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진의 에세이
브레히트는 古典主義 작가인가? (4)
글_이재진 (단국대 명예교수)
아리스토텔레스와 브레히트
플라톤은 철학만이 논리를 통해 우주의 조화를 파악하고 정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산문형식을 선호한 스승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사문학보다는 모방의 예술 즉 연극(비극)에 더 비중을 두었다. [시학](poetic. 대략 기원전 335년)은 예술론(문예론)에 관한 강의서이다. 1, 2부로 되어 있었으나 1부만 전해오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정한 시간 내에(24~48시간), 단일 사건을, 한 곳에서 다뤄야 한다는 시간, 사건, 장소의 단일성을 요구하는 소위 비극의 ‘삼일치법칙’(classical unities)을 규정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극이 끝나면 사건은 완전히 마무리가 되어있는 닫힌 결말을 요구하고, 막이 내리면 “관객에게 애통함과 두려움을 심어주어 감정의 순화(katharsis)를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시학](6장)에서 비극을 정의내리고 있다. [시학]에는 시간(5장)이나 사건(23장)에 관한 제한이나 규정은 설명해 놓고 있으나 장소에 대한 언급은 없다. 장소의 제한은 르네상스시대의 산물이다. 프랑스 연극은 이를 적극 수용하였다. 무엇보다 화려하고 복잡한 바로크 연극에서 무대장치를 전환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막이 바뀌었지만 무대장치는 전환할 필요가 없을 때에 한해 예외적으로 이 장소의 법칙을 무시해도 된다고 코르네이유(Pierre Corneille)는 이를 분석한 논문(1660)에서 예외를 인정했다. 셰익스피어는 이런 법칙을 무시했다. 독일 극작가들은 프랑스 고전비극에서 셰익스피어로 전향하면서 이 법칙의 굴레를 뛰어넘는다. 이 후 프랑스의 연극전통에 예속되어 있던 독일은 연극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프랑스의 틀에서 벗어나게 된다.
브레히트는 자신의 서사극을 초기에 비(非)아리스토텔레스적 연극이라 했다. 이 개념은 너무나 일반적이라 만년에는 변증법적 극이라 불렀다. 무엇보다 브레히트의 서사극에는 완결된 결말이 없다. 그 보다 카타르시스(katharsis)가 더 문제가 된다. 정통극은 관객을 홀린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바그너의 음악을 브레히트는 아편과 같다고 생각했다. 이런 마약에 걸려 혼미해진 관객을, 닫혀있는 어두운 무대에 “납치된” 관객을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다시 빼내오려 한다. 관객이 혼을 빼앗기지 않도록 무대나 객석에 불을 켜놓고, 심지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관람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그리스 연극에서도 무대전환은 쉽지 않았다. 그러기에 오히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여러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장소의 제한을 두지 않은 이유도 여기 있다. 해설자의 등장, 전령 보고, 망루보고(teichoscopy), 신의 출현(deus ex machina)등 서사문학의 기능을 일부 차용해서 쓰기 때문이다.
해설자의 등장: 그리스극에서는 코러스가 이 기능을 수행한다. 서사문학에서처럼 극속에 개입해서 작중인물의 심리적 변화 등 대사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을 관객에게 전달해 준다. 서사극의 특징이 무엇보다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코카서스의 백묵원]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해설자가 무대 위에 앉아 극의 흐름을 간섭하며 지휘한다. 전령보고: 무대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상황을 관객에게 추후 전달해 주는 기능이다. 요란한 전투장면이라던지, 지진과 같이 거대한 자연재난, 잔인하거나 야한 장면 등. [맥베스] 등 셰익스피어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암피트뤼온](Kleist)의 첫 장면은 일품이다. 그리스 비극이나 프랑스 고전비극에서는 살해장면이 무대에서 직접 일어나면 안된다. 망루보고: 관객이 보지 못하는 다른 공간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실황중계하듯 동시간에 직접 전달하는 기능이다. [한밤의 북소리]에서도 볼 수 있다. 신의 출현: 사건이 해결되지 않고 지지부진 이어가게 될 때 신이 나타나 이를 한 순간에 해결해 준다. 그리스극에서는 아테네나 제우스가 무대 위에 나타나 얽혀있는 매듭을 풀어줄 때가 있다. [오레스테스](Aeschylos), [서푼짜리 오페라](Brecht) 등에서 이 기능을 볼 수 있다.
