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불편한 것들
연극 <불편한 너와의 사정거리>
글_조하늘
작/연출 정범철
제작 지공연협동조합
장소 대학로 자유극장
일시 2020.10.21 ~ 2020.11.01.
일상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당연한 일상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즉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트라우마에 잠식되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이해 올려진 연극 <불편한 너와의 사정거리>는 역사적, 개인적 트라우마로 인한 복수심으로 가득찬 한 인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극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5·18 민주화운동으로 인한 아물지 않은 상처는, 40년이라는 세월 앞에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날을 우리가 기억하게 만든다. 이 극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 앞에서 ‘트라우마의 치유’라는 몫이 오늘 우리에게 있다고 말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돼, 조속한 민주 정부의 수립, 신군부 세력의 퇴진과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된 민주화운동이다. 5·18로 아버지를 잃게 되면서 생긴 트라우마 속에서 표류하는 주인공 차명숙이, 과거 자신의 악연 세 명을 총으로 죽였다는 사실을 친구인 영실에게 고백하며 극은 시작된다. 명숙의 세 가지 복수극은 모두 5·18의 테두리 안에서 전개되지만 각 복수극이 주는 의미는 조금씩 다르다.
차명숙은 먼저 고등학생 시절 정치적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을 구타하고 문제아로 취급했던 국사 선생, 노혜자를 찾아간다. 친일과 독재를 미화했었던 선생은 여전히 당당한 태도를 보인다. 명숙이 사과를 요구하자, 선생이 던진 말은 “못 해, 아니 안 해.”였다. 두 번째로 찾아간 구동희는, 명숙이 대학생 시절 학생 운동을 하다가 징역을 살며 교도소에서 만난 언니이다. 양성애자였던 동희는 명숙이 광주 사람이라는 이유로 성폭행을 저지르며 괴롭혔다. 이는 명숙의 개인적인 트라우마로 남아 남편과 잠자리를 갖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동희는 가족과 일, 목숨을 잃을 게 두려워 싹싹 빌며 사과한다. 이런 동희에게 명숙은 일침을 가한다. “사과가 너무 쉬워.” 마지막 사람은 명숙이 제작한 5·18 얘기를 다룬 영화를 혹평했던 평론가 심미화였다. 예술을 자신의 의식대로 평가, 해석했을 뿐이라는 미화의 말에 명숙은 대답한다. “당신은 당신의 의식대로 내 의식을 평가한 거지. 영화 자체가 아닌 5·18을 평가한 거야.”
명숙과 악연 세 명의 구도는 시민군과 계엄군의 대립 구도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연극은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보는지 아니면 폭동으로 보는지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5·18을 바라보는 일방적인 시각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보는 이로 하여금 ‘판단’의 문제를 고찰하게 하며, 이 문제는 악연 세 명의 의도적인 등장 순서로 인해 점차 고조된다. 사과하지 않은 국사 선생을 죽인 명숙이 사과를 한 동희도 온몸 곳곳을 총으로 쏴 죽이는 모습을 통해, 역사적 트라우마에 이어 개인적 트라우마가 만들어내는 복수의 극치를 보여준다. 유난히 직설적인 대사와 행동을 난발하는 명숙은 극이 전개될수록 상처 입은 야수가 되어갔다. 유가족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껴본 적이 있냐는 명숙의 포효에, 미화는 폭도들 때문에 계엄군이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잃게 됐다고 반박한다. 여기서 우린 같은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평행선상에 놓인 두 인물이, 정반대를 바라보고 있는 상황을 상상케 된다. 비슷한 크기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이들 중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판단의 문제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발포 소리 그리고 세 악연이 죽고 나서 당당히 퇴장하는 연출은 주목해봐야 할 부분이다. 보통의 연극에서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은 암전이 된 후에 들어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명숙의 총에 맞은 혜자, 동희, 미화는 모두 암전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벌떡 일어나 꼿꼿하게 등장했던 모양새 그대로 퇴장한다. 친구인 영실과 주인공의 대화는 무대 좌측에서 이뤄지고 과거에 저질렀던 복수극은 주로 우측에서 회상되는 무대 구성,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버린 연출은 의도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작가의 치밀한 계산은 후에 이어질 반전과도 연결된다.
