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우린 모두가 이방인이 아닐까?
<아라베스크>
장윤정(연극평론가)
작·연출 : 최진아
출연 : 이준영, 송치훈, 박다미, 알도사리 압둘라
제작 : 극단 놀땅
공연장소 : 삼일로창고극장
공연기간 : 2020. 7. 31. ~ 2020. 8. 9.
2018년 5월, 484명의 예멘 국적 난민들이 제주도에 무비자 입국을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이내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아직 아랍권 난민을 단기에 다수 수용해본 전례가 없는 한국으로선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이었다. 정치권에선 수많은 경우의 수를 놓고 계산하기 시작했다. 국내 여론을 등지지 않으면서도 UN 인권협약에 벗어나지 않을, 세계에 선진국으로서의 인권의식을 보여줄 답을 찾아야만 했다. 이해관계에 따른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 사이에서 약 2년이 흘렀다. 결국, 현재까지 2명이 난민으로 인정을 받았고, 412명은 인도적 체류허가를 받았다. 그 외 70명은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거나 난민신청을 철회한 상황이다. 그동안 ‘난민’은 한국에서 유의미한 화두가 아니었다. 특히, 아랍인들을 대상으로는 더욱 그러하다. 지리적으로 가깝지 않은 위치기에 주로 유럽권역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유럽의 경우, 난민이 발생하는 데에 근거를 제공한 책임이 있는 처지기도 했다. 그러니 먼 여정을 돌아 굳이 동아시아, 그중에서도 한국으로 아랍지역 난민들이 입국하는 것은 드문 경우였다. 그러나 점차 유럽 각국에서 지속하여 증가하는 난민들을 다 소화해내지 못하고 빗장을 걸어 잠그기 시작하자 아랍지역 난민들은 다소 입국이 손쉬운 제주도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리고 이 지점은 뜻하지 않게 우리에게 ‘인권’과 ‘공동체’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맞닥뜨리게 했다. <아라베스크>는 이 지점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라베스크>는 제주도에 도착한 무비자 입국 예멘 난민 마흐무드의 난민신청 심사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마흐무드는 조사관과 보조관 통역원에게 자신이 난민임을 호소하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그가 난민임을 ‘증명’해내길 요구한다. 전체 서사는 실제 사실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공간은 주로 조사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만큼 작품은 난민임을 확인해야 하는 자들과 난민임을 입증해야 하는 사람 간의 첨예한 대화로 채워져 있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난민’의 정의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되고, ‘서류’가 ‘존재’를 대신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목격하게 된다. 마흐무드는 본국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피해 온 인물이다. 그러나 난민이란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집단 신분,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박해받는 사람’으로 정의되고 있기에, 그 속에 ‘전쟁’이란 단어가 없는 이상 마흐무드의 사례는 ‘난민’으로 인정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게다가 먼 여정을 거쳐 성공적으로 입국하기 위해서 그는 위조 신분증을 사용했다. 이런 지점들은 마흐무드를 신뢰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사관은 현상 이면의 진실을 찾고자 노력한다. 마흐무드에겐 ‘특수한 환경’이라는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낯선 이에 대한 불신과 인권존중이라는 대의 사이에서, 마흐무드의 모든 운명은 다음 심사관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심사관은 마흐무드라는 ‘인간존재’를 ‘서류’로써 판단하게 된다. 마흐무드에게 남은 것은 ‘우편’으로 올 결과지였다.
