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브레히트는 古典主義 작가인가? (5)

 

이재진 (단국대 명예교수)

 

 

연극비평이란?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우리는 누구인가? 종교가 이런 문제를 제기하면 철학이 이를 받아 분석하고 해답을 찾는다. 그러면 예술은, 그러니까 연극은 무대에서 이를 실험해 본다. 무대 위에서는 증오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죽음을 죽어 볼 수 있다. 이런 실험의 문가에 연극비평가가 지키고 서 있다.

 연극비평은 일반 문예비퍈과 달리 비판의 영역이 독자/관객/무대로 폭넓게 바뀌게 된다. 연극비평가는 공연을 분석하고 작품을 해설해 준다. 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대위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 연극이 나아갈 방향도 비평의 대상이 된다. 좋은 연극비평 없이 연극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70년대 유럽은 무정부주의 시대였다. 연극무대는 재판정으로 바뀌고 사회를 단죄했다. 이때 셰익스피어, 실러 등 고전주의 작가들의 작품이 시금석이 돼 주었다. 햄릿이 기관총을 들고 등장하고, 오셀로는 무대 위에서 비키니를 입은 데스데모나를 강간하며 죽인다. 이런 시대적 혼란 속에, 관객과 무대사이에, 이를 연결해 주는 비평가가 필요한 것이다. 참고로 연극을 체계적이고 이론적으로 분석, 비평한 최초의 연극비평가는 레씽이다. [함부르크 연극론](Lessing. Hamburgische Dramaturgie/1767-1769)은 우리말로 번역, 출간되어 있다(윤도중 역, 지만지 2009).

 

함부르크 연극론

 

케어와 브레히트

박식하기로 정평이 나있던, 20세기 베를린에서 비평가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케어(Alfred Kerr. 1867-1948)는 이어링과 달리 브레히트를 표절자(“잡탕요리사”)로 낙인찍으며 일생동안 부정적 비평을 멈추지 않았다. 케어가 사용하는 언어는 평범하고 간결하게 보이지만 동시에 반어적이고 당사자의 마음이 아플 정도로 매우 공격적이다. 이어링과 심한 경쟁관계에 있던 케어는 이어링을 공격하기 위해서라도 브레히트를 부정적으로 비판한 것 같다. 1922[한밤의 북소리]의 베를린 공연에 대해 케어는 비판을 넘어 때로는 빈정대며 심지어 적개심까지 보인다.

 

브레히트는 몇 년 전 [바알] 원고를 내게 보낸 적이 있었다. 여담이지만, 훑어 본 원고를 나는 되돌려 보내는 법은 거의 없다. 운수업을 내가 하는 것도 아니니까! 브레히트는 그래도 돌려받았다. 그 작품은 온통 저녁노을, , , 넓게 트인 하늘 등의 장면으로 가득했다 뷔흐너의 냄새를 은근히 풍겼다. 괴테의 경우와 비교해 볼 수도 있겠다: , 널찍한 들판. (제대로 된 극이 아니다, 가능성은 보이지만 혼란스런 극이다.) … 이제 두 번째 작품 [한밤의 북소리]의 공연이 몇 달 전 뮌헨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베를린 공연은 엉망이었다. 그저 소란스럽기만 한 작품은 아니지만 실망스러움은 역시 감출 수 없다. 제법 재주가 돋보이기는 하나, 브레히트의 타고난 신선함도 보이지만, 창의력은 부족했다. 좌우간 대부분의 표현주의 작품들보다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표현주의의 작품 중 최고의 대열에 끼어 넣을 수는 없다.

 

Alfred Kerr(출처:구글)

 

[한밤의 북소리]

 우리나라의 초연은 1991년 대학로극장(박승원 연출)에서 있었다. 어쩌면 이때 브레히트의 작품이 최초로 대학로무대에 올랐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그 당시 브레히트란 극작가는 우리에게는 너무 낯설고 신비하고 어려웠다. 서사극이란 꼬리표가 연출가들의 손목을 뒤틀어 잡고 있었다. 하지만 [한밤의 북소리]는 서사극적 요소가 보이지만 상당부분 표현주의 경향의 작품이다.

 대학로 극장은 좁은 공연장이라 브레히트가 요구하듯 넋 놓고 쳐다보지들 마시오!”와 같은 플래카드를 객석에 걸어놓을 수는 없었다. 술 취한 사람들의, 창녀들의 시끄러운 소리, 대포가 굴러가는 소리, 군중이 움직이고 사람들의 고함소리 이에 제목에서 알려주듯 크라글러가 처대는 북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주인공의 마지막 외침이 좁은 극장 안을 너무 크게 울려 어색할 정도였다. 조명은 요란했다. 그사이로 5막 내내 새빨간 달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관객에게 브레히트라는 독일작가는 여전히 낯설기만 했다. 방송매체는 그래도 관심을 크게 보여주었다.

