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을 가르치는 일
이연심(무학여자고등학교 교사)
학창 시절 나의 글씨체는
좋아하는 선생님에 따라 여러 번 바뀌었다.
누가 봐도 선생님을 흉내내고 있었다.
요즈음은 손 글씨를 볼 일이 참 많지 않다. 학교에서 근무하다보면 예쁜 글씨체를 가진 학생은 한 번 더 쳐다보게 된다. ‘모습도 글씨만큼 예쁠까?’ 잠깐이나마 그런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글씨체는 쓰는 사람의 양식과 품격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하니 빗나간 기대는 아닌 듯하다.
학창 시절 나의 글씨체는 좋아하는 선생님에 따라 여러 번 바뀌었다. 담임 선생님을 따라 동글동글하게 썼다가 과학 선생님을 따라 길쭉길쭉 비스듬하게 썼다가 마지막엔 가정 선생님을 따라 무늬글씨를 쓰기도 했다. 그분들의 양식과 품격을 닮고 싶었는지는 장담할 수 없으나 분명 선생님을 흉내내고 있었다.
왠 글씨체 타령이냐고?
조금은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한번쯤은 이 교육 섹션에서 소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우리 스스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서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 참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
참 어려운 일이다. 때론 종잡을 수가 없다. 중요하다고 목이 터져라 설명해도 듣는 둥 마는 둥하다 영락없이 “그게 뭐예요?”김빠지는 질문을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눈썰미 좋은 녀석들은 어느새 선생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다. 또 어떤 때는 이런 것은 몰랐으면 좋겠다 싶은 것도 귀신같이 터득하기도 한다.
그래서 씁쓸하다. 아이들은 가르치는 학문이나 지식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을 본다. 달을 보라 했더니 손가락을 보는 식이다. 생각해 보니 나도 그랬다. 영어 선생님이 발음기호 [v]를 발음을 할 때 입술이 어떤 모양인지 잘 보라고 하셨는데 중학생인 나는 그 붉게 반들거리는 입술이 너무 부러워 입술 색깔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 동안 선생님의 입술처럼 반들거리게 한다며 혀를 낼름거리며 침을 바르는 버릇이 생겼었다.
조금의 억지를 섞어 말하면 교사는 지식 그 자체여야 한다.
그래서였을까?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가르침 자체보다 가르치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1)고 했고, 오우크쇼트(Oakeshott)가 “교사는 교육내용의 구현체”2)여야 한다고 했다. 이제는 이렇게 말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이들의 주장인즉슨 아이들은 교사를 통해서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내면화한 교사를 배운다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조금의 억지를 섞어 말하면 교사는 지식 그 자체여야 한다는 얘기인데, 참으로 부담스러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어디 교사에게만 적용되는 말이겠는가? 소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연극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의 경우는 더더욱 부담감이 크다.
연극이라는 것이 표현의 도구와 예술의 대상이 구분이 되지 않는 특성이 있으니 연극을 가르치는 사람이 연극지식 그자체여야 한다는 말은 참 헷갈린다. 그러니까 연극을 공부하는 아이들은 가르치는 사람을 보고 연극의 표현수단인 말과 몸의 표현을 배운다는 것 아닌가? 연극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이 보다 더 무서운 말이 있을까? 내가 하는 말과 몸짓은 그 자체로 학생들이 배워야 할 ‘말의 표현’과 ‘몸의 표현’이라는 것이니 말이다.
가르치는 사람의 말과 동작은 결코 일상과 분리되지 않으니
교육활동이 일어나는 어느 순간 뿐 만아니라 삶의 한 단면으로
늘 아이들에게 배우가 갖추어야 할
말의 표현기술과 몸의 표현기술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연극의 표현수단은 대사와 동작. 즉 배우의 말과 몸짓이며, 연극을 배우는 아이들에게 있어 말의 표현과 몸의 표현은 연극 선생님의 말과 동작을 통해서 전달된다. 연극 선생님이 교육을 하는 동안에 보여주는 말과 동작은 교육의 내용이자 수단이 되며, 학생들은 선생님의 말과 동작을 통해 자신이 배워야 하는 대상인 말과 동작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연기 시범을 보이는 동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선생님의 말과 동작은 결코 일상과 분리되지 않으니 교육활동이 일어나는 어느 순간 뿐 만아니라 일상의 모든 순간 아이들에게 배우가 갖추어야 할 말의 표현기술과 몸의 표현기술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연극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은 누구나 아이들이 배워야 할 정확한 말과 동작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일상화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연극 교사이든 예술 강사이든 대학 교수이든 여기서 예외는 없다. 배우의 몸과 말이 표현의 도구이자 예술의 대상이 되는 독특한 특성이 연극교육 현장에까지 확장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기야 ‘연극’을 가르치는 일이니 그 본질적 특성이 확장되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그러니 연극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자신의 말과 동작이 곧 교과서란 생각을 하며 다듬고 훈련하여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내면화라고 한다. 그러니까 오우크쇼트의 말처럼 아이들이 배워야 할 교육내용의 구현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가르치는 사람이 평소에 저지르는 말과 동작의 오류를 아이들에게서 똑같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휴지’, ‘억양’, ‘자세의 중립’ 등은
교과서를 수없이 읽는다고 하여 터득되는 것이 아니다.
수없이 성경구절을 입에 올린다고 하여 종교적 심성이 생기지 않는 것처럼, 활자에 박혀 있는 ‘휴지’, ‘억양’, ‘자세의 중립’ 등은 교과서를 수없이 읽는다고 하여 터득되는 것이 아니다. 활자 속에 갇혀 있는 지식은 죽어있는 지식이고 아직 완전하지 않는 지식이다. 가르치는 사람을 통해 비로소 살아있는 말이 되고 동작이 되어 아이들에게 전달된다. 정확하게 말하고 움직이는 방법을 학습하기 위해서 아이들이 책속의 지식에 가까이 가는 것보다, 지식을 익힌 선생님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 더 빠르고 정확하다. 그러니깐 연극을 가르치는 사람은 최선을 다해서 아이들에게 말하고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연극을 가르치는 일은 다른 어떤 것을 가르치는 일보다 어렵고 조심스럽다. 그러니까 더 신중해야 하는 것이고…….
1)Kierkegaard, S.,『Training in Christinity』, 임춘갑 역, 『그리스도교의 훈련』, (서울: 다산글방, 2005), 188쪽.
2)김광민,「교과교육과 간접전달」, <도덕교육연구>22(2, 2011), 193-215쪽 중 203쪽.
*참고문헌
김광민,「교과교육과 간접전달」, <도덕교육연구>22(2, 2011), 193-215쪽
Kierkegaard, S.,『Training in Christinity』, 임춘갑 역, 『그리스도교의 훈련』, (서울: 다산글방,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