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평론] 2012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연극 공연/ 김향

 익숙한 관극 체험 속 낯선 풍경 찾기
– 2012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연극 공연들을 보고-

김 향(연극평론가)

 

1. 자기만족적 안주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연극
올해 열린 서울국제공연예술제(2012.10.5.~10.27.)에 출품된 국내·외 연극 아홉 편은 거의 일률적이라 할 만큼 연극, 무용, 미술(전시), 음악, 영상 미디어가 혼합된 포스트드라마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올해만 ‘포스트드라마’가 강세였던 것은 아니고 12년 동안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 출품된 작품들은 국내·외 포스트드라마들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올해는 초청 작품 수가 줄어들면서 장르 융합적인 공연에 치중한 초청 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포스트드라마에서 주안점을 둘 것은 전통적인 극적 관례를 뒤엎는 포스트드라마가 성행할 수밖에 없는 사회문화적 배경과 예술가들의 전위적인 문제의식일 것이다. ‘포스트드라마(Postdrama)’ 개념을 설명할 때 한 측면에서 정의되는 것이 ‘자기만족적 안주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연극’이듯이, 이 공연들이 과연 이 사회의 문제에 대해 ‘깨어 있는 발언’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할 듯하다.

2012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 출품된 해외연극 <(아)폴로니아>(Krzysztof Warlikowski 연출), <사랑을 끝내다>(Pascal Rambert 연출), <오디세이>(Krzysztof Garbaczewski 연출), <거리에서>(one step at a time like this 연출), <나, 로뎅>(Mihai Maniutiu 연출)과 국내연극 <내가 그랬다고 너는 말하지 못한다>(배요섭 연출), <베르나르다>(원영오 연출), <트루 러브>(이곤 연출), <숨겨진 시간들>(유랑축제, 윤종연 예술감독)은 각기 다른 특색을 지닌 공연들이었지만 <사랑을 끝내다>, <거리에서>와 <숨겨진 시간들>을 제외하고는 그리스 신화, 비극, 서사시, 셰익스피어 비극, 스페인 고전 등을 통해 인류사에서 반복되고 있는 정치·사회·문화적 폭력을 재인식시키는 작품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을 끝내다>는 남녀 대사만으로 이루어진 포스트드라마로 1부는 남자(Stanislas Nordey) 배우의 대사만으로, 2부는 여자(Audrey Bonnet) 배우의 대사만으로 구성되는 상황극이었고 <거리에서>는 동시대 핫 트랜드라 할 수 있는 사이트 스페시픽(Site Specific) 연극이라 할 수 있으며 <숨겨진 시간들>은 극단 몸꼴, 극단 서울괴담, 독립예술프로젝트, 마린보이, 예술불꽃 화(花火)랑, 유성희, 프로젝트 날다, 프로젝트 잠상 단체들이 ‘바퀴벌레’를 모티브로 대학로 거리 곳곳에서 공연을 펼치는 야외공연이었다. 이러한 연극 공연들 외에 나는 음악과 무용, 그림(및 영상 미디어)과 무용의 융합을 통한 공감각적 경험을 추구하는 <시로쿠로>(Tomoko Mukaiyama, Nichole Beutler 컨셉)와 <공감각적 대화>(주정민 작업)를 관람하였는데, 각각 피아노 연주와 움직임, 몸의 움직임과 컬러 실험을 통한 감각들 간의 대화를 추구하는 공연들이었다. 이 작품들을 통해서는, 객석에서 다수의 관객들이 함께 경험하는 집단적 체험이 아닌 주관적·개인적 체험이 확장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사이트 스페시픽이나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나열되는 공연은 관객들에게 고정된 또는 유사한 의미 체험보다는 관객 개개인의 지적 배경과 경험, 상상력에 따라 각기 다르게 해석되고 인식될 수 있는 공연들이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2012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의 연극 공연 모두를 다루기보다는 작품들에 구현된 여배우들의 몸의 언어에 주목하고자 한다. <(아)폴로니아>, <사랑을 끝내다>, <나, 로댕>, <내가 그랬다고 너는 말하지 못한다>, <베르나르다>, <시로쿠로>, <공감각적 대화>에서는 각기 다채롭게 구현되는 여성의 몸, 즉 숭고하게 희생되는 여성의 몸, 욕망의 몸, 주술적인 감성의 몸 그리고 여장 남자 배우의 몸에서 발현되는 젠더적 몸을 이야기할 수 있고 사이트 스페시픽 연극인 <거리에서>를 통해서는 여성인 나 자신이 관객이자 배우가 되어 서울 중심 거리를 걸으며 ‘도시 속의 나’를 탐색했던 관객 체험을 논하려 한다.

