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AD1997/ 오유경

<햄릿, AD1997>
햄릿 아카데미
햄릿이라는 틀로 바라본 21세기 세대론

 

극단 그룹動·시대 연출 오유경

 

원작: W. Shakespeare
구성/연출: 윤서비(윤형섭)
단체: 열혈예술청년단
공연일시: 2017/03/24-03/25
공연장소: 아라리오뮤지엄 공간소극장
관극일시: 2017/03/24

 

 

4season
뚜렷하게 살기? 아니면 있는 듯, 없는 듯? 질문을 해보자. 무엇이 더 고상한 거지?
난폭한 운세가 활을 쏘고 돌팔매를 하는데도 견뎌? 반대로 고난의 바다와 전쟁을 치러 그것들을 끝내버려?

죽음? 잠… 그 외에는 없다…
끈질기게 대물림되며 우리 본성에 내재되어버린 수천수만의 고통을 가히 끝냈다 말할만한 잠이라…
그것이야말로 절실하게 바라는 극치의 순간이지. 죽는 것, 잠자는 것.

가만, 잠자는 건 어쩌면 꿈을 꾼다는 것일 수도 있지. 아, 이게 문제야. 잠이 몰고 오는 꿈은 또 무얼까?
속세의 번뇌에서 해방되는 그 순간에도 서두르면 안 돼. 우린 잠시 생각해야해.
그 꿈이 더욱 더 질긴 재앙의 시작일 수도 있다는 걸 기억하자.
미지의 그곳에서 만날 그 무시무시한 꿈이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리게 만드는 거야.
알지도 못하는 세상으로 날아간다? 차라리 견디어라!

오만한 늙은이들과 싸가지 없는 젊은이들,
공포를 조장하는 권력자들과 분노를 팔아먹는 정치가들,
시류에 편승하는 예술가들과 정의를 떠들어대는 위선자들,
눈치나 살피는 비리비리한 개인들과 디테일은 챙기지 못하는 눈 먼 패거리들의 나라, 이 지옥 같은 나라를!
견디어라, 살아있다는 고통을!

뒷생각이 우릴 겁쟁이로 만든다. 선명했던 결기가 창백한 번뇌 때문에 병약해진다.
위대한 대업으로 가는 거대한 조류까지 엇나가게 한다.
실천, 이 말을 무색하게 한다.

혼자다.
투 비. 싸운다. 고로 존재한다.

작품 《햄릿, AD1997》 마지막 햄릿의 독백이다. 사실 이 독백만큼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치열한 메시지를 표현하기란 어렵다는 결론이다. 윤서비(본인은 윤형섭으로 알고 있는 그.)가 연출하고 구성한 작품 《햄릿, AD1997》은 햄릿을 통한 한 젊은 연출가의 고민과 혼란과 좌절과 그럼에도 불끈 솟아오르는, 아니 솟아오를 수밖에 없는 뜨거운 열정과 욕망과 나약함과 호기심과 수많은 지적인 질문들과 수많은 멍청한 질문들, 그리고 기대치 않게 가슴가득 차오르는 숨길 수 없는 새로움을 향한 설레임 그 모두가 투영된 작품이었다. 사실 작품은 역동적인 미장센으로 가득 차 있느냐. 그렇지 않다. 어떻게 보면 지루할 정도로 희곡 <햄릿>을 관객에게 설명하고, 분석하고 연구한 지적 정보들을 가르치고 있다. 연출 윤서비의 표현대로 이것은 햄릿 아카데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사유와 감정들이 서로 거칠게 부딪치고 소용돌이치고 있음을 단박에 느낄 수 있다. 후에 연출은 고백한다. 죽치고 앉아 끝없이 토론하고 싶었다고! 그래줄 걸 그랬다고 본인도 속으로 후회하고 있는 중이다. 얼마나 재밌는가. <햄릿>을 통해 21세기 대한민국 2017년 현재 예술가랍시고 떠들어대는 비리비리한 우리 속에 어김없이 도사리고 있는 그 놈, 햄릿을 발견하는 짓거리란!

