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십(幾十) 명이 연주하는 파우스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Faust)’

– 임야비(tristan-1@daum.net)

자유기고가, 서울 신포니에타 기획 및 연출

극단 듀공아 / 극단 동맹 연출부 드라마투르그

오케스트라

관현악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의 편성은 보통 60~80명 정도다.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 등 기십(幾十) 명의 단원들이 모여서 한꺼번에 뿜어내는 강렬한 비극을 살펴보자.

한 곡은 독일의 작곡가 바그너(1813~1883)의 1840년에 구상을 시작했던 초기작이고, 다른 한 곡은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작곡가 히나스테라(1916~1983)가 1943년에 작곡한 곡이다. 10,000km 이상의 거리 차와 100년의 시간 차를 두고 작곡된 두 곡의 제목은 모두 ‘파우스트 서곡’이다.

R. Wagner (1813~1883)

괴테를 마음속 깊이 존경했던 바그너는 이미 18살(1831) 때 ‘파우스트에 의한 7개의 노래(7 Kompositionen zu Goethes Faust, WWV 15)를 작곡했다. (이는 TTIS 2021년 7월호에 소개한 바 있다) 그리고 9년이 흐른 1840년, 프랑스 작곡가 베를리오즈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관람한 바그너는 프랑스 음악보다 더 치밀하고, 영국 문학보다 더 비극적인 독일 비극을 작곡하기로 한다. 바로 ‘파우스트 교향곡’이다. 하지만 포부가 너무 컸는지 음악은 교향곡으로 완성되지 못하고 단악장의 관현악 곡으로 끝나버렸다. 4년 뒤, 그는 원래 구상을 수정하여 파우스트 서곡 (Eine Faust-Ouvertüre, WWV 59)이라는 이름으로 드레스덴에서 초연한다.

파우스트 서곡 총보 표지

곡을 들어보면 독립적인 3개의 주제가 얽혀 있음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고뇌하는 파우스트의 주제, 아름다운 그레트헨의 주제 그리고 저돌적인 메피스토펠레스의 주제가 뚜렷하게 구분된다. 여기까지는 여느 작곡가도 생각할 수 있는 구상이다. 타고난 연출가 바그너는 이 지점에서 멈추지 않는다. 바그너는 이 주제들을 둘씩 혼합해서, 음악에 연극 같은 ‘서사’를 만들어낸다. 파우스트의 주제와 그레트헨의 주제가 합쳐지면서 음은 생기를 잃고 선율이 아련해진다. 그레트헨의 주제는 점점 광포해지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주제에 쫓기듯이 몰리다가 완전히 짓밟힌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주제는 파우스트의 주제와 충돌하면서 비극의 절정을 찍고 이내 나락으로 추락한다.

약 12분의 음악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자세히 들여다보자.

Sehr gehalten(매우 신중하게) (0분~3분): 튜바의 어둡고 무거운 선율이 꿈틀거린다. 파우스트 박사의 고뇌와 서재로 잠입하는 비극의 전조를 듣는 듯하다. 그야말로 악곡 형식의 서곡이자, 연극 형식의 서장에 걸맞은 분위기다.  

Sehr bewegt(매우 동적으로) (3분~5분): 현이 몰아침은 파우스트를 관악기의 낭랑한 선율은 그레트헨을 상징한다. 대조적인 두 주제는 돌아가면서 대화를 시도하지만, 계속 어딘가 삐걱거린다. 결국 두 주제가 중첩되면서 애끓는 감정이 터져 나온다. 바그너의 중기 걸작인 ‘로엔그린’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선율이 간간이 포착된다.  

Sehr allmählich das Tempo etwas zurückhalten (매우 점진적으로 템포를 낮춘다) (5분~9분): 발전부에 해당하며 가장 드라마틱한 전개를 보이는 부분이다. 목관의 가냘픈 고음은 중저음 금관의 행진곡풍 주제에 위태롭게 쫓긴다. 이 추격은 대단한 긴장감을 자아내는데 점점 압도적인 음량으로 행진하는 악마의 주제와 쓰나미 같은 현악기 군단의 고뇌에 결국 그레트헨의 주제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리듬에 잡아 먹힌다. 남자와 악마에 의해 최후를 맞는 여인의 파멸. 바그너의 음악적 연출은 악마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천재적이다.