 
2. 여성 연기자들의 희생, 광기, 저항의 몸
<(아)폴로니아>는 제목 자체가 19세기 러시아 통치에 저항하는 뜻으로 사용된 폴란드의 여자 이름이다. 연출자 크쥐스토프 바를리코프스키를 비롯한 세 명의 각색자들은 에우리피데스의 <알케스티스>,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한느나 크랄의 <아폴로니아>의 서사를 엮어 ‘사회·정치적 억압의 희생자가 되었던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작품 진행 자체가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무대 전면에 커다랗게 제시하면서 그 인물을 중심으로 극을 바라보도록 하고 있는데, 여성 등장인물로는 아가멤논에 의해 희생된 ‘이피게니아’, 그의 엄마인 ‘클리타임네스트라’, 남편 아드메토스 대신 죽음을 맞이한 ‘알케스티스’, 유태인 어린이 25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아폴로니아’가 있다. 여성 등장인물들은 신화 속, 과거의 인물들이지만 동시대적인 복장을 갖추고 있고 무엇보다 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외양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아버지에 의해 희생되는 이피게니아는 순백색의 드레스를 입고 등장하는데 100미터 달리기를 반복하는 행위를 통해 젊은 여인의 천진난만하면서도 역동적인 몸을 보여준다. 그러나 곧 이피게니아는 자신의 운명을 파악하고 입술에 짙은색 립스틱을 바른 뒤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아가멤논에게 끌려간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극 중 그 어떤 인물들보다 섹시한 여성적 매력을 발산한다. 그녀는 딸 이피게니아를 데려가려는 남편 아가멤논 앞에서 아이들 모두에게 석유를 뿌린 뒤 라이터를 들고 이피게니아의 죽음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항변한다. 그녀의 극단적인 행동은 곧 아가멤논에게 제압 당한다. 이피게니아가 끌려간 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변장을 시도한다. 그녀는 가발과 옷을 최대한 섹시하게 갖춰 입는다. 그녀의 변신은 아이기스토스를 유혹하여 아가멤논을 죽일 모의를 하는 행동을 함축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녀는 아가멤논이 승리의 연설을 하는 사이 깊은 고통과 슬픔의 눈물을 흘린다. 카메라를 통해 무대 전면에 비춰진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심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딸을 잃은 슬픔과 분노, 남편을 향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다고 볼 수 없는 가녀리게 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도발적인 외양과 더불어 그로테스크한 여성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알케스티스와 아폴로니아는 아이를 임신해 일정 정도 배가 부른 임산부 여인으로 등장한다. 남편 대신 죽기를 선택한 알케스티스는 만찬에서 인간의 성적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등 부조리한 극적 행위를 한다. 임신을 했지만 아름다운 그녀는 반복적으로 자신의 방에 들어가 드레스를 갈아입는데 이러한 행위는 죽음을 선택했지만 끊임없이 요동치는 내적인 갈등의 표현으로 여겨진다. 의연하게 웃고 있지만 눈물을 머금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모습은 아버지 없이 남겨질 아이들을 위한 자발적인 죽음이라는 면에서 여성이 지닌 모성의 또 다른 형상화로도 읽힌다. 아폴로니아는 마네킨 인형으로 형상화된 아이들을 돌보는 모습, 무대 한켠에서 강간당하는 장면에서 볼 수 있다. 아폴로니아를 추모하는 모임이 진행되는 가운데 그녀의 아들이 아픈 과거의 기억을 이야기할 때에, 회상 장면처럼 아폴로니아가 무대 후면에서 강간 당하는 장면이 동시에 연출되는 것이다.

