휩쓸려 가거나 난간에 위태롭게 매달리거나 경계를 걷고 있다. 그들은 법에 포함되어 있으나 사실은 법에 의해 배제된 자로서, 이중적 배제의 상황 속에 떠돌고 있다. 이 연극은 그러나 이러한 배제의 상황으로 인해 내몰린 난민들의 삶 대신 탈북자 아이들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내면에 주목하게 한다. 그리고 그 구체성에 가닿는 방법으로서의 ‘설화 짓기’를 통해 연극적 은유를 시도한다. 이여진 작가는 실제 탈북자 아이들의 심리 치료 방식에 대한 성실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난민-집단으로서의 탈북자가 아니라 개별적인 경험들의 총체로서의 인간에 주목하며 그들 스스로의 목소리로 재현되는 구체적인 삶에 가닿으려고 한다. 또한 북한의 실상을 알기 위해 던져지는 무자비한 질문에 대해 비판하고 설화에 대한 반응과 이를 다시 쓰는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진심에 귀를 기울인다. 그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심리상담 센터 소장인 ‘주영’이라는 인물은 서사적 화자의 역할을 겸하며 한결과 한결(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를 매개한다. 말하자면 주영은 종교단체와 탈북자 후원 제도의 모순과 부조리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 극이 진행될수록 주영은 모순과 부조리가 발견되는 대상을 이 사회의 구조가 아니라 자신에게로 옮겨간다. 동시에 설화 짓기의 주체 역시 한결에게서 주영으로 이동한다.
다른 하나의 응답 방식은 주영을 통해 작가-예술가-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제 연극은 남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한결이 아니라 천민 자본주의, 부패 정치, 언론 탄압, 이념적 대립 등으로 얼룩진 ‘헬조선’의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주영에게로 시점을 이동한다. 따라서 설화 속 이야기도 주영의 것으로 바뀐다. 예술가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나간 주영이 여우굴 설화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그것이다. 토일릿을 타고 남한으로 내려온 탈북 난민을 치유하며 그들의 구체성에 닿으려고 하던 주영은 여기서 취한 채로, 자신의 토일릿을 찾아 헤맨다. 여우굴 설화 장면에서 뱃사공이 주영은 “마려운 게 아니라 마려운 게 뭔지 알고 싶은” 사람일 뿐이라고 일깨웠을 때, 관객들 역시 주영의 모순과 그로 인한 사태의 파국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주영은 현실의 부조리 속에서 자신의 모순과 부조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점에서 윤리적 가능성을 지닌 자가 아닐까. 그 역시 제도의 수혜를 받아 진상조사에 가담한 기득권자라는 사실에 면죄부를 주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주영을 ‘나쁘게’ 그려내고자 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영이 윤리적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아파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픔이라는 감정을 이겨내지 못한 채로 연극은 마무리 된다.
이 자의식의 문제가 아니었다면, 아니 이 자의식이 주영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주영이 약한자라는 말이 아니다. 그는 아파하는 자이다. 그것은 나쁜 것과 다르다. 아프지도 않고 나쁜 줄도 모르는 자들이 현실을 얼마나 악화시키고 있는지 잘 알고 있지 않는가. 함부로 짐작하자면, 지금 작가는 아파하는 중이다. 현실의 부조리를 보았고 공감했고 연민했으나 그 이상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무기력했고 자신의 모순을 직시하느라 눈이 붉어졌을 것이다. 세월호 이후 이번 창작산실 검열 사태까지의 모든 상황들이 연극을, 우리를 이 온전하지 않은, 그러나 회피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아픔으로 몰아넣어 속수무책이다. 강해지기 위한 고통과 아픔이라고 믿는다. 연극이 다시 주영에게로 화살을 돌렸을 때, 신자유주의가 몰아넣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결말이 예상되어 불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주영의 자기 연민과 성찰은 아직은 힘이 없다. 그러나 이 연극에서, 혹은 최근 연극에서 자주 발견되는 이와 같은 부조화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완전히 같아져서, 구체성에 빈틈없이 접속해서가 아니라 다른 채로, 아니 다르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니 이제 질문을 바꿀 차례이다. 그것이 가능해진다면 한결들도, 주영들도, 연극적 상상 안에서 더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