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슬
연극 <언체인>
글_장시연
극작 Sneil
연출 신유청
제작 ㈜콘텐츠 플래닝
장소 콘텐츠 그라운드
일시 2020.04.07 ~ 2020.06.21
기억은 쉽게 변형된다. 모든 사람이 각각 일인칭 주인공으로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수많은 기억들이 본인을 위주로 생겨나고, 사라진다. 그에 따라 진실은 수면 밑으로 가라앉기도 하고, 거짓을 진실이라 믿고 살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은 갈등으로 물든 이 혼란한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그야말로 폭력이 만연한 사회이다. 크게는 남과 북, 진보와 보수, 남성과 여성, 작게는 개인과 개인이 양분화되어 서로를 굴복시키기 위해 헐뜯고, 때로는 ‘마타도어’도 서슴지 않는다. 이성보다는 이념적으로 내 편과 네 편을 구분하며 봉합될 수 없는 갈등을 만든다. 이런 사회에서 진실의 행방은 묘연하다. 진실보다는 승리를 쟁취하는 쪽에 더 많은 노력을 쏟는 듯하다. 연극 <언체인>은 주인공인 마크와 싱어의 진실과 거짓을 둔 첨예한 대립을 다루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한 쪽에 속하기를 강요하는 이분화된 이 사회의 모습을 연극 <언체인>에서 발견할 수 있다. 현대 사회의 갈등 대립은 점점 심화되어 폭력으로,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수준이 되었다. 이러한 사회의 결말을 우리는 이 연극을 통해 예측해볼 수 있다.
연극 <언체인>은 심리 추리극으로, 진실과 거짓의 대립을 다룬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며 진실을 외면하는 싱어, 그리고 그런 싱어에게서 기억을 꺼내 딸을 찾아야 하는 마크. 그들은 대답 없이 질문을 이어가며 점점 진실에 가까워진다.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동성 연인인 싱어와 월터, 재혼한 부부인 마크와 클레어. 이들 중 월터와 클레어가 이혼한 부부라는 관계로 엮여있고, 그들 사이에 딸, 줄리가 있다. 무대 위에 실제 존재하는 인물은 마크와 싱어지만,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위의 등장인물들이 그들을 통해 비추어진다.
본 공연은 2인극이지만,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복잡하다. 예를 들어 싱어가 “내가 마크야. 줄리는 내 딸이야.”라고 말하며 마크(의부)와 월터(친부)의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이나, 마크가 월터가 되어 싱어와 월터의 사랑 이야기를 보여주는 장면들은 결국 싱어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일종의 역할극이었음이 밝혀지지만, 진실을 찾기 위해선 한 대사도 흘려들으면 안 된다. 마크와 싱어를 통해 발화되는 모든 인물의 대사와 행동은 진실을 찾기 위한 키이다. 그런 점에서 본 공연은 불친절하다. 마크와 싱어의 맹목적인 행동에 관객들은 따라가길 포기하고, 그들의 심리게임에서 배제되기도 한다.
연극에서는 이러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무대 장치와 배우들의 동선을 활용한다. 무대는 단순하다. 싱어의 작업실로, 가운데에 벽난로 하나, 왼쪽에 의자 하나, 오른쪽에 싱어의 작업 책상과 의자 하나를 배치했다. 인물의 관계는 이러한 무대 구성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난다. 벽난로를 기준선으로, 왼쪽의 의자는 결박되고 추궁당하는 쪽, 오른쪽의 작업대는 결박하고 추궁하는 쪽으로 구분된다. 처음 극이 시작할 때, 싱어는 오른쪽에서 “아직도 당신의 죄를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며 마크를 추궁하다가, 또 어느 순간 왼쪽 의자에 수갑이 채워진 채로 포박되어 있기도 하고, 가운데에서 벽난로를 보며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기도 한다. 이처럼 벽난로를 사이에 두고 마크와 싱어 혹은 월터, 클레어, 줄리는 끊임없이 위치를 바꿔가며 관계의 변화를 드러낸다.
한편,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인, 마크가 자신의 팔에 싱어의 것과 같은 상처가 있는 것을 발견하는 장면에서부터는 벽난로의 역할이 바뀐다. 싱어의 상처는 마크가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을 때, 역할극을 다시 시작하면서 남기는, 불에 지져진 상처이다. 두려움에 떨던 싱어는 진실과 점차 마주하게 되면서 직접 자신의 팔에 불로 달군 쇠꼬챙이를 가져다 댄다. 이때 마크가 싱어와 함께 고통을 느끼게 되고, 양복 소매에 숨겨져 있던 싱어의 것과 같은 상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낙인을 찍은 셈이다. 그렇게 그들을 나누던 기준선은 허물어지고 마크와 싱어는 벽난로라는 매개체를 통해, 같은 공간에 존재하게 된다.
결국 두 인물이 다르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같은 결말을 맞게 될 것이라는 걸 암시한다.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렸던 싱어, 그는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 마크에게 물었던 것 그대로 “아직도 당신의 죄를 모르겠어요?”라고 벽난로의 오른 편에서 묻는다. 마크는 자신이 원하는 거짓을 진실로 만들어버리고도, 싱어의 추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평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팔의 흉터가, 평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낙인이자 정죄, 죄책감인 것이다.
이처럼 연극 <언체인>에서는 진실과 거짓, 선과 악 또는 갑과 을이 계속 변하는 관계를 묘사하며 우리가 발 담그고 있어 보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이면을 보여준다. 마크와 싱어는 결국 같은 길을 걸으며 파멸하게 된다. 우리 사회 역시 이대로 간다면 연극과 같은 비극을 맞게 될 것이다. 연극 <언체인>을 통해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았고,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미래를 예측했다. 더 나아가 <언체인>은 해결책도 제시하고 있다. 벽난로가 마크와 싱어를 구분 짓기도 하고 연결하기도 하는 것처럼 양편으로 가르는 기준선은 고정되어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가 변함에 따라 함께 변한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회적 합의에 도달해야 하는지 생각할 지점을 준다.
또한 <언체인>은 젠더 블라인드 캐스팅을 도입하여 젠더에 대한 이분법을 파괴하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물론 남성 배우가 연기하는 마크와 여성 배우가 연기하는 마크의 의상에 차이를 둔다는 점에서, 오히려 성 역할을 고정시키는 듯한 아이러니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져왔던 스릴러 장르에서 성별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여성 배우(마크 역에 안유진, 김유진, 싱어 역에 정인지)를 캐스팅하였다는 것은 젠더의 경계선을 허물었다 데에 의의가 있다. 이분법적 사고는 오래전부터 자리 잡아 현대의 경제, 사회, 정치 등 다양한 문제에 사슬처럼 얽혀있다. 극의 제목 ‘unchain’은 ‘사슬에서 벗어나다’, ‘해방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연극 <언체인>에서 누가 어떤 사슬에서 벗어나 해방하게 되는지 결정하는 것이 관객들의 몫이듯, 우리 현대 사회가 어떤 사슬에 얽혀 어떤 갈등을 겪고 있고 어떤 결말을 맺게 될지 결정하는 것 역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