이들 여성들은 서로 인과적인 관계가 형성되지는 않지만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해 남성적 질서, 정치적 억압에 희생된 여성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며 또한 여성적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빨간색 립스틱을 통해 섹시한 이미지와 더불어 피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때론 빨간색 립스틱으로 글씨를 쓰면서 여성적 자아를 드러내기도 한다.

<아폴로니아>에서는 여성들의 비극적 죽음 뒤 관객들이 감정이입할 사이 없이 매력적인 여성 보컬 레나테 예트(Renate JETT)와 밴드를 등장시켜 비극적 파토스 대신 유희 어린 정서적 이완을 추구한다. 오십을 넘겼지만 회색의 숏커트 머리에 세련되면서도 남성적인 이미지를 발산하는 레나테 예트는 애절하면서도 역동적인 가창력과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 장악력으로 그녀의 재등장을 고대하게 만들었다. <아폴로니아> 여성들의 몸은 성적인 매력이 넘치고 여성 특유의 가녀린 면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언어가 아닌 감성적 표현을 통해 남성 중심적인 사회·정치적 힘에 저항하고 후세대를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는 숭고한 몸을 지닌 인간으로 형상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을 끝내다>와 <나, 로댕>은 사랑하는 남녀가 사랑하고 헤어지는 상황을 모놀로그에 가까운 대사로, 무용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사랑을 끝내다>의 오드리는 실제 무대에 등장한 여배우의 이름이기도 한데, 그녀는 이별을 선언하는 스탄에게 따지기도 하고 애원하며 매달리기도 하지만 결국 당당하게 이별을 받아들인다. 남자 배우 스탄이 이별을 선언하는 긴 모놀로그에서는 무대 전체에 땀냄새와 침냄새가 진동하는 듯했지만 오드리가 스탄에 맞서 이별을 받아들일 때는 눈물의 냄새가 나는 듯했다. 따뜻한 빛깔의 나무 바닥 위에서 대각선으로 서 있던 연인은 서로의 위치를 맞바꾸며 이별의 대사를 하게 되는데, “분홍색 레이스 의자”만은 자신이 갖겠다는 남자의 그 유치한 애착까지 사랑했던 오드리의 포용력을 경험할 수 있다. 두 시간에 걸친 모놀로그는 지루할 법도 하지만 배우들은 대사의 톤과 리듬, 휴지기, 높고 낮게 몸을 움직이는 완급 조절을 통해 관객들과의 호흡을 만들어 나갔다. 오드리가 남자와 헤어진 이후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추억할 때의 공포에 가까운 고통을 예감하는 장면에서는 동감의 눈물이 흘렀다. 과거와 현재는 물론 그들이 계획했던 미래의 시간까지 사랑하겠다며 이별을 받아들이는 오드리의 버림받은 몸은 그 어떤 몸보다도 당당했고 아름다웠다.