 

브레히트의 언어

 독일어권에서 성경을 가장 많이 인용하거니 주제로 삼은 극작가는 단연 브레히트와 뒤렌마트이다. 뒤렌마트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아버지의 서가는 어린 뒤렌마트에게는 놀이터였다. 흐트러져 있는 성경이나 그림책 위를 뛰어다니며 놀다가 그 위에서 잠이 들곤 했다. 브레히트도 어린 시절부터 성경에 큰 관심을 가졌다. 어머니는 오래 전부터 병고에 시달렸기에 브레히트의 곁에는 늘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어린 손자에게 성경을 들려주시곤 했다. 브레히트의 언어는 바로 할머니의 독일어, 성경의 언어인 것이다. 일기장에 어린 브레히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성경을 자주 읽는다. 큰 소리로. 장마다 멈추는 법도 없이, 욥기며 제왕열기 등. 정말 말 할 수 없이 아름답고 강하다. 하지만 성경은 독하고 아주 고약한 책이기도 하다.”

 브레히트의 초기 작품들이 등장했을 때는 자연주의 연극이 끝나고 온통 표현주의 연극으로 요란할 때였다. 주인공은 흑백으로 갈라진 조명사이에서, 혹은 계단 위에 우뚝 서서 침을 튀기며 열정적으로 고함치고 있었다. 연극무대는 1차 대전이 끝나고 찾아온 비참함을 알림과 동시에 새로운 세기에 맞는 새로운 형식과 주제가 필요했다. 브레히트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절규하는 신파극적 연극, “인간! 드라마”(나는 게거품 연극이라 부른다.)라는 표현주의양식으로는 이를 해결할 수 없다고 브레히트는 생각했다.

 이런 소란한 표현주의 연극이 브레히트에게는 낯설었다. 새로운 무대언어를 찾으려는 브레히트의 처절함은 이미 [바알]에 깊이 묻혀있다. 간결하고 비유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이고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아주 고약한(!) 루터의 독일어였다. 신약에는 동정심, 경건함 등으로 포장된 고운 언어들로 가득하다. 이런 언어는 브레히트에게는 거북스럽기만 했다. 구약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 무자비하게 인간의 생존을 다그치는 거친 여호와가 있었다. 그곳에 원초적 언어의 힘이 들어있었다. 처참한 이 세상을 표현하는데 그에 필요한 적절한 언어가 들어 있었다. 감미로운 달콤한 이웃사랑을 내세워 얼버무리는 엉거주춤한 언어가 아니라 거칠고 속 깊은 비유의 언어가 들어있었다.

 

뒤렌마트(출처:구글)

 

뒤렌마트와 브레히트

  뒤렌마트는 뒤늦게 태어난 자신을 원망스레 한탄한 적이 있다. 자신이 쓰려는 이야기나 주제가 이미 선배들이, 특히 브레히트의 작품 속에 모두 들어있지 않은가! 중요한 작품을 몇 개 비교해 본다. (브레히트의 작품에는 원제를 붙였다.)

  1)신의 개념: [사천의 선인] (Der gute Mensch von Sezuan. 1939)에는 무능하고 비겁한 신()이 나타나 제대로 문제해결도 못하고 허무의 세계로 도망친다 / [천사 바빌론에 오다](1953)에서는 천사가 천상의 소녀를 지상으로 데려와 소란을 불러일으킨다. 2) 정의의 개념: [코카서스의 백묵원](Der kaukasische Kreidekreis. 1944)은 동화 같은 이야기다. 일그러진 정의로 올바른 정의를 일구어낸다 / [노부인의 방문](1956)에서는 망가진 정의로 왜곡된 정의를 돈으로 산다. 3)법의 심판: [주인 푼틸라와 하인 맛티] (Herr Puntila und sein Knecht Matti. 1940)에서 대지주가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철저하게 법을 지킨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을 만나게 된다. / [미시시피 씨의 결혼](1952)에서 법의 구현을 위해, – 솔로몬의 율법을 내새어, 법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을 합법적으로 처형한다. 4)역사관: [억척어멈과 자식들](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 1939)에서 억척어멈은 전쟁으로 자식을 하나씩 잃으면서도 밥벌이 수단인 전쟁이 끝날 가 걱정을 한다. 어멈은 역사의 의미를 모르거나 일면서도 외면한다 / [로물루스 대제](1949)에서 역사를 바꾸려던 황제는 역사와 타협한다. 5)지식인의 태도: [물리학자들](1962)에서 뒤렌마트는 과학자의 본질적 자세를 주제로 삼고 있다. 하지만 브레히트는 덴마크에서 망명생활하면서 이미 [갈릴레이 생애](Leben des Galilei. 1939)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었다. (1945년 개작한 미국 판이 따로 있다. 덴마크판에서는 로마 교황청과 싸우는 지혜롭고 선구적인 갈릴레이라는 물리학자가 등장하는 반면 미국 판에는 탐욕스런 늙은 물리학자 하나가 보일뿐이다. 히로시마 원폭 후 물리학자를 부정적으로 그리게 된 것이다. 이런 경우는 다른 작품에도 자주 나타나니 브레히트의 작품을 다룰 때는 몇 년도 판인지 주의 깊게 살펴봐야한다.)

