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 이예은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
: 체홉의 것이면서 동시에 너무도 구체적인 이 연극 속의 것

 

이예은 (호원대 공연미디어학부 교수)

 

 

 

체홉의 것이면서 동시에 너무도 구체적인 이 연극 속의 것

 

이 연극에는 땅 하나가 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이 그러하듯 시간의 흐름과 함께 육체의 나이가 드는 땅. 그 땅을 밟고 서 있는 존재들 역시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 땅 위에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려 한다. 뒤늦은 나이에 철학이라는 세계에 진입하여 이제라도 진실한 글 한 편을 쓸 수만 있다면, 하는 열망을 가진 용우(아스트로프)는 어떤 이상을 향해 확고하게 펼쳐질 자신의 씨앗 하나를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사실 그에게 땅은 꼭 지켜야 할 세계가 아니다. 그 땅이 아니어도, 어떤 존재하지 않는 땅에서라도 그는 꽃을 피울 작정이기 때문이다. 편집장의 두 번째 여성이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역시 그저 두 번째의 것이면 족하는 지인(엘레나)은 땅의 표면만을 걷는 사람이다. 아니 땅을 걷는 듯 보이지만 땅을 걷지 않는 사람이다. 그것이 가능할까? 이러한 생존 방식에 질문이 많아진 사람들은 그녀에게 비극적이라거나 가짜이라거나 혹은 진짜인데 가짜 행세를 하는 것이라는 여러 타자적 인식을 덧댄다. 그러나 그녀는 그저 부차적인 삶에 만족하는, 그래서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람이다. 인문과학 잡지 <시대비평>의 작은 두 일꾼인 남건(바냐)과 샘이(소냐)는 그 땅에 작은 뿌리 하나를 내린 사람들이다. 그 땅의 나이 듦을 생각할 때, 다시 말해 땅 그 자체를 생각할 때 이들이 내린 뿌리의 세월과 깊이는 미미한 것이지만 이 둘은 그 늙어가는 땅 위에 발목을 비벼 넣고 두 발로 서 있을 힘을 발견하고 발휘해서 사는, 삶이라는 터전 위에서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생존자들이다.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소냐는 그저 이 땅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며 자기 자신을 뒤로 한 채 노동하는 인물이라면 바냐는 이 땅과 자신을 일치시키며 자기 자신에게 느끼는 애증을 노동 속에서도 함께 느끼는 인물이다. 그래서 남건의 땅은 눈물 젖어 있고 샘이의 땅은 외롭고 황량하다. 그리고 오랜 시간 땅의 주변부를 관리하고 지켜 온 유모 마리나는 출판 업무의 주변과 관리를 담당하는 회계 혜수로 등장한다.

 

이 존재들, 이들이 밟고 있는 땅, 그 땅의 생존과 맞닿아 있는 시간. 연극 속에 존재하는 이 모든 존재, 공간, 시간은 체홉의 것이면서 동시에 너무도 구체적인 이 연극 속의 것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연극이 지닌 이러한 구체적이고도 사실적인 상상력으로 인하여 쓸쓸함이 가장 선명하게 체감된 순간은 다름 아닌 커튼콜을 하던 순간이다. 그나마 연약하게 사투하고 있던 이 모든 사람들이 정말로 이 무대를 떠나 가 버리고 나면 연극이 아닌 정말 현실 속에서 오롯이 남을 이 땅의 생존은 어떻게 되는 걸까, 한참 객석을 떠나지 못하고 붙들 수 없는 그 땅을 바라보았다.

 

 

정박된 시간 속, 생생함과 허망감의 ‘사이’

 

체홉의 세계가 연극 속 세계로 옮겨져 오면서 원작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지독한 것들이 느껴진 것도 있다. 그것은 생생함과 허망감이다. 생생함과 허망감이 보여진 이유는 이 연극이 다루어내는 시간과 체홉의 작품 안에서 읽었던 시간의 결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체홉은 세계의 모든 것을 시간이라는 관조 안에서 바라보게끔 했다면 이 연극은 진실과 허망감을 번갈아 보여주며 시간을 붙잡으려 한다. 체홉이 주목한 ‘사이’의 힘이 정박된 채로 존재하는 느낌이랄까. ‘겨울이 끝나지 않는다’는 언어의 반복적인 노출이 체홉의 사이, 사이를 드러내는 휴지, 그 텅 비어 있는 침묵적 관조를 멈추어 서게끔 만든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겨울’이라는 발설은 봄을 기다리면서 하는 말 같지만 정작 봄에 어떤 희망도 걸지 않는 태도를 드러내며 시간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작품의 흐름 속에서 시간은 오전, 오후, 밤의 구분 내지 어제, 오늘, 내일의 구분 없이 하나의 덩어리가 된 부동의 물질처럼 제시된다. 공간의 안과 밖이 연출적으로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지만 그 공간의 경계마저도 시간의 지표를 형성해주지는 못하여 연극의 순간순간들은 거듭 방향을 잃고 공간 속을 떠돌고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북촌방향>에서 마주했던 시간의 덩어리, 단지 낭자한 술기운 속을 표류하며 방향을 잃어버린 시간의 덩어리를 보는 듯하다.