Wild – A tempo (거칠게 – 원래 템포로) (9분~12분): 이제 인간의 고뇌와 악마의 사악함이 비극이라는 링 위에서 혈투를 벌인다. 파우스트의 휘몰아침과 메피스토펠레스의 행진이 정면충돌하면서 악곡의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서로의 꼬리를 물은 두 마리 뱀은 희곡의 결말처럼 소멸하고 첫 서주처럼 침묵에 가까운 음향만이 남는다.

바그너와 메피스토펠레스

바그너는 이 곡에 관해 ‘파우스트 한 사람의 고통이 아닌, 전 인류의 고통을 담고 싶었다’라는 말을 남겼다. 비록 완성된 교향곡의 위용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바그너는 이 서곡 하나로 원작 파우스트 전체를 집약하는 청각적 이미지를 구축했다. 파우스트 서곡은 바그너 한 사람의 음악이 아닌, 전 인류의 음악으로 재평가 받아야 할 것이다.

A. Ginastera (1916~1983)

아르헨티나의 대표 작곡가 히나스테라는 1943년에 ‘크레오요 파우스트 서곡 (Obertura para el “Fausto” Criolla)를 작곡하고 이듬해 지휘자 호세 카스트로가 이끄는 칠레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초연한다. 히나스테라는 아르헨타나의 시인 에스타니슬라오 캄포(Estanislao del Campo; 1834~1880)의 시집 “Fausto”에 영향을 받아 작곡을 시작했다. 참고로 Criollo, Creole(크리오요,크레올)은 남미 식민지에서 태어난 유럽(특히 스페인) 혈통의 백인을 일컫는다. 후에는 백인과의 혼혈을 통칭하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좌) 에스타니슬라오 델 캄포 (중) 남미의 카우보이 ‘가우초’ (우) 델 캄포의 ‘Fausto’

Fausto의 내용을 간단하게 알아보자. 무지몽매한 가우초(남미의 카우보이)가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를 보고 크게 감명을 받는다.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는 ‘백 명 이상이 연주하는 파우스트’에서 다룰 예정이다) 가우초는 목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랜 친구를 우연히 만나 술을 마시며 파우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다. 취기로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면서, 가우초는 좀 전에 보았던 파우스트의 이야기가 자신에게 펼쳐지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히나스테라의 ‘크리오요 파우스트 서곡’ 총보

음악은 저음 현의 음산함에 심벌즈를 얹어 청자를 환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다양한 타악기와 출렁거리는 리듬으로 보아 이곳이 적어도 남반구의 어디 즘이라는 것을 쉽게 인지할 수 있다. 히나스테라는 파우스트를 독일에서 빼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차별점을 두었다. 아르헨티나 민속 음악 선율과 격정적인 삼바 리듬을 곳곳에 심어 놓았다. 또 구노의 오페라에 나오는 몇몇 주제를 변주해가면서 자신만의 ‘남미 파우스트’, ‘혼혈 파우스트’를 창조해 나간다.

하지만 악곡의 구조 즉 뼈대는 바그너의 파우스트 서곡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9분 정도의 곡은 네 부분으로 나뉘는데, 저음의 음산한 리듬이 비극의 전조를 암시하는 부분(0분~2분), 클라리넷의 쓸쓸한 주제를 현이 이어받는 아름다운 부분과 원주민이 말을 타고 질주하는 듯한 리듬이 대비되는 제시부(2분~5분), 메피스토펠레스를 상징하는 듯한 기괴한 리듬이 여러 악기로 널뛰며 춤추는 푸가 발전부(5분~7분), 마지막으로 처음의 서주부가 다시 등장하며 거대한 크레센도를 쌓아 올리다가 단칼에 곡을 마무리 짓는 종결부(7분~9분)까지 바그너와 거의 비슷한 악곡 진행을 보인다.

두 곡은 살짝 다른 모양의 술잔에 담긴 똑같은 술이다.

100년의 시간차와 10,000km의 공간을 하나로 묶는 파우스트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괴테가 인간-악마, 쾌락-비극, 고뇌-구원이라는 상반된 주제들을 세 인물에게 이중 결합시킨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다이아몬드 같은 단단 결합이 영원하다면, 파우스트는 10,000년의 시간과 100광년의 공간까지도 초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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