‘투 비(To be), 존재하려면 행동해야한다. 실천해야한다. 싸워야한다. 그래야 존재한다.’ 이 명제가 요즘처럼 젊은 가슴을 절실하게 울린 적이 있던가. 이미 노땅 취급당하는 386세대 본인을 제외하고 윤서비는 90년대 대학생, 신념이나, 이념이란 용어가 구닥다리 이데올로기적 용어로 읽히던 세대가 아닌가. 그보다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스타일로 개인적 만족과 성공, 그에 따른 사회적 인정이 무엇보다 절실하고 현명한 목표였을 것이다. 그런데 누구나 그렇듯이 항상 그 ‘때’를 만난다. 이념과 신념의 소용돌이에 뛰어들던 벌써 꼰대 취급당하는 386세대가 아니더라도, 이념이 아니더라도 신념이 아니더라도 이놈의 상념과 상념이 사유와 사유가 그에 파생되는 감정과 감정들이 서로 꼬리를 물고 서로 뒤엉켰다 사라지고 뜬금없이 다시 생성되어 휘몰아쳐 머릿속과 가슴속을 헤집어 놓는 그런 ‘때’말이다. 햄릿이란 놈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정상인 듯 미친 듯, 아니 정말 아예 미쳐버릴 그 ‘때’를 만난다.

작품 《햄릿, AD1997》에는 몇 가지 중첩이 존재한다. 공연은 <햄릿> 공연 연습을 준비하는 두 배우(남자 1명과 여자 1명)와 조연출 겸 조역을 맡아주는 1명의 신입단원(남자 1명)이 출연한다. 그들은 공연 연습을 하는 동시에 희곡에서 발견되는 역사적(시대적) 혹은 종교적 혹은 문화적 등등의 여러 사항들을 관객에게 알려준다. 즉 배우들은 공연연습을 하고 있는 동시에 관객을 인식하며 <햄릿>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인문학적 의문점을 설명하며 작품에 대한 관객의 지적 이해도를 높인다. 배우들은 공연연습이라는 스스로의 공간과 시간을 가지면서 동시에 관객을 직접 상대하는 공연이라는 또 다른 시간과 공간을 중첩하여 존재한다. 또한 작품 《햄릿, AD1997》은 무대 뒤에 스크린을 통해 공연되는 대본이 그대로 투영되어 실제 공연 중 공연연습을 하는 두 배우의 생각에 따라 또는 연습 중 찾아지는 발견에 따라 바로 그 자리에서 대본이 수정된다. 마치 이 작품은 두 배우의 공연연습이라는 즉흥성을 반영하는 듯 하지만 결국 그 자리에서 수정된 대본도 결국 이미 이 공연 전에 결정된 사항이며, 두 배우는 마치 공연 동안 바로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이를 바꾸듯이 연기한다. 배우들의 연기라는 것이 동시성이라는 현장성 그 즉흥성을 창출하면서 동시에 그 연기라는 것도 이미 공연연습을 연기하기 위한 공연연습을 거쳐 확정된 결정 곧 계획된 것이라는 중첩이 존재한다. 더구나 두 남녀의 배우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생물학적 성별과는 무관하게 여자배우가 햄릿을 남자배우가 거트루드를 연기하다 또 자연스럽게 그 역할을 바꾸기도 하면서 성의 역할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이러한 중첩은 작품이 진행되는 내내 수시로 발생하며 중첩되는 코드도 다양하여 이 작품을 즐기는 하나의 극적 약속으로 자리 잡는다.