<나, 로댕>은 로댕의 어린 연인 까미유의 나체 댄스로 시선을 사로잡은 작품이다. 까미유는 극 초반부에 중세 시대에서나 입었을 법한 드레스를 입고 등장해 열 여덟 개의 마이크를 무대 안에 들고 들어오는 퍼포먼스를 보인다. 그러나 그 마이크들은 한결같이 까미유의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한다. 로댕이 자신의 사건을 관객에게 설명하는 해설자로 등장한 후 까미유는 금빛 나체의 몸으로 역동적인 춤을 추며 무대로 뛰어든다. 드레스는 다소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소녀적 감수성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나체의 몸은 여성적 욕망에 눈을 뜬 욕망의 감수성의 표현으로 여겨진다. 까미유는 젊고 아름다운 몸으로 로댕을 사로잡고 한동안 두 사람의 정사가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그리고 그녀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로댕의 대사가 나오면서 까미유는 로댕의 대사에 맞서는 몸의 움직임을 강화하기 시작한다. 까미유와 로댕은 각각 춤과 대사로 갈등했다고 볼 수 있다. 까미유 역시 로댕에게 버려진 몸이고 정신병원에서 죽어가는 몸이었지만 무대 위 까미유를 연기하는 에스더 클로엣(Esther Cloet)의 몸은 정열적으로 요동치는 내면의 욕구와 절망, 광기를 강렬하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남성에게 버림받은 오드리와 까미유의 몸은 남성과 대립한다기보다 그 상황에 맞서고 열정과 광기를 표출하는 가운데 이별을 받아들이는, 감성적이면서도 포용력 있고 강인한 내면을 표현하는 몸이었다고 여겨진다.

<내가 그랬다고 너는 말하지 못한다>와 <베르나르다>에서는 여장 남자인 레이디 맥베스와 여성이 되고 싶어하는 게이 남자들을 볼 수 있다. <내가 그랬다고 너는 말하지 못한다>는 남자 광대가 레이디 맥베스 역할을 연기하면서 여성의 내면에 존재하는 남성적 질서를 다스리고자 하는 욕망을 표출한다. 죄의식으로 인해 자멸할 수밖에 없는 양심을 지녔지만 여자 광대가 연기하는 작고 왜소한 맥베스를 자신의 어깨 위에 세워 야심을 불태우게 만드는 등 간접적으로 권좌에 오르는 욕망을 실현한다. <베르나르다> 가문의 넷째딸은 실은 여장 남자이며 그 집의 하녀 역시 여장 남자이다. 이 둘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여성으로 여기며 온전히 여성이 되고픈 욕망과 동시에 남성미가 넘치는 남성을 향한 욕망을 추구한다. 이 둘을 제외한 다섯 여자들의 억압된 욕망은 무대 위에 서서히 물이 넘쳐나는 이미지로 형상화되는데, 게이 하녀는 열심히 이 욕망을 닦아내고 퍼내려 하지만 그 욕망의 물이 불어나는 것을 부추기는 인물이기도 하다. 넷째딸은 딸로 인정받지 못하는 아픔 속에서 첫째딸의 약혼자와 막내딸이 내연의 관계라는 것을 폭로하면서 집안에 피바람을 일으킨다. 이 두 작품은 트렌스 젠더에 대한 억압적인 상황을 주목적으로 하는 공연들은 아니었지만 여장 남성들 역시 성에 대한 편견에 저항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여성의 몸으로 인식하게 된다.

<시로쿠로>, <공감각적 대화>의 토모코 무카이야마와 오민정은 극중 인물로 존재한다기보다는 현실의 피아니스트와 일상 속 오민정이라는 경계에 선 전이적인(liminal) 여성의 몸으로 형상화된다. 토모코 무카이야마는 파괴적인 힘을 요구하는 작곡가 길리나 우스트볼스키야의 ‘피아노소나타 6번’을 연주하면서 수직적인 이미지를 반복하는 주술적인 감성의 몸을 보여주며 오민정은 소소한 일상을 기발하고 낯선 동작으로 변주해 보여주면서 세련된 여성의 광기를 드러낸다. <공감각적 대화>에서 오민정이 몸에서 야채들을 꺼내는 행위 그리고 그 야채를 다 먹어버리는 행위는 다이어트와 먹기를 반복하는 여성들의 고뇌가 경험되며 마론 인형처럼 노란색 긴 가발에 그로테스크한 화장 테잎을 붙이고 파란색 드레스를 입은 채 롤라 스케이트를 신고 미인대회에서 볼 수 있는 포즈를 취할 때는 유쾌한 풍자의 몸이 경험된다.

