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세계와 질문, 그 앞에 놓인 연인
연극 <렁스>
글_ 박수현
원작 던컨 맥밀란
번역 이단비
연출 박소영
제작 ㈜연극열전
장소 대학로 아트원시어터 2관
일시 2020.05.09 ~ 2020.07.05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길 원한다. 그 사실은 고대 그리스부터 이어진 고민으로 알 수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칸트까지. 인간은 ‘좋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해왔다. 그런 노력과 달리 현재 사회를 ‘좋은 사회’라고 답하기는 어렵다. 세계에는 너무 많은 갈등이 존재하고, 타협과 존중은 찾아보기 어렵다. 게다가 인간의 힘으로는 통제 불가능한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다. 홀로 살 수 없는 인간은 이런 다양한 문제에 엮일 수밖에 없다. 고대 그리스와 달리 수많은 이해와 모순들이 엉켜 있는 지금,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렁스>는 플라톤과 칸트, 수많은 철학자가 한 질문을 21세기에 다시 묻는 연극이다.
비움을 통해 채워지는 집중력
극을 이루는 것은 한 연인의 대화가 전부다. 연인 사이인 여자와 남자는 서로의 이름도 부르지 않기 때문에 이 극에서는 인물들의 이름도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소품이나 특별한 조명 같은 무대 장치도 전혀 없다. 하얀 단상 위의 배우 두 명만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때문에 장소에 대한 힌트를 얻기도 어렵다. 극이 시작하고 난 후, 다툼 끝에 여자가 “여기 이케아잖아!”라는 대사를 뱉고 나서야 이들이 발 딛고 있는 곳의 정체를 알게 된다. 연극을 관람할 때, 무대 위 소품과 조명을 통해 우리는 ‘다른 세계’에 진입하게 됐다는 것을 깨닫고 극에 몰입한다. 하얀 단상과 인물 두 명은 극 초반 빠른 몰입을 이끌어내기엔 부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아무것도 없는 무대가 오히려 집중력을 높인다. 아무런 정보도 주어지지 않는 무대 환경 속에서 관객은 이들의 대화에 더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극은 식사 중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식탁을 놓고, 접시를 드는 대신 대화 사이 추임새처럼 “어, 나 이것 좀 먹을게?”와 같은 말을 툭 던져 상황을 알려 준다. 설명적이기보다 자연스럽고 현실적인 대사들은 상황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관객들의 몰입을 깨지 않고 더욱 깊어지게 만든다. 조명과 분장도 없이 단 몇 마디의 대사만으로 몇십 년이 흘렀다는 것을 보여주는 <렁스>는 ‘덜어냄’을 통해 오히려 몰입도를 높인 작품이다.
짧은 콘텐츠에 익숙해지는 시대에서 타인의 말에 100분이나 집중하는 건 쉽지 않다. 아니, 무척 어렵기까지 하다. 이런 모습은 무대 위 두 인물에게서도 나타난다. 심오한 대화를 하다가도 상대방의 말을 끊고 뜬금없는 질문을 하는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퍽 닮았다. <렁스>는 무대 위 장치를 과감하게 없앤 대신, 그 자리에 아주 구체적인 생활 모습을 담았다. 그래서 어느새 관객은 자신과 너무도 닮은, 그래서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연인에게 몰입하게 된다.
넓은 무대에서 작은 신발들이 말해주는 것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무대 위에도 하나의 장치가 생긴다. 바로 신발이다. 갈등을 겪거나 좌절할 때마다 인물들은 신발을 벗어 무대 앞쪽에 가지런히 놓아둔다. ‘무(無)’였던 무대 위에 하나둘 남겨지는 신발들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걸까?
극의 초반 커플 운동화를 신은 연인은 ‘아이’와 ‘결혼’이라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커플들에게 지극히 흔한 문제를 가지고 다투게 된다. 인구 증가로 인해 식량이 부족해지고, 숲이 없어지고, 날로 더워지는 지구와 이산화탄소 1만 톤을 배출할 새 생명. 이런 거대한 문제 앞에서 여자와 남자는 작은 ‘개인’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자꾸만 싸우고 무너지고, 심지어 해답도 찾지 못한다. 이런 싸움을 지나며 여자와 남자는 운동화를 구두로 갈아신고, 구두를 벗어 맨발로 무대를 걷기도 한다. 유산을 겪은 뒤, 누구보다 신중하던 남자가 예상치 못한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돼서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졌다고 말한다. 이런 모습은 맨발 같은 인간의 나약한 면모를 보여준다.
연인의 질문처럼 작고, 아무런 뜻도 없어 보이던 신발들은 극에 다다르자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사건이 벌어지고 끝날 때마다 하나둘 놓이던 신발들이 어느새 개별적인 위치가 아닌, 하나의 열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발의 앞 코는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 오랜 고민 끝에 결정한 임신이 유산으로 이어지자, 견고한 줄 알았던 이들의 가치관이 무너진다. 심지어 좌절하며 자신들의 생각과 질문이 쓸데없었다고 느끼기까지 한다. 즉, 두 인물의 치열한 질문과 생각들은 그 당시에는 쓸모와 의미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질문이 거듭될 때, 나란히 이어진 신발들처럼 하나의 길이 되어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이런 질문들이 우리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줄 거야”라는 대사는 극을 관통한다. 즉, 좋은 사람은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 촘촘하고 작은 질문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당시에는 의미 없다고 느꼈던 대화도 결국 좋은 사람이라는 곳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좋은 사람은 ‘되어가는’ 거니까.
두 연인이 극 초반에서 말하는 좋은 사람은 지구 환경, 평등 같은 큰 개념을 담고 있는 데다가 운전하지 않기, 수입 아보카도 먹지 않기, 아이가 만드는 탄소량 생각하기 등 다소 지키기 어려운 일까지 해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그들은 자신이 낳은 아이가 지구를 바꿀 것이고, 지금의 위기를 극복한 지구를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이런 기대를 생각하면 <렁스>의 결말은 다소 슬퍼 보일지도 모른다. 지구의 상황은 더 악화됐고, 아이는 부모에게 많은 사랑을 쏟지 않았다.
하지만 관객들에게 여자와 남자는 이미 좋은 사람으로 느껴진다. 대단치 않고, 지구부터 시작된 고민이 그들의 작은 생활로 좁혀지고, 수많은 대화 끝에도 결국 답은 찾지 못했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쩐지 우리는 지구의 불평등과 환경, 자연재해보다는 사랑 다툼이라는 작은 위기들을 극복하는 모습에서 위로를 받는다. <렁스>가 뜻하는 바가 이 점에 담겨 있지 않을까?
세계는 너무 크고, 우리는 작은 존재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요즘처럼 통제할 수 없는 일로 인해 인간은 자주 좌절하고 무너질 수밖에 없다. 실패를 겪을 때마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렁스>는 우리에게 말한다.
“너무 좌절하지 말라. 끝내 답을 찾지 못한 희미한 순간들도, 좌절이 남긴 얼룩마저도 당신을 좋은 사람이 되어가게 하고 있으니.”
좋은 연극과 좋은 글
둘 다 넘 멋져요
넘 멋쪄요
글 읽고 연극이 보고싶어졌어요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