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Faust)’
– 임야비(tristan-1@daum.net)
자유기고가, 서울 신포니에타 기획 및 연출
극단 듀공아 / 극단 외계공작소 연출부 드라마투르그
2020년 10월에 시작한 ‘음악으로 듣는 연극 – 파우스트’ 편을 장장 1년 6개월간 연재했다. ‘1인이 연주하는 파우스트’에서 시작하여 ‘2인’, ‘8인’ 그리고 ‘기십 명’까지 왔지만, 이제야 산 중턱이다. 파우스트는 연극사적으로나 음악사적으로나 정말 높은 산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멀리 하늘 끝에 정상이 보인다. ‘백 명’, ‘수백 명’, ‘천 명’이 연주하는 파우스트를 정복하기 전에, 중턱에 잠시 캠프를 치고 피로를 녹여보자. 그리고 지난 1년 반 동안 올라왔던 길을 지긋이 내려다보며, 긴 등정에서 놓쳐버린 음악들을 다시 챙겨본다.
4월호와 5월호에는 파우스트 연재를 하는 동안 누락됐던 곡들을 부록 편으로 정리한다.
첫 부록은 2인(人)이 연주하는 파우스트에서 그냥 지나친 네 곡의 기악곡이다. 폴란드, 프랑스, 벨기에, 스페인 국적의 네 작곡가는 19세기 후반을 풍미했던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파우스트 환상곡’이라는 동일한 제목의 음악을 남겼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1782~1840). 신들린 연주 때문에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가 맺은 유명한 계약이 공인된 수식어가 된 바이올리니스트다. 안타깝게도 파가니니는 파우스트와 연관된 음악을 작곡하지 않았다. 이후, ‘피아노의 파가니니’를 원했던 프란츠 리스트(1811~1886)가 ‘악마에게 영혼을 판’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수많은 파우스트 관련 곡을 남겼다. (앞선 연재에서 여러 번 소개한 대로, 리스트는 자신과 괴테 그리고 파우스트를 동일시했다) 피아니스트에게 선수를 뺏긴 감이 있지만, 파가니니 뒤를 잇는 바이올리니스트들의 혈관 속에는 ‘악마의 바이올린’이라는 피가 요동치고 있었다.
첫 포문을 연 작곡가는 폴란드가 자랑하는 바이올리니스트 헨릭 비에니아프스키(1835~1880)였다. 1865년, 바이올린 기량이 절정에 오른 서른 살이 되던 해 그는 ‘파우스트 환상곡(op.20)’을 발표한다. 정확한 제목은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 주제에 의한 화려한 환상곡’인데, 프랑스의 작곡가 샤를 구노(1818~1893)가 쓴 오페라(이 오페라에 관해서는 향후 ‘수백 명이 연주하는 파우스트’에서 소개할 예정이다)에서 주제를 따와 자유롭게 변주한 작품이다. 제목에 ‘화려한’과 ‘환상곡’ 같은 단어가 당당하게 꽂혀 있으니 음악이 어떨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너무 자극적이고 귀가 아픈 곡이다. 15분 동안, 비에니아프스키는 바이올린이 낼 수 있는 모든 소리를 연주자에게 요구한다. 완급과 강약이 있지만, 시종일관 공격적이다. 듣고 있자면,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청중의 고막을 폭격하라’라고 명령하는 작곡가의 고함이 들리는 듯하다. 조금 더 집중하면 바이올리니스트의 왼손이 꼬이는 소리와 오른쪽 겨드랑이가 쓸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왜 이렇게 어렵게 작곡했을까? 간단하다. 이기적인 작곡가 비에니아프스키는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인 자신’만’이 연주할 수 있게 이 곡을 만들었다.
‘악마적인 기교를 요하는 이 곡은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가니니의 적통인 나만이 연주할 수 있다. 게다가 제목 또한 ‘파우스트’ 아닌가?’ 작곡을 마치고 비에니아프스키는 필시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음악에는 괴테도, 비극도 없다. 오직 ‘바이올린’ 뿐이다. 깊은 미학은 한 음도 없고, 얕은 자극만이 춤을 춘다. 오로지 바이올린 한 대로 고뇌하는 파우스트 박사, 연약한 그레트헨 그리고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연기한다. 싸구려 1인 3역. 광대는 단지 이것을 미친 듯이 자랑하고 싶을 뿐이다.