 

하여 존재들은 그 시간 속에 고여 정박 당한 채로 서 있거나 탈색된 채로 걷는 느낌이다. 시종 겨울의 냄새와 공기를 자아내며 이미 얼어붙어 있기에 미동의 표정 변화도 없는 혜수, 그리고 어디에서든 부차적인 삶을 지속시켜 살아내는 것이 가능하게끔 설정된 지인은 각각 그 정박됨과 탈색됨을 대표하는 인물로 다가온다. 체홉의 인물들에게서 느꼈던 어떤 기질들이 보다 특정화된 기질로서 그려진 인물들을 보니 그들의 세계가 보다 허망함이라는 에너지에 집중되어 보인다. 누군가에게 내재해 있는 어떠한 기질들이 그저 시간의 지나침 속에 묻혀갈 때, 그래서 누군가의 것이라 하더라도 온전히 그 누군가의 것이 되지 않을 때, 그러한 기질마저 시간을 살아낼 수 있는 존재들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누군가들이 어떤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으로 각인이 되는 순간 암묵적이었던 쓸쓸함은 보다 확정적인 외로움, 보다 확정적인 힘듦, 보다 확정적인 슬픔으로 정착되고 그 누군가가 설 땅은 정말로 소실되어 버리는 눈앞의 결과로 느껴진다.

 

그런데 이 허망함은 생생함의 반대급부적 열망이기도 하다. 그래서 체홉의 원작에서는 애상에 젖을 뿐 결코 쏟아내어질 수 없는 눈물이 이 연극을 보면서 터져 나오기도 한다. ‘모든 것은 확률’이라는 과학적 진리에 맞서서 그래도 ‘지켜야 할 것은 있는 것이잖아’라고 호소하며 몸을 떠는 바냐의 모습에 함께 울 수 있었던 것은 이 연극이 주는 허망감의 이면에 진실함이라는 그림자 값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시간의 문제이다. 체홉의 시간은 고여 있는 것 속에 한 줄기 지나가는 바람이다. 그래서 존재들도 지나갈 무언가로 스러질 것 같으나 그 스러짐 역시 지나갈 무언가가 될 것이라는, 관조가 있다. 그런데 연극은 시간을 붙들어 그 속에서 부수어지는 존재의 힘없는 스러짐을 힘 있게 고발한다.

 

 

숨 쉴 수 있는 틈새

숨 쉴 수 있는 틈새, 관극을 하는 내내 이것을 찾으려 애썼다. 단지 이 연극에 대한 바램이 아니라 연극 무대 위에, 아니 우리의 삶 속에 고스란히 존재하는 저 존재들의 생존 가능성을 위해서 말이다.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 흔들리는 허름한 땅 위에서 멈추어질 수 없는 시간을 흐르게 할까, 어떻게 하면 그 시간의 흐름 안에서 저 존재들을 저 땅 위에 고여 있지 않게 하면서도 살 수 있게 할까, 이 연극 역시 체홉의 희곡처럼 누군가들에게 과거가 되어야만 관조할 수 있는 세계상으로 호흡하며 내다 볼 수 있게 될까, 그렇게 생각하면 원작과 이 연극 사이의 괴리로 느낀 지점들은 원작과 연극 사이의 괴리가 아니라 그저 과거와 현재 사이의 괴리인가, 즉 과거는 우리가 호흡할 수 있을만한 세계로 내다 볼 수 있었으나 현재는 우리가 호흡할 수 있는 세계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현재 속에서 삶을 지속하되 삶을 붙들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인가. 이를테면 지인과 용우의 대사는 뜻 없이 일치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 뜻 없이 일치하는 영혼의 순간들 같은 것을 내다보는 힘, 이들이 흔들리고 있는 시간 그 너머의 시간, 이들 모두가 다 살아내지 못하고 있는 어떤 시간의 존재를 상상하는 힘 같은 것을 이 연극이 창조할 수 있는 또 다른 ‘사이’의 힘으로 기대하면서 내내 그들의 세계를 응원하며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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