작품 《햄릿, AD1997》은 아라리오 뮤지엄 공간소극장에서 무료대관을 후원하고 기획한 2017‘사계절연극제’ 시리즈 중 2번째 공연이다. 올 해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고전을 다루는 연극 페스티벌을 해 볼 계획으로 극장 측에 제안하고 이를 성사시켰다. 처음 이 페스티발을 기획한 하수민연출(극단 즉각반응)을 비롯, 김정(극단 내친김에), 윤서비(극단열혈예술청년단), 이렇게 3명의 연출가가 모였고, 마지막 한명은 다양한 색깔을 내기 위해 타장르를 베이스로 하는 아티스트와 함께하자는 의견으로 이세승안무가(쌍방 대표)를 추천하여 이루게 되었다. 첫 주제는<햄릿>으로 작년부터 기획과 스터디에 돌입했고 당초에는 계절마다 한 연출가씩 공연하기로 하였던 것이 3월에 2명, 6월에 2명, 9월과 12월은 가급적 4명이 같이 함께 작품을 발표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단다. 재밌는 것은 연출 안할 땐 서로 드라마터그와 무대감독을 해주기로 룰을 정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연출가들은 공연에도 출연하여 꼰대 선배연극인역할을 톡톡히 해내주었다.

작품 《햄릿, AD1997》을 통해 윤서비 연출이 집중한 것은 <햄릿>에 나타나는 세대론이었다. 햄릿 선왕의 시대에서 숙부의 시대이자 햄릿에게는 빼앗긴 시대 그리고 그 시대는 다시 포틴브라스의 시대로 교체되는 이야기를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에 맞게 풀어보려 한 것이다. 연출 본인은 실질적인 민주화 이후 세대라 일부 87년 민주화운동 세대의 운동권 마인드에 공감과 반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곧 자신의 세대는 민주화세대와는 반쯤 다르고 반쯤 비슷하며 또 그 아래 세대는 또 자신의 세대와 반쯤 다르고 반쯤 비슷하다는 것이다. 선배들이 나를 잊지 말아달라고 외치는 게 부담스럽지만 나 역시 후배들에게 잊지 말아달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어떤 세대들도 자신의 세대가 윗세대와 아래 세대 사이에 낀 세대라고 생각을 할 거라는 것이다. 아버지를 닮았지만 아버지를 거부하는 햄릿, 역사를 남기고 싶지만 그걸 거부하는 포틴브라스로 가는 흐름 속에서 윤서비 연출은 이러한 시대인식의 중심을 잡았다고 고백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세기를 정확하게 부정하지 못한 채로 20세기를 흘려보낸 여진이 21세기의 벽두를 흔들어대고 있다! 19세기에 집대성된 인간의 이성은 20세기를 거치면서 거의 몽땅 엎어졌는데도 여전히 우린 19세기적인 정의론, 윤리의식 등에 매달려서 해메고 있는 거 아닌가. 21세기는 21세기에게 맡겨야하는데 난 여전히 21세기에 19세기의 언어를 주입하려고 애쓰는 거 아닌가! 후배에게 달력 가득 기억해야할 날들에 빨간 동그라미를 쳐서 물려줄 것이 아니라 쿨하게 빈 달력을 주어야하는 거 아닌가!’

작품 《햄릿, AD1997》는 연출의 정의에 따르면 ‘연극에 관한 연극’이다. 연기의 속성, 연극의 속성들이 격언으로, 형식으로, 스토리로 끝없이 등장한다. 위장은 스스로를 당당하게 만들지만 진실의 거울은 그런 그들을 각성시킨다는 주장이다. ‘각성은 추한 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들고 그러면 사람은 유령이 됩니다.’ 곧 그 말은 공연에서도 두 배우의 대사로 드러난다.

