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과 이론] 상대방의 자리 / 오세곤

극단 76의 <상대방의 자리>

오세곤(극단 노을 예술감독, 순천향대 교수)

작: 장-뤽 라갸르스

번역: 임혜경

연출: 김국희

드라마트루기: 임재일

관람일시: 2012년 11월 24일 오후 4시

공연장소: 연우소극장 

 인간의 감각은 상대적이다. 산악지대에서는 천 미터가 넘는 봉우리도 그저 언덕처럼 보이지만 평야지대에서는 고작 이삼백 미터의 언덕도 태산처럼 높아 보인다. 연극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주 단순한 연극도 가능하고 아주 복잡한 연극도 가능하다. 여기서 가능하다는 것은 연극 본연의 임무라 할 재미와 감동을 너끈히 제공한다는 의미이다.

장-뤽 라갸르스 작, 김국희 연출의 <상대방의 자리>는 남녀 단 둘이 자리 차지하기 시합을 벌이는 것이 유일한 내용이다. 이렇게 보면 소위 극적 사건이 없는 연극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관객은 분명히 사건을 인식한다. 과연 언제 어떻게 자리빼앗기가 이루어지는지 말고는 관심거리를 절대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이 대단한 사건인양 부각되는 것이다.

그런데 차지하려는 자리는 앉을 자리가 아니라 설 자리이다. 남자는 앉아 있고 여자는 서 있다. 서 있는 자가 우위이고 앉은 자가 열세임은 금방 알 수 있다. 둘 사이에는 쉴 새 없이 말이 오간다. 그러나 얼핏 논리를 찾기 어려운 말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과연 비논리일까? 자리빼앗기라는 궁극적 목적이 있다면 그 과정에서 오가는 말이 논리적이건 아니건 상관없는 것이 아닌가? 횡설수설하는 말로 정신을 혼미하게 해서 자리를 빼앗는다면 그 또한 목적의 달성이 아니겠는가?

물론 가능한 주장이다. 하지만 너무 안이한 결론이다. 사실 남녀의 대화가 비논리로 보이는 것은 횡설수설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평소 나누는 대화를 극사실적으로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의 관객들은 평소 자신들이 그렇게 비논리적인 말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일상의 대화를 녹음해서 글로 옮겨놓으면 비문이 많은 것은 물론이고 중간에 끊어지거나 갑자기 화제가 바뀌거나 곁가지로 흐르거나 하는 수가 굉장히 많다. 그러나 그것을 읽어 주면 대부분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반발할 것이다. 자신의 본 모습을 보며 자기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셈인데 이것은 부조리극이 추구하는 ‘비현실임직한 현실’과 같은 맥락이다.

게다가 가나다라 네 명이 있는데 가와 나가 대화를 나누고 다와 라가 대화를 나눈다 했을 때 그 대화를 몰래 녹음한 뒤 가와 나 중의 한 명과 다와 라 중의 한 명을 선택하여 그 두 사람의 말을 나열한다면 어떨까? 우연의 일치로 절묘하게 연결되는 경우는 없을까? 그 우연의 일치가 겹치면 상당히 긴 시간도 그렇게 일치하는 것 같은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치 해변에서 서로 다른 목표를 향해 달리는 두 사람을 사진으로 찍었는데 포옹하기 위해 마주보며 달리는 연인처럼 착각할 수 있는 것처럼 대화에서도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럴 경우 작가들은 대부분 아무런 설명 없이 대사만 덩그러니 던져놓기 일쑤다. 좋게 생각하면 창의성 발휘가 가능한 열린 대본이라 하겠지만 온통 구멍투성이의 그런 대본을 입체화하는 것은 실로 까다롭고 성공 확률이 지극히 낮은 작업이다.

사건이 분명하고 줄거리가 있는 작품은 일부 정교함이 떨어져도 관객들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의 자리>는 단 한 순간 약간만 허술해도 바로 관객의 집중이 흐트러져버리는 그런 작품이다. 그래서 다른 작품보다 몇 배 더 공을 들이고도 전체로부터 부분까지 작품을 완전하게 파악하지 못 하면 관객에게 충분히 봉사하지 못 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십상이다. 김진태와 하지은, 두 배우의 열연에 박수를 치면서도 끝내 공허한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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