 

서푼짜리 오페라. 1928. (출처:구글)

 

미국수용

 지난 세기 미국에서 수용한 독일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브레히트의 작품 중 제대로 뉴욕에 진출한 작품은 [서푼짜리 오페라](Die Dreigroschenoper. 1928)가 유일할 것이다. 원래 영국 작품을 개작했기에 극의 흐름을 미국관객이 쉽게 받아드릴 수 있었을 것이지만 브레히트는 주제를 무섭게 비틀어 놓았다. 인간이 변화하면 더 좋은 세상이 오지 않을까?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착하고 깨어 있는, 도덕적인 인간으로 변하면 되지 않을까? 거지나 깡패나 모두 이에 빈정댄다. “착한 사람이 되라고, 그래, 누가 그리 되고 싶지 않겠어?”, “우선 배불리 먹어야, 그다음 도덕이고 나발이지!” (Erst kommt das Fressen, dann kommt die Moral! / First comes a full stomach, then comes ethics.). 무엇보다 루이 암스트롱이 트럼펫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Mack The Knife”는 크게 인기를 몰아주었다.

 뒤렌마트의 미국수용이라면 [노부인의 방문]이 있다. 할리우드에서 잉그리드 버그만과 안소니 퀸이 주인공을 맡았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연극인들이나 관객에게 잘 알려진 브레히트의 작품은 드문 것 같다. 뒤렌마트의 경우라면 [로물루스 대제], [노부인의 방문]이 있다. 독일에서는? [물리학자들]이 뒤렌마트 작품 중 독일에서 가장 크게 주목을 받았다. 독일에 브레히트 학회는 없다.

 

*본 기사의 띄어쓰기와 맞춤법은 필자의 주장에 따라

국립국어원의 규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3 thoughts on “

  1. 이번 달 글도 잘 읽었습니다.
    뒤렌마트와 브레이트의 비교 정리 잘 보았습니다
    독일에는 왜 브레히트 학회가 없을까요? 쓸데없는 의문이 드네요 ㅎㅎㅎ

    1. 이를 설명하려면 “브레히트 수용”이란 주제를 길게 물고늘어져야 합니다. 결론 부분에서 이에 대해 어느정도 설명은 하겠지만 물론 부족할 것입니다. 1) 베를린 노동자 봉기에서 생긴 오해는(추후 상세히 다릅니다!) 브레히트 사망(1959)과 함께 많이 풀리게 됩니다. 그결과 공연횟수에 나타나듯 60년대 브레히트는 전성기를 맞습니다. 2) 70년대 미국, 유럽에 몰아닥친 무정부주의 물결은 기성세대의 모든 유산을 부정하고 배탁적이었다. 이에 “브레히트는 죽었다”도 등장하게 됩니다. 3) 80년대 말 독일통일 후 사회주의는 점차 주요관심축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와 더불어 브레히트의 의미도 사그라지게 됩니다. 4) 21세기에 들어서서는 브레히트의 작품에서 이념을 지우고 시인, 극작가 브레히트를 읽자는 운동이 일부 일어났습니다.

      크노프 교수(Jan Knopf)와 이 문제를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독일에 브레히트 학회가 설립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체념적으로 말했습니다. 친구이기도한 크노프 교수를 만나본지 제법 오래되어 지금은 그분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에세이를 쓰게 된 계기가 크노프 교수의 “브레히트는 21세기의 괴테인가”라는 인터넷 강연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힙니다.

      늘 깊은 관심을 보여주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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