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즈] 유쾌한 하녀 마리사/ 박연숙

코미디로 복수하기
제 2회 대학로 코미디 페스티벌 <유쾌한 하녀 마리사>

 

박연숙(숭실대학교 베어드학부대학 교수/ 연극 평론가)

 

작: 천명관
연출: 김한길
무대: 여신동
조명: 진용남
음악 이동호
출연: 서정연 이창훈 박주형 손용환 권귀빈 황이건 이은 조유진
공연일시 2012.8.22- 8.26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남편이 내 여동생을 유혹하고 밀월여행을 다녀왔다면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어떻게든 복수를 해야 속이 풀릴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복수해야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느냐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주인공 요한나는 복수 대신 자살을 결심한다. 그녀는 남편의 죄가 자신의 전생에 대한 죄값으로 벌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전생을 네로의 어머니, 남편을 독살한 로마의 악녀 아그리피나로 생각한 탓에 복수 대신 속죄를 택한다. 그러나 결과는 엉뚱하게도 의도치 않은 남편의 독살로 이어진다. <유쾌한 하녀 마리사>는 복수를 코미디처럼 한다. 그 능숙한 전개가 탁월하다. 아무도 죄책감 가질 필요 없이 모든 일이 통쾌하게 결말 맺는다. 장편소설 <고래>(2004), <나의 삼촌 부르스 리>(2012), <고령화 가족>(2010) 등으로 이미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천명관의 단편소설 <유쾌한 하녀 마리사>(2007)가 무대 위에서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기대되는 공연이다.
지금 여기가 아닌 내가 모르는 어딘가의 이야기

지금 여기, 나에게 일어난 사건이었다면 가슴으로 통탄했을 비극도 낯선 곳의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이야기로 들려질 때 우리는 머리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천명관의 <유쾌한 하녀 마리사>가 그렇다. 작품의 배경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이다. 성공한 작가 토마스와 그의 아내 요한나가 사는 집에 포르투갈 시골 처녀 마리사가 하녀로 일하고 있다. 오늘날에 ‘하녀’라는 말도 생경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그들이 걸치고 있는 원색의 강렬한 의상들도, 젊은 작가의 집에 하녀가 있다는 것도 꽤 낯설다. 더구나 토마스가 자신의 아내 요한나 몰래 처제 나디아와 프랑스의 휴양지 셍트로페로 밀월여행을 떠났고, 돌아와서는 우연한 사고로 사망하는 과정 또한 뜻밖이다. 더욱더 낯선 것은 요한나와 마리사가 그러한 사실을 알아내고, 사건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매우 심각하고도 불미스런 사건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작품의 톤은 밝고 경쾌하다. 어차피 코미디를 표방한 공연이니 그럴 법도 하다. 등장인물들의 과장된 헤어스타일과 우스꽝스런 의상들이 그들이 쏟아내는 절망적인 이야기보다 먼저 얼굴의 근육을 풀어준다. 지금 여기, 내게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다면 비극이지만 먼 곳 어딘가에서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일이고, 더구나 그들이 그 사건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접근하고 처리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그래서 근친상간과 죽음이라는 비극적 소재마저 코미디가 될 수 있다.
 