서사극(epic theatre)이란 글자그대로 서사문학+연극이란 두 매체가 섞여 있음을 말한다. 초기작품 [바알]이나 [한밤의 북소리]는 아직 서사극으로 분류할 수는 없지만 이미 여러 서사적 기능이 나타나 있다.
스파르타쿠스
1차 대전에서 독일 시민은 누구하나 독일이 패한다고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4년이 넘게 끌어오자 점차 지치고 만다. 1918년 10월 해군 수뇌부는 이길 가망도 없는 영국해군과의 교전을 명령한다. 이에 해군장병들은 해상반란을 일으키고 이를 도화선으로 1919년 베를린, 뮌헨을 중심으로 스파르타쿠스 혁명이 일어난다. 잔인하게 진압된다. 빌헬름 II세가 퇴위한다. 결국 독일제국이 무너지고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바뀌고 만다.
브레히트의 [스파르타쿠스]([Spartakus])는 이 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브레히트는 그당시 뮌헨 연극계를 이끌고 있던 포이히트방거를 찾아간다. 포이히트방거는 브레히트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작품을 가지고 나를 찾아오는 젊은 작가들은 대부분 자신의 혼을 온통 불사르며 세상 최고의 작품을 썼노라고 호들갑을 떨지만, 허름한 옷을 입은 이 젊은이는 돈을 벌려고 [스파르타쿠스]를 썼노라고 벽에 붙어 서서 쭈삣 거리며 심한 남서부 사투리로 중얼댔다. … 작품속의 인물들은 거칠고 힘찬 특성 있는 언어를 쓰고 있었다. 책이나 읽고 짜깁기한 생명 없는 그런 언어가 아니었다. 살아있는 서민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생동감 넘치는 그런 언어였다. 작품을 읽어보고 나서 전화를 걸었다. 옷은 허름하게 입었지만 경제사정때문에 이 작품을 썼다는 것이 거짓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받더니 브레히트는 너무 흥분했는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사투리를 써가며 이 작품은 돈 벌려고 썼지만 정말 좋은 작품이 하나 또 있으니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브레히트가 자랑스레 내세우는 그 작품은 [바알](Baal. 1917)이었다.
한밤의 북소리
1차 대전이 끝나고 정치적으로 급변하는 이 시기에 혁명을 내세우며 뜨거운 구호를 외치는 연극이 유행이었다. [스파르타쿠스]는 하지만 혁명극이 아니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극이 진행되지만, 혁명의 주체인 프롤레타리아트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베를린 혁명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그 당시 브레히트는 베를린을 전혀 몰랐다. 신문에 실린 기사를 통해 전령보고형식으로 구성했다. 베를린 혁명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실은 바이에른 지역에 뿌리를 둔 민중극인 것이다.
주인공 크라글러는 아프리카 전선에서 싸우다가 포로가 되고, 실종되었다가 4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사랑하던 여인은 그 사이 다른 남자의 약혼녀가 되어 그 남자의 아이를 배고 있다. 주위 사람들은 전쟁에서 돌아온,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진 주인공이 응당 혁명의 소용돌이에 뛰어들리라 기대하고 그리 종용한다. 하지만 크라글러는 혁명투사가 아니라, 자기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이상적인 구호에 등을 돌리는 이기주의자이다. 게거품을 입에 품고 새로운 인간형을 찾아 부르짖는 표현주의 연극의 주인공은 아니다. 이 작품의 주제인 혁명은 배경이고 장식품이다. 요란한 언어가 활개치도록 판을 벌여주고 있다. 혁명보다는 극적인 장면이 언어의 힘을 빌려 더욱 강하게 관객에게 다가간다. 새로운 인간형을 부르짖는 표현주의의 양식과 구호에 편승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인공은 표현주의 표현양식에 어울리게 소리친다. 표현주의란 토양에서 싹튼 초기 작품들은 이미 서사극적 영양분을 먹으며 자라고 있었다. 브레히트는 표현주의 연극의 형식을 빌려오지만 동시에 그 한계를 뛰어넘고자 서사극적 연극에 눈을 뜬다. 종업원도 시적으로 말을 하고 술집주인은 매우 철학적이다.