파가니니의 뒤를 잇는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의 음악가들에게 구노의 파우스트는 무척 매력적인 요리감이었다.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멜로디가 오페라 곳곳에 널려 있었고, 또 자신의 현란한 기교를 마음껏 뽐낼 수 있는 주제도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를 적극 활용한 비에니아프스키의 ‘파우스트 환상곡’이 대중의 큰 환호를 받자, 비슷한 형식의 곡들이 연이어 출현했다.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 쟝-델핀 알라르(1815~1888)는 1868년에, 벨기에의 바이올리니스트 앙리 비와탕(1820~1881)은 1869년에 각각 ‘파우스트 환상곡’을 경쟁하듯 발표했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 파리 음악원의 교수였던 알라르는 비에니아프스키와 사라사테의 스승이었고, 브뤼셀 음악원의 비와탕은 비에니아프스키의 선임이었다. 제자와 후임의 히트곡을 스승과 선임이 모사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인지 두 곡은 ‘내가 네 녀석보다 바이올린 더 잘한다’를 외치는 시샘으로 꽉 차 있다. 두 곡 다 ‘메피스토펠레스적’ 기교에만 집중한 나머지 손가락 테크닉만 있고, 음악성은 전혀 없다. 유튜브로 한 번쯤 들어볼 만한 가치는 있지만, 두 번 이상 듣거나 음반을 소장할 가치는 없는 곡들이다.
‘지고이네르바이젠(Zigeunerweisen op.20)’으로 유명한 스페인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 파블로 데 사라사테(1844~1908)는 1874년에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파우스트 환상곡(op.13)’을 작곡했다. 정확한 제목은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 주제에 의한 새로운 환상곡’인데, 새로운(Nouvelle)를 넣은 이유는 경쟁자 비에니아프스키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1년 전인 1873년, 비에니아프스키는 자신이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 2번(op.22)을 경쟁자이자 친구였던 사라사테에게 헌정했지만, ‘너무 어려워서 나만이 연주할 수 있다’라는 핑계를 대고는 자신이 초연을 해버렸다. 쉽게 풀어 말하자면 ‘내(비에니아프스키)가 어려운 곡 하나 썼는데, 아마 너(사라사테)는 연주 못할 거야. 그러니 내가 연주하는 거 잘 듣고 배워’라는 뜻이다. 바이올리니스트들 사이에서 이건 엄청난 모욕이다. 사라사테는 비에니아프스키의 대형 히트곡 ‘파우스트 환상곡’과 같은 제목으로 곡을 쓰고 그 앞에 ‘새로운(nouvelle)’만을 붙여 무대 위에 오른다.
오페라 3막에서 메피스토펠레스가 비아냥거리며 부르는 ‘황금 송아지(Le Veau D’Or)’ 주제와 2막의 피날레에서 연주되는 ‘왈츠(Valse)’ 주제가 사라사테 곡의 골격을 이룬다. 느린 변주와 빠른 변주가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고 교차한다. 느린 부분은 화성적으로 포근한 느낌을 주면서, 파우스트와 그레트헨의 사랑을 노래한다. 기교적이고 화려한 빠른 부분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사악함을 강렬하게 암시한다. 피날레의 끓어오름은 음악성과 테크닉을 모두 붙잡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마무리다. 초연 무대는 대성공이었다. 비에니아프스키의 곡은 졸지에 ‘낡은(vieux) 파우스트 환상곡’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사라사테는 비에니아프스키가 ‘파우스트 환상곡’으로 거둬들인 갈채를 순식간에 자신 앞으로 돌려놓았다. 참 멋진 복수가 아닐 수 없다. 이후 사라사테는 곡의 웅장함을 강조하기 위해 빈약한 피아노 반주를 치워버리고 오케스트라 반주로 악보를 편곡했다.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사라사테의 ‘파우스트의 회상(Souvenir de Faust)’을 덧붙인다. 1863년, 사라사테가 아직 설익은 청년이었던 19살 때 작곡한 소곡으로 11년 뒤의 대작 ‘새로운 파우스트 환상곡’의 밑그림을 엿들을 수 있는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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