이 연극이 유난히 불편한 이유는 단순히 5·18을 기저로 한 복수극이 아니기 때문이다. 친구 영실은 명숙의 남편인 지석과 불륜 관계였다. 불륜을 들킨 지석은 쌓여왔던 불만을 명숙에게 토로한다. 여전히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5·18 관련 분쟁을 위해 싸우고 반대 세력을 쫓는 명숙에게 “너가 이런다고 세상이 달라져?”라며 비난한다. 5·18 트라우마는 명숙 개인을 집어삼켜 가족도 미래도 결국엔 자신도 잃어버리게 만든다. 명숙은 남편 앞에서 후회의 다발을 내뱉으며 존재를 부정하기까지에 이른다. “널 좋아하지 말걸, 국사 선생에게 따지지 말걸, 투쟁하지 말걸, 아버지 자식으로 태어나지 말걸, 광주에서 태어나지 말걸…….” 결국 돌아가자고, 우리 모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죽어서 사라져 버리자는 명숙의 말과 함께 지석과 영실에게 총은 조준된다. 남은 총알은 네 발. 남편, 영실, 그리고 명숙 자신을 위한 세 발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극장에 울려 퍼진 발포 소리는 네 번을 넘었다. 총에 맞아 죽은 지석과 영실 옆에 명숙이 쓸쓸히 앉아있는 장면 후 암전이 된 다음, 다시 지석을 향해 명숙이 총을 조준한 장면이 연출된다. 총은 발포되지만 발포 소리가 나지 않는다. 지석과 영실을 향한 발포는 모두 명숙의 허구였던 것이다. 여기서 관객은 허구의 경계 설정에 있어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지석과 영실과 관련된 사건만이 허구였는지, 명숙과 엮인 세 악연의 죽음까지 허구였는지. 죽은 세 악연 모두 암전되지 않은 상태에서 퇴장했던 모습을 염두에 둔다면 복수극 또한 명숙의 상상 속에서 펼쳐진 허구가 아니었을까, 현실에서 그들은 여전히 꼿꼿하고 건재할 테니.
극의 주요 소재인 총을 소품이 아닌 손 모양으로 연출한 것이 뇌리에 남는다. 트라우마로 인해 회생 불가능해진 이들은 언제나 소지할 수 있는 마음의 총을 상대에게 그리고 자신에게조차 겨누며 매일을 불안한 전시(戰時)상태로 살아가게 된다. 역사를 왜곡한 세 악연, 과거를 극복하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남편 지석, 사과를 구했지만 끝내 배신하는 친구 영실 모두가 명숙에게 <불편한 너>에 해당할 것이다. 5·18 문제를 차치하고 보더라도 21세기 <불편한 너>는 의외로 많을지도 모른다. 왜곡, 비난, 배신은 우리 일상에서 그리 먼 단어가 아니다. <불편한 너와의 사정거리>라는 제목은 어쩌면 상대를 이해, 경청하지 못한 채 각자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너무 쉽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이기적인 우리를 향한 작가의 경고가 아닐까.
이번 극의 재연이 특별했던 점은 바로 젠더 벤딩(Gender-bending) 캐스팅을 선보였다는 데에 있다. 원래 주인공 차명호는 차명숙으로, 친구 김판식은 김영실, 아내 이지숙은 남편 이지석, 악연인 구동만은 구동희로 성별을 반전시켰다. 이런 캐스팅 전략은 남녀에 따라 극 이입에 차별을 둘 수 있어 관객에게 두 배의 재미를 선사한다. 중심 배역의 성별을 바꿔버린 것은 가히 과감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단순 성별 전환을 넘어 네 명의 여성과 한 명의 남성 배우가 채워나가는 무대 위 역동적인 에너지는 주체적인 여성의 서사를 펼쳐 보이려는 작가의 노력으로 인해 발산될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조금 아쉬운 점도 있다. 직설적인 대사와 노골적인 행동에 좀 더 미학적, 상징적인 요소가 가미됐으면, 음향과 소품이 더 적극적으로 사용됐으면 극으로 인한 여운과 극적 효과가 배가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연극의 목적을 염두에 둔다면 직접적인 대사와 절제된 소품, 발포 소리가 주를 이루었던 음향을,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과 초점화를 위한 취사선택의 결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본다.
결말에는 “정말 불편하다, 모든 게 다…….”라는 명숙의 마지막 말과 함께 허무함의 감정이 남겨진다. 역사적 트라우마와 그 속에서 돋아난 개인적 트라우마는 이루지 못한 복수, 매듭지어지지 못한 결말로 인해 ‘불편함’이라는 씨앗으로 우리 가슴에 심어진다. 이 지점에 연극의 의의가 있다. 아직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5·18 책임자 처벌 문제와 더불어 민주주의, 약육강식의 구조 속에 왜곡돼가는 진실 수호 등 오늘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는 많다. 40년이 아니라 100년, 1000년이 지나도 기억해야 할 ‘불편한 것들’, 바뀌어 가야 할 <불편한 너>가 있다. 서로의 트라우마를 함께 끌어안고 느껴 앞으로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는 것, 이것이 명숙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오늘날 우리의 방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