단편소설에서 희곡으로 변하면서 달라진 점

작가 천명관은 자신의 단편소설 <유쾌한 하녀 마리사>를 토대로 바탕으로 동명의 희곡으로 발전시켰는데, 요한나가 남편에게 쓴 편지가 중심이었던 단편 소설보다 희곡이 훨씬 더 다양한 관점에서 다채롭게 사건을 풀어나가고 있다. 우선 마리사의 인물 설정이 사뭇 다르다. 소설에서는 마리사가 포르투갈에 자녀들을 두고 있는 중년 여성이지만 희곡에서는 언니 오빠를 둔 형제들 사이의 막내인 젊은 처녀로 등장하고 있다. 특히 새로운 인물이 추가되는데, 소설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마리사의 오빠 파올로가 등장하는데, 시체 처리라는 복잡한 사건을 해결해 주는 해결사 역할을 하며 사건의 흐름을 흥미롭게 이끌어 낸다. 파올로가 토마스의 시체를 처리해 주고, 싱글인 나디아와 함께 포르투갈로 떠나 행복하게 사는 결말은 소설에서 느낄 수 없는 희극의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단편소설에서 희곡으로 확대되면서 더 세부적으로 발전한 주제는 배우자의 부정이다. 그것도 근친상간에 해당하는 불미스러운 외도이다.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토마스와 처제 나디아의 외도 이외에도 희곡에서는 마리사의 언니 아말리아와 그녀의 시동생 안토니오의 외도가 문제 된다. 비록 마리사의 대사 속에서만 등장하는 외도지만, 그들의 정도는 토마스-나디아의 경우보다 더 심각하다. 아말리아가 낳은 아이가 남편 페르난도의 아이가 아닌 시동생 안토니오의 아이임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이 두 외도 커플의 결말이 정 반대라는 점이다. 요한나-토마스 커플에서는 외도의 주체인 토마스가 실수로 독약이 든 와인을 마시고 죽게 되는 반면 시동생의 아이를 낳은 아말리아는 외도에 대한 아무런 비난이나 처벌 없이 오히려 남편 페르난도와 시동생 안토니오 둘 다를 데리고 살게 될 전망을 내비치고 있다. 외도를 한 주체, 토마스와 아말리아의 결론이 정 반대인 셈이다. 이러한 결론으로 볼 때, 이 작품은 철저히 여성적 관점에서의 코미디라는 생각이 든다. 여성 관객의 입장에서라면 토마스가 우연한 실수로 죽게 되는 결말은 슬프기보다 통쾌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가 처제를 유혹하고 밀월여행을 다녀 온 직후이기 때문에 더욱 더 그럴 것이다. 반면 남편과 시동생 둘 다와 함께 살 아말리아의 전망은 남성 관객에게는 결코 유쾌하지 않은 결론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철저히 여성의 관점에서 여성을 위한 코미디라 하겠다.
코믹, 절제와 남용 사이의 균형

코믹을 기대하는 관객들은 코미디 페스티벌의 하나로 공연된 <유쾌한 하녀 마리사>를 보면서 다소 실망할 수도 있다. 이 작품은 그다지 코믹하지 않다. 특히 전반부가 그렇다. 그러나 이 작품은 분명 코미디이다. 남편이 자신의 동생과 바람난 것을 알게 되고, 그를 의도하지 않게 독살하는 모티브는 비극이지만 그 사건을 다루는 방식이 놀람과 재미를 불러일으키고 해학적이다. 이 작품에서 풍자의 대상은 토마스이다. 그는 지식인체하며 다른 동료 작가의 글쓰기 방식까지 비웃는 대단히 오만한 작가였다. (“작가란 족속들은 대개 자신이 경험한 것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죠. 그래서 별 거 아닌 일도 대단히 의미 있는 것처럼 잔뜩 부풀려서 떠벌이기를 좋아하는데 그런 작가들은 사소한 현상에 집착한 나머지 그 안에 숨겨진 실체를 못 봐요. 취재라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취재를 안 하면 단 한 줄도 못 쓰는 작가들이 있다고 하더군요. 난 그런 작가들을 보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그런 작가들은 상상력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거든요. 취재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건 그리 귀한 게 아니에요. 진정한 작가라면 모름지기 서재에 틀어박혀서도 이 세계를 단숨에 꿰뚫어보는 통찰력과 우주를 삼킬 만큼 거대한 상상력이 있어야 하죠. 바로 나처럼 말이죠.”, 공연 대본13쪽) 토마스는 친구 부르노의 출판 파티에서 즐겁게 즐기고 있는 아내 요한나를 억지로 끌고 나와 그녀의 무식함을 탓하고, 무식한 아내의 존재가 자신의 약점이라고 불평한다. 이러한 토마스의 결함과 오만함 때문에 그가 뒤바뀐 와인을 마시고 죽는 장면이 비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만한 토마스가 실수와 웃음으로라고 응징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여기게끔 한 장치 덕분이다.