위 작품들에서 여배우들은 순종이 아닌 희생을, 포기가 아닌 포용을, 욕망과 광기를 오가는 열정을, 풍자적인 저항의 감성과 이미지를 표출하는 몸의 연기를 펼쳤다고 볼 수 있겠다.

 
3. 관객이자 여성 연기자로서의 몸
사이트 스페시픽 연극이라 할 수 있는 <거리에서>는 one step at a time like this 극단이 연출했지만 박해성 협력 연출을 비롯해 십여 명이 넘는 한국인 스텝들이 관객들을 명동에서부터 남대문 시장과 소공동 지역의 좁은 골목길들을 체험하게 하는 연극이다. 이 거리는 한국에 여행 온 여행자들이 경험했을 듯한 서울 명동이라는 도시의 길이었다. 나는 관객으로 참여했지만 다수의 스텝들의 보이지 않는 보호를 받으며 길을 걸었기에, 그들에게 나의 모습이 관극 당하는 체험이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나는 불특정 다수의 도시민들의 시선과 스텝들의 관람의 대상이 되는, 현실과 극 속의 경계에 서 있는 배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관람 속에서 거리를 걸으며 도시 속 나의 삶, 나 자신에 대해 사유하는 경험을 했다.

제작진이 채워준 팔찌형 아이팟과 하얀 헤드폰을 쓴 나는 열두 개 트랙의 청각적 이미지를 경험하며 헤드폰에서 들려오는 지시와 핸드폰으로 전달되는 사항에 따라 도시의 거리를 걷고 건물들, 조형물들을 체험했다. 주거 공간이 없을 것 같은 명동 뒷길에서 일본어가 쓰여 있는 주택식 게스트하우스를 보았고 유럽 어딘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그림 같은 의자가 놓여 있는 작은 골목길을 걸었다. 겨우 한사람밖에 지나다닐 수 없을 듯한 좁은 골목을 걸으면서 내가 그 동안 이 도시를 얼마나 경계하며 살아왔는지 또는 도시의 삶을 무시하며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먹자골목들과 소규모 주차장 공간을 가로지르며 우연히 스쳐지나가듯 도시를 걷던 내 과거가 재현되고 있는 듯했다. 명동에서 신세계 백화점을 향해 걸어가는 대로에서 재현되는 현재는 그 동안 외로워하며 방황할 시간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내 삶의 조급함을 깨닫게 해주었고 저녁노을은 도시의 건물들 사이를 비집고 대로를 비출 때 가장 아름답게 빛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남대문 시장 한가운데서 아이팟 속 지시대로 오른손을 번쩍 들었을 때 내게로 향할 사람들의 시선이 무척이나 두려워 고개를 들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정상적인 행동이 아닌 듯 보였을 것에 대한 창피함과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에 대한 순간적인 걱정과 우려가 기억난다. 남들의 말과 판단에 휩쓸려 내 마음 속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또는 내 안의 작은 소리를 무시하며 ‘내가 아닌 나’로 살기도 했던 순간들이 기억났다. 순간적이지만 깊고 큰 마음의 충격을 받고 있을 때 나를 관람하고 있던 스텝 중 한 여성이 내 손을 잡고 높은 빌딩 쪽을 향해 뛰었다. 창피함은 곧 10층 위 11층에 위치한 도심의 옥상 공원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도시 속 인공적인 공원 속에서 나는 답답하고 꽉 막힌, 결코 아름답지 않은 도시 풍경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옥상에서 비상 계단을 통해 1층으로 걸어 내려오면서 주최측이 마련했을 듯한 ‘탐욕’, ‘탐식’, ‘태만’, ‘분노’, ‘질투’라는 단어와 이미지가 그려진 종이 그림들을 보았다. 도시민들의 삶을 그대로 표현하는 감성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관객으로서의 나는 곧 남대문 상가 지하에 있는 ‘새로나’ 카페를 관통해 지하도를 건너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먹자골목을 지나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 혼자라면 결코 들어가 보지 못했을 90년대풍 카페와 먹자골목이었다. 그리고 위험해 보이는 막다른 골목 안에는 백묵의 낙서들이 가득했다. <거리에서> 공연 제작진들 또는 이미 공연을 마친 관객들이 남겨놓은 듯한 낙서들이었다. 그 공간에서 나는 인터렉션 퍼포먼스 하나를 더 수행했다. 낙서들 속에 나 역시 “내가 듣고 싶었지만 아직 듣지 못했던 말, 특히 그 말을 듣고 싶은 사람에게서 듣지 못했던 말”을 적어 놓는 것이다. 이러한 퍼포먼스는 핸드폰을 통한 인터렉션으로 진행되는 것이었다.