<아라베스크>는 마치 낯선 세계 속으로의 초대와 같다. 공연이 시작되면 무대 벽면에 아랍과 관련된 영상이 영사된다. 극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때때로 아랍 문화 영상이 벽면에 등장하고, 동시에 아랍 음악 혹은 아랍어가 스피커에서 송출된다. 무대에 등장한 마흐무드는 실제 아랍인으로서 주로 한국어가 아닌 아랍어로 발화한다. 극장은 관객에게 낯선 시공간으로 존재하게 되며, 배우의 대사를 자막으로 이해하는 것에 관객은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사실 이 지점은, 극의 형식에서부터 낯선 존재와의 조우를 관객이 몸소 체험하게끔 하는 의도된 형태로 읽힌다. 그것은 신비할 수도, 불편할 수도, 핍진한 현실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주체와 타자의 위치 전복을 경험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극중에서 이방인은 마흐무드로 의미 되지만, 사실 작품이 진행되는 내내 이방인의 위치에 존재하게 되는 것은 관객이다. 작품의 중심인물이 자신만의 고유한 문화권으로 발화하고 있기에, 관객은 자국민으로서 한국 사회에서는 감지하지 못했던 배제와 불편함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이 낯선 세계는 역설적으로 닫힘과 동시에 열림을 경험하게도 만든다. ‘아라베스크’라는 단어가 그것을 상징한다. 아라베스크는 아랍의 고유한 문양으로서 낯선 문화인 동시에 아름다운 예술로 받아들여지는데, 그 기하학적 무늬는 관람자에게 판타지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 지점을 잘 드러내는 장면이, 현실에선 서로 간극이 큰 인물들 모두가 환상 속에서 함께 수피 춤을 추는 순간이다. 독특한 조명 양식이 등장하고 아랍 음악이 들려오며 수피 춤을 추는 인물들 앞에서 관객은 순간적으로 낯선 세계가 지닌 마법 같은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된다. 환상적인 이 장면에서 인물들 간의 ‘공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며, 그것은 낯선 문화에 대한 이해의 가능성으로 남았다.
작품은 예멘의 내전 상황이 비단 우리와 무관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설명한다. 예멘 내전에 한국 무기가 등장한 것이다. 국내의 무기산업이 아랍지역에까지 영역을 확장하여, 우리 또한 이 전쟁에 책임이 있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와 함께 ‘순수성’에 대한 ‘환상’과 ‘폭력’을 사유하게 한다. 작품에서 줄곧 등장하는 것이 ‘순수한’ 난민, ‘깨끗’한 제주도, ‘난민신청자다움’, ‘진짜’ 난민이란 단어다. 그러나 사실 순수함은 폭력을 조장하는데, 오염되지 않기 위해 경계 짓고 배제하며 폭력을 일으킨다. 이 지점은 ‘순수한 공동체’라는 화두로 환원된다. 그리고 그 믿음이 허상임을 작품은 조사관과 보조관의 대화에서 보여준다. 보조관은 짧은 계약직을 끝으로 퇴사하게 되는데, 그것을 두고 조사관은 ‘스펙’이 되지 못하기에 당연한 결과임을 언급한다. 소위 순수한 공동체로 일컬어지는 곳에서도 배제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이 순수함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 짓고 진짜에 선의 미덕을 부여하곤 한다. 미디어를 통해 통용되던 난민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마흐무드를 ‘가짜’ 난민으로 일컫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난민이란 시혜를 베풀 대상이라는 고정적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방인과 비 이방인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위계를 확인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중동’이란 단어가 지리적으로 미국에서의 동쪽이라는 의미기에 ‘아랍’이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는 대사에서,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작품의 관점이 명징해진다. 이방인과 비 이방인은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위치를 전복해보면 우린 이미 비 이방인인 동시에 이방인이다. 그렇기에 작품은 무하마드로 상징되는 ‘이방인’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과연 우리는 서로를 판단하고 분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사실 극중에서 통역관을 비롯한 인물들이 무하마드를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해결되지 못한 국내문제들도 즐비한 상황에 과연 낯선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한 반문은 어느 정도 타당하기 때문이다. 자국민의 안전을 보장해야 하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지점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입장에도 설득력이 있다. 덕분에 관객은 난민 입국에 대해 마냥 감성적으로 접근하지 않게 된다. 나아가 누구든 삶의 터전에서 해당 사회 속 문화에 융화되어야 안정적으로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으므로, 무하마드 또한 한국문화를 일정 부분 수용해야 한다는 부분에서 수긍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 이 지점은 예멘인들에겐 ‘정체성’과 관련된 부분이기에 변화를 요구하기가 쉽지 않다. 예멘인들에게 종교는 곧 역사다. 그것은 민족성과도 연관된다. 그렇기에 종교와 관련한 지점에서 요구되는 변화는 곧 그들의 정체성을 변화시켜야 함을 뜻한다. 문화의 충돌이 예상되는 지점이다. 이방인과의 조우, 서로의 세계가 무너지고 서로의 공동체에 편입되는 것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님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관객에게 틈틈이 아랍의 언어와 음악과 영상을 노출함으로써, 불안은 어쩌면 서로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화두를 던졌다. 그렇게 극장 속 낯선 세계와의 만남은 더딘 변화를 이끄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