유나이렇게 해서 햄릿은 왕 앞에서 연극 공연을 하기로 계획하죠. 은밀하고도 주도면밀하게 준비를 해나갔겠죠. 염탐은 더욱 더 햄릿의 목을 조여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확실한 물증확보를 위한 그 날이 오기 직전, 그 유명한 독백이 나오죠.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동석‘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면서 멋진 연기를 하면 참 좋겠지만, 이 독백만큼은 너무 부담스러워서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햄릿> 공연을 보러오는 몇몇 사람들은 이 장면만 기대하고 온다고도 하던데… 그러다보니 더욱 부담이… 크… 그래서 그냥 간단하게 우리의 해석을 얘기하고 넘어갈까 합니다.
유나저희 생각은 이런 겁니다. 햄릿의 고민은 총 세 가지입니다. ‘to be’, ‘not to be’, ‘to die.’ 그니까 사느냐, 죽느냐 이렇게 두 가지가 아니라는 겁니다. ‘to be’, 존재하느냐, ’not to be’, 존재하지 않느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꼭 죽는 건가? 아닐 수도 있죠. 존재감 없이 살면 존재하지 않는 거죠. 생각하는 바대로 살지 못하고 마지못해 사는 것?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거? 햄릿은 초장부터 자살까지 생각하던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존재가 ‘not to be’라고 느끼고 있었겠죠.
동석‘to be’가 되어야하는데 ‘to be’가 쉽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to be’가 안 될 바에는, ‘to die’로 가자, 하는 거죠. 근데 ‘to die’가 만약 ‘to sleep’이라면 이건 또 죽어서 악몽만 계속 꾸게 될 수도 있으니까 선뜻 선택하기가 어려운 거죠. 그래서 결론은 뭐냐? ‘to be’ 밖에 없는 거죠.
유나즉, 저희는 이 독백을 햄릿이 자신의 결심을 예리하게 다듬는 과정이라고 보았습니다. 생각한대로 실천하는 것, 그것이 어렵더라도 맞서 싸워서 기어이 끝을 보는 것… 그것이 결국 햄릿이 생각하는 ‘to be’의 길이죠. 형준아, 지금 몇 페이지야?

연출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이 To Be 라고 착각하던 인간들은 진실을 마주대하면 Not To Be가 될 수밖에 없고, 그러면 다시 진짜 To Be 혹은 To Die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To Die가 To Sleep이면 영원한 악몽에 빠져야할 수도 있으니 결국 To Be 밖에 방법이 없다. 그래서 결국 진짜 To Be가 되기 위한 고투가 시작되는 거다. 흥미로운 아이러니는 To Be를 추구하다보면 To Be의 마지막 관문은 결국 To Die가 된다. 결국 모두 죽으니까. <햄릿>은  To Be라고 착각하던 사람들이 각성을 통해 Not To Be가 되어버리고 그래서 진짜 To Be를 추구한 끝에 To Be의 완성으로써의 To Die를 맞이하게 되는 이야기다. 일련의 과정은 각성을 거쳐 진행되는 데 각성의 촉매는 환영의 모습을 띈 진실이다. 그것은 역지사지이고 거울이며 누군가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연기 혹은 연극입니다. 즉, 연기는 각성을 촉구하는 진실의 거울인 셈이다.’ 그래서 대본, 배우의 실재 이야기, 배역, 극중 극 등의 다층적인 중첩을 작품에 깔아두었다는 것이다.

작품 《햄릿, AD1997》은 의자 2개에 밋밋한 스크린을 덜커덕 처 놓고 글자로 빽빽이 채워진 대본을 투영한다. 극적인 드라마의 환상을 기대하던 어떤 관객에겐 어쩌면 고리타분한, <햄릿>이 되기 전의 <햄릿>을 보는 듯한, 관심도 없는 사항들을 미주알고주알 세세히 가르쳐 주입시키려는 어느 깐깐한 교수의 강의인 듯 보인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그 ‘때’를 맞은 어느 연출가의 결코 고리타분하지 않은 폭풍우 치는 가슴과 사유를 그대로 실었다. 그리고 관객 하나하나 속에 숨은 그 놈, 햄릿을 발견하게 하였다. 햄릿, 그 놈! 그 놈은 바로 지금의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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