막다른 골목을 나서서 주차장 쪽문을 지나 나는 부유한 여행자들이 머물 법한 유명 호텔의 로비를 관통해 ‘돌로 만든 북 세 개의 조각물’ 주변의 조용한 공간에서 지시받은 행동의 하나인 친구에게 ‘내가 지금 공연 중이라는 말을 하는’ 전화를 시도했다. 내 친구는 잠을 자고 있어서 전화를 받지 못했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문득 ‘내게 친구란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했고 그 생각을 신속하게 정리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한 채 분주히 다음 장소로 이동했었다.

마지막 체험 장소는 시청광장 옆 소공동의 만국기가 걸려 있는 곳에 위치한 한 카페였다. 그곳에서의 지시 내용은 카페 밖을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내가 그동안 이렇게 무심하게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시간들이 있었던가’ 반성해 보았다. 이곳에서는 음료수를 마시며 제작진들에게 아이팟, 헤드폰 및 막다른 골목으로 나를 인도했던 사진첩을 돌려주고 <거리에서> 공연을 음미했다.

<거리에서> 공연에 참여하는 나는 여성 관객이자 배우였지만, 내게서 여성 관객 특유의 면모를 추출하는 것을 사실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나는 참으로 진지하게 <거리에서> 공연에 참여했고 도시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만끽했으며 일상의 문제들에 대해 사유했고 비교적 여유를 갖고 공연을 즐기려 했다는 점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여성 관객이자 연기자으로서의 내 몸은 현실과 극, 역할 간의 경계 사이에서의 ‘걷는 연기’를 했다고 여겨지며 특히 내 몸이 ‘길’이라는 무대에서 연기했다는 점이 만족스럽다.

 
4. 익숙한 관극 체험 속 낯선 풍경 찾기
<거리에서>를 제외하고는 2012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 출품된 공연들에서는 그다지 새로운 연극 언어를 경험하지 못했던 듯하다. ‘자기만족적인 안주’를 하는 공연들이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인지적 충격, 지적 유희 또는 관객 몸을 자극하는 ‘즐거운 충격’을 주는 공연이 많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무대 위 여성 연기자들의 몸만을 중점적으로 살피는 것은 의미 있었지만, 개별 작품들의 예술적 의의를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공연들이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 작품들이 고민하고 있는 사회·정치·문화적 폭력은 여전히 유효한 아니 좀 더 적극적으로 사유되어야 할 문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그러한 문제의식을 표출하는 연극 언어가 그다지 새롭지 못한 듯하며 오히려 익숙하기에 이러한 작품들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낯선 풍경들을 기억해내려 애써야만 했던 것은 그리 유쾌한 비평 경험은 아니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래도 관객들은 계속해서 서울국제공연예술제가 지속되길 바랄 것이며 의미 있는 공연을 기다릴 듯하다. 포스트드라마적으로 서울국제공연예술제는 점차 관객들의 것이 되어가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김 향

연극평론가. 연세대학교 문학박사. 강사. 최인훈, 차범석, 오태석 연극을 연구했고 최근에 『김향의 무대와 객석 마주보기-두 번째 연극비평집』을 발간했다. 해방기 희곡과 근·현대 창극 공연을 연구 중이며 문화컨텐츠적 측면에서 한국전통공연 양식을 현대화한 작품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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