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니슬라프스키 – 브레히트
S T A N I S L A W S K I – B R E C H T
이재진(단국대 명예교수)
– 러시아의 배우, 배우연기법의 개척자인 스타니슬라프스키와 독일의 극작가, 서사극을 정립한 브레히트와 비교해 본다. 두 사람은 서로 아주 다른 것 같지만 유사점도 적지 않다. 지난 2월 브레히트 학회 충무포럼에서 발표했던 글을 조금 고치면서 몇 번에 나누어 게재한다. –
1. 배우 스타니슬라프스키 – 극작가 브레히트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Konstantin Stanislawski. 1863-1938)는 배우, 연출가. 극단 경영인, 극단단장 등 여러 역할과 기능을 맡았던 연극개혁자이다. 특히 자신의 연극이론을 활용해서 연기법과 배우양성의 틀을 이론화, 실용화하였다. 자연주의의 숭배자이며 자연주의 연극기법의 개척자이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아버지는 모스코바를 대표하는 경영인으로 굉장한 부호였다. 아들이 태어나자 여름별장에 극장을 만들어 주었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연극과 함께, 연극 속에서 성장했다. 20세에 이 극장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배우로서 관객 앞에 서게 된다. “모스코바 연극학교”에 입학하지만 2 주 후 수업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선생이 가르치는 전통적인 연극수업에 식상했던 것이다. 이곳에서는 오래전부터 이어오는 틀에 맞는 전형화 된 연기법을 답습하는데 그쳤다, 배우는 정해진 고정된 역을 소화해서 흉내 내면 그만이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웅변조의 기교석인 틀에 박힌 연기법에 실망한 스타니슬라프스키는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사실적 표현연기를 생각해 내기로 했다.
19세기 말 유럽에는 새로운 연극물결이 일어나고 있었다. 주로 검열을 피해 ‘닫힌 극장’에서 회원관객 앞에서 입센이나 하우프트만의 작품을 공연하는 극단들이었다. 프랑스의 “자유극장”을 모델로 삼았다. 1887년 안트완느(André Antoine)는 파리에 “Théâtre Libre”을 세웠다. 독일에서는 1889년 Otto Brahm을 중심으로 베를린에 “Freie Bühne”, 영국 런던에는 1891년 “Independent Theatre Society”가 설립되었다. 모스코바에도 1898년 스타니슬라프스키와 Dantschenko의 주도아래 모스코바 ‘예술(가)극장’(MChAT)이 설립되었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공연을 준비하면서 연습기간을 길게 잡아 배우들에게 그런 틀에 얽매인 연기법에서 탈출시키고 배우에게 자기개성에 맞는 연기를 요구했다. 배우들은 배역과 마주할 때 이제 자기 특성을 살리는 연기를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1898년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의 공연은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출모델이 되었다. 배우로서 또는 연출로서 주로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연기론이나 제반 연극개혁에 관한 생각은 오로지 배우의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브레히트는 온통 극작가의 입장에서 출발하였다. 브레히트가 도달한 곳은 변증법적 연극 즉 서사극이었다.
브레히트는 작가였고 스타니슬라프스키는 배우였다. 이는 어느 것 보다도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길을 결정짓는 특성이다 .
20세기의 여명을 바라보며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는 태어났다. 그날은 Emil Zola가 조국 프랑스를 고발하는 기사(J’Acccuse!)로 독일은 온통 시끄러웠다. Augsburg에는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브레히트의 삶이 그리 평탄치는 않으리라는 하늘의 뜻이었는지 모르겠다. 한 세기 전 태어난 Heinrich Heine (1797 -1856) 역시 얼마나 복잡한 삶을 살았던가? 다리 하나는 18세기에 담그고 엉거주춤 구세기에 인연을 맺은 채 새 세기를 맞이한 서정적 정치적 시인은 파리와 뒤셀도르프를 오가며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서 맴돌지 않았던가!
19세기에 슬쩍 한 발을 걸쳐놓고 태어나 20세기를 살아간 브레히트는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기는 보헤미안이었다. 다가오는 새로운 20세기를 눈앞에 두고 모두들 알 수 없는 희망에 들떠 있었다. 묵은 19세기를 청산하려는 의지가 작지 않게 도처에 깔려있었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브레히트는 태어났다. 학교 갈 때 친구들이나 동생이 가방을 들어줄 정도로 브레히트는 체구도 작고 병약했다. Berlau가 고백하듯 눈만은 많은 것을 시사하는 듯 말없이 빤작이곤 했다. 학교성적이 아주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브레히트는 기타를 즐겨 퉁기며 많은 여인들을 곁에 두었고 시가를 즐겨 뿜어 대고 건강이 허락한다면 술도 마다하지 않았다. 브레히트에게 얼마나 많은 여자가 늘 곁에 있었는지 세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셈 공부를 어느 정도는 해두어야 한다. Marie Rose Aman, Paula Banholzer, Marianne Zoff, Elisabeth Hauptmann, Helene Weigel, Ruth Berlau, Margarethe Steffin … 셈이 서툰 사람들을 위해 이곳저곳에서 만났던 여인들이나 미국 망명생활 중 골목을 서성대며 찾던 여인들의 이름은 여기 모두 적지 않겠다. 스타니슬라프스키에게 연인 따위는 없었다. 일생동안 곁에 둔 여인은 하나뿐이었다. Lion Feuchtwanger가 지적하듯 브레히트는 절제된 삶을 살지 않았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70을 훨씬 넘겼지만 브레히트는 60에도 이르지 못했다.