크라글러는 기분 나쁘게 웃으며 북을 쳐댄다: “이건 흔한 싸구려 연극이야!” 객석에 손가락질을 해대며 악을 쓴다: “그렇게 낭만적으로 넋 놓고 쳐다보지들 마시요!” 이 대사를 플래카드에 크게 써서 객석에 세워놓으라고 브레히트는 제안했다. 주인공은 끊임없이 객석에게 욕을 퍼붓는다. “당신들 파렴치한 인간들!” 질식할 정도로 시원하게 웃는다. “당신들 피에 굶주린 겁쟁이들!” 웃음이 목에 걸려 더는 웃지도 못한다. 계속 북을 처댄다. 이리저리 비틀거린다. 가로등처럼 비추고 있던 종이로 된 달을 향해 북을 던진다. 북과 달은 강바닥에 떨어진다. 강물에는 물이 없다. “술에 취하는 것이나 유치한 것은 매 한 가지야!” 이 작품에서 주인공 크라글러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새로운 세상인가 아니면 각시인가, 침대인가 아니면 이념인가! 혁명을 등진 주인공에게 남은 것은 커다랗고 하얗고 넓은 침대뿐이다. ”나는 개돼지다! 이 개돼지는 침대로 간다!“ 크라글라가 망가진 각시를 데리고 침대로 가면서 극은 끝난다.
젊은 극작가의 등장
브레히트가 극작가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스승은 누구보다도 포이히트방거와 연극비평가 이어링(Herbert Ihering. 1888-1977)이었다. 이어링은 브레히트의 첫 작품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비평해 주었다. 브레히트라는 젊은 극작가의 탄생을 축하해 줌은 물론, 젊은 극작가에게 최고의 영예이기도한 “클라이스트 상”(Kleist-Preis)을 받도록 추천해 주었다.
스물네 살의 베르트 브레히트라는 젊은 극작가가 하룻밤 사이에 독일희곡문학의 양상을 바꾸어 놓았다. … 브레히트를 통해 새로운 음색이, 새로운 가락이, 새로운 비전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 브레히트를 맨 처음 무대에 올린 것은 뮌헨 극장의 연극사적 공헌이 아닐 수 없다.
이어링은 [한밤의 북소리]의 공연을 보고 연극사에 그 예를 보기 힘들 정도로 극찬하였다. 이 보다 더 뜨겁고 더 호의적인 연극비평을 나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아마 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이어링 외에 또 한 사람이 브레히트의 연극세계를 늘 뜨겁게 비평하였으니!
*본 기사의 띄어쓰기와 맞춤법은 필자의 주장에 따라 국립국어원의 규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나중에 책으로 펴내실 경우를 대비해서 눈에 걸리는 부분을 말씀드립니다.
..
북소리를 하지만 브레히트는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독일어 문장을 읽는 기분입니다.
코르네이유 > 코르네유
크라글라가 망가진 각시를 데리고 > 크라글러..
신의 출현: 사건이 해결되지 않고 지지부진 이어가게 될 때 신이 나타나 이를 한 순간에 해결해 준다… 신뿐 아니라 영웅이나 사자도 등장하지 않나요? 가령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에서 헤라클레스의 등장
계속 북을 처댄다. > 쳐댄다
(띄어쓰기 지적은 생략)
“신의 출현”을 굳이 영어로 번역하자면, “god from the machine”입니다. 그리스 극장의 무대(skene)위에는 기중기 같은 기계장비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신들은 이곳을 통해 등퇴장합니다. 사건이 꼬이고 풀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신들이 이 기계를 타고 나타나면 사건이 쉽게 해결됩니다.
계속 복수로 이어지는 [Orestes] (Aeschylus)에서는 아테네 여신이, [Amphitryon] (Plautus/Molière/Kleist)에서는 제우스가 사건을 마무리 해줍니다. 특히 클라이스트의 작품에서 진퇴양난에 빠진 여주인공은 세 번이나 “아~!”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알크메네가 놀라고, 난처하고, 안도의 순간에 내지르는 이 세 번의 신음소리는 희곡사에서 길이 빛나고 있습니다.
점차 해결의 주체는 신에서 왕이나 영웅, 심지어 경이적인 사건으로 바뀝니다. 예를들어 [서푼짜리 오페라}에서는 왕이 전령을 보내 사형직전의 주인공을 구해줍니다. 영화나 소설에서도 극적반전이 이루어질 때 이 용어를 사용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브레히트로 이어지는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삼일치법칙
브레히트는 새로운 비전과 새로운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