반면 토마스와 바람을 피운 요한나의 동생 나디아에 대해서는 도덕적 비난을 모면할만한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나디아는 밀월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언니에게 미안해했었다. 더구나 토마스가 유혹할 당시에 나디아는 남자친구와 헤어져 몹시 외로운 상황이었고, 여행에 다녀와서는 스스로 죄책감에 자살을 감행했었다. 그 밖에도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언니에게 자백하며 용서를 구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있었다. 이러한 장치들 덕분에 나디아는 도덕적 비난을 비켜가고 오히려 공연 후반부에서는 똑똑한 기지를 발휘하는 주요 인물이 된다. 나디아의 풍부한 지식이 토마스의 시체를 처리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게 되어 언니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고마운 존재로 역전한다. 더구나 파울로가 토마스의 시체를 처리해 주는 대가로 나디아를 요구하는 대목은 더욱 재미있다. 싱글인 나디아로서는 외로움을 떨쳐내고 시체 처리를 도움으로써 언니 요한나에 대한 죄책감을 씻겨줄 1석 2조의 기회인 셈이다.

이 작품의 가장 코믹한 요소는 형사 얀커와 파올로에게 있다. 얀커의 어리숙하며 실수 많은 행동과 파올로의 무식해 보이는 표정과 대사들이 코믹하다. 공연 전반부에서는 코믹이 절제되고 풍자의 성격이 강했지만, 토마스가 여행에서 돌아와 실수로 독약을 마신 이후 후반부에서는 형사 얀커와 파올로의 등장으로 무대의 톤이 매우 달라졌다. 풍자와 해악이 주는 웃음의 깊이와 달리 어리숙한 인물의 반복되고 예측 가능한 행동으로 웃는 웃음은 깊이가 얕을 수밖에 없다. 코믹의 요소가 후반부에 남발되어 아쉽다. 전반부의 톤을 유지하여 끝까지 절제했더라면 균형감 있는 공연이 되었을 것이다.
연기와 무대

앞에서 등장인물의 의상이 독특하다고 말한 바 있다. 무엇보다 의상의 재질과 칼라가 독특하다. 의상은 면과 비닐을 병합하여 독특한 느낌을 자아냈고, 원색과 파스텔 톤이 혼합된 강렬한 칼라는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무대의 디자인이나 조명 또한 선명하고 강렬했다. 그러나 그 강도가 계속됨에 따라 다소 피로하게 느껴졌다. 나는 2차례의 공연을 보았다. 개막 때에는 요한나의 머리띠에 작은 하트 하나가 붙어있었다. 그러나 폐막 때는 이전보다 더 큰 하트가 더해져서 2개의 큰 하트가 머리띠에 붙어 있었다. 연기하기에 방해가 될 정도의 큰 크기였는데, 그러한 불편함을 가중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했다. 공연의 횟수가 거듭되면서 그 칼라와 디자인의 강렬함이 더 심화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풍자와 해악으로 충분히 즐거울 수 있는 원작을 작품 외적 요소로 코믹을 자아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비중 있는 마리사 역을 연기한 서정연 배우는 자신의 에너지를 고르게 배분하여 공연 전·후반 모두 무리 없이 소화했다. 요한나는 연약한 체력의 인물이다. 그에 맞게 목소리 또한 다소 가늘게 내며 높은 톤의 목소리를 연기해야 했는데 끝까지 흐트러짐 없이 잘 연기했다. 마리사 역의 이은 배우와 나디아 역의 권귀빈 배우는 주어진 인물을 잘 이해고 정확히 표현했다. 그러나 작품 속의 비중있는 토마스 역의 이창훈 배우는 개성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채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았다. 오히려 단역인 이웃집 수잔느 역의 조유진 배우가 강렬한 인상은 주었다. 작은 배역이지만 그 존재감은 충분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수잔느와 요한나, 마리사가 뒤엉켜 싸우는 장면이었다. 포르투칼의 민속 음악이 크게 틀어지고 세 여자가 슬로우 모션으로 뒤엉켜 싸우는 장면이 강렬했다. 배우들의 호흡이 잘 맞았고, 김한길 연출 또한 젊은 감각에 맞게 완성도 높은 공연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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