브레히트는 스타니슬라프스키만큼 그렇게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가 종이공장 공장장으로 생활은 넉넉한 편이었다. 브레히트는 별도로 입구가 달려있는 다락방을 썼다. 브레히트는 동네 아이들을 다락방에 불러 모으곤 했다. 피아노나 기타를 제법 다루던 브레히트는 그 방에서 랭보의 시를 읊거나 자신이 지은 시를 기타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친구들은 관객이었고 다락방은 브레히트에게는 훌륭한 극장이었다. 노래와 시와 연극대사가 뒤범벅이 되는 카바레였다.
두 사람은 전통연극의 흐름에서 벗어나 새로운 연극을 개혁해 내려고 노력했다. 두 사람의 연극이론은 그 당시 뿐 아니라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예술매체에서 수용되고 활용되고 응용되고 있다. 스타니슬라프스키와 브레히트의 연극에 대한 이론과 방법사이에는 유사점보다는 상이점이 더 두드러지는 듯 보인다. 두 사람은 같은 세기에 태어났으나 서로 다른 세기를 살았다. 20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스타니슬라프스키는 37세였고 브레히트는 2살이었다. 그러므로 스타니슬라프스키는 19세기의 사람이고 브레히트는 20세기의 사람이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사회적 배경 속에서, 서로 다른 문화권 속에서 성장했다. 두 사람의 연극세계는 그러므로 서로 다른 정치적인 체제 속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은 삶의 방식이 서로 달랐다. 19세기의 스타니슬라프스키는 2미터에 가까운 거구로 다른 사람보다 머리하나는 더 컸다. 자신이 연극의 길을 가는 것이 혹 가문에 흠이 될 가 염려되어 이름 일부를 바꾸기까지 하는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태없는 안경을 코에 얹고 머리 언저리에는 늘 후광이 서려있었다. 술도 전혀 마시지 않았고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는 철저한 금욕주의자였다. 글자그대로 세기말(Fin de siècle)에는 보기 드문 모범적인 신사였다.
배우를 양성하기 위해 두 사람 모두 새로운 연기방법을 도입하였다. 관객과의 유대를 모색하기 위해 새로운 무대를 만들어내었다. 앙상블 중심으로 극단을 운영하는 체제를 확립하였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자연주의 연극을, 브레히트는 반자연주의 연극을 추구했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완벽한 심리적 사실주의 연극과 브레히트의 서사극 사이에는 서로 다른 연극세계가 가로막고 있다고 비평가들은 흔히 생각한다. 또 한편으로는 두 연극세계는 근본적으로는 서로 다른 것은 아니고 어느 정도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고도 말한다.
브레히트는 강의실에서만 공부하지 않았다. 뮌헨 거리의 시끄러운 카바레문화에서 연극을 배우고 생각해냈다. 뮌헨 거리에서 스승이며 친구인 Karl Valentin (1882 -1948)을 만났다. 브레히트를 표절자로 낙인찍으며 일생을 쫓아다니던 베를린의 비평가 Alfred Kerr도 발렌틴에게만은 바이에른의 Nestroy라며 찬사를 보냈다. “발렌틴을 보면 모두들 웃고 즐거워한다.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몸에서 품어 나오는 희극성, 정신에서 우러나오는 풍자성, 어떤 가식도 들어있지 않은 순수한 텅 빈 가슴에서 솟아나온다.”
Artur Kutscher 교수의 세미나에 초대받은 Wedekind의 노래를 교실에서만 들은 것은 아니었다. 강철 같은 체구의 베데킨트가 카페에 앉아 세기말의 타락과 규범을 질타하며 새 세기의 희망을 발라드에 담아 기타에 맞추어 야하게 부르면, 이를 들으며 브레히트는 자신이 지향할 연극의 길을 떠올렸다. ‘카바레 극’에서 브레히트는 연극의 틀을 단순화시켜 서사극의 근간을 세웠다. 카바레 극형식은 대화, 독백, 팬터마임 등 온갖 다양한 연극적 기법을 담고 있다. 카바레문화란 춤, 노래, 시, 독백 등 온갖 표현형식이 뒤섞이는 풍자적이고 희극적이지만 사회비판적인 무대예술이 아닌가! 카바레에서는 무대와 객석이 직접 소통한다. 무대와 객석이 서로 각자 자기의 위치를 한순간도 잊지 않는다. 환상의 세계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관객과 무대 사이에 설정해 놓은 혹은 그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소위 전통극의 ‘제4의 벽’은 카바레 극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카바레 공연에서는 연출지시문을 관객에게 읽어준다. 배우는 관객을 희롱하며 함께 떠들고 직접 소통한다.
브레히트는 보헤미안이었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보헤미안을 아주 싫어했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이런 아방가르드 식 잡탕-연극을 좋아하지 않았다. 브레히트는 20세기 정치적 흐름에도 민감하고 적극적으로 그에 반응하고 활용했다. 20세기의 정치적 소용돌이에도 스타니슬라프스키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30년대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사회변혁적 개념을 처음 접하고 아주 불안해하며 이와 거리를 두었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이성에 의지하지 않았다. 논리를 별로 믿지 않았다. 그 대신 자연을 믿고 그에 순응하고자 노력했다. 스타니슬라프스키에게 자연은 숭고하고 위대하고 고귀했다. 그에 반해 어떤 정치적 참여에도 등을 돌렸다. 혁명가도 아니었고 반동도 아니었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배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