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오세곤

극단 차이무의 <거기>

오세곤(극단 노을 예술감독, 순천향대 교수)

이상우는 참으로 재미있는 작가이다. 연출가이다. 아니, 작명가이다. 극단 차이무! ‘차원이동무대’의 준말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모르는 채 차이가 없다는 뜻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구태여 이상우도 그런 해석을 거부하지 않는 듯 “이것이 차.이.다” 프로젝트는 비록 그것이 극단 ‘차이무’와 기획사 ‘이다’의 두 이름을 결합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차이가 있고 없고로 들린다. 역시 그가 지었다는 ‘이다’도 정말 많은 해석이 가능한 이름이다. 작명의 달인은 항상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뭔가 채워 넣을 여지가 많은 이름들을 선사한다. 사실 이름 말고도 또 있다. 극단 차이무의 공연 팸플릿을 보면 항상 참여자들의 이름 밑에 출신 초등학교가 들어가 있다. 그런데 고렇게 몇 자 안 되는 정보를 토대로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한다. 물론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지만 아무런 위험이 없는 생각의 확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이상우의 장기가 발휘된 작품이 <거기>이다. 코너 맥퍼슨의 <The Weir>를 번안했다는데 원작의 제목이 뜻하는 ‘방죽’ 대신 ‘거기’라는 단어를 택함으로써 또 수많은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마치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이고 ‘너’이고 ‘그 사람’이듯이 ‘거기’는 세상의 모든 장소가 될 수 있다. 즉 관객들 모두 자신의 ‘거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공연을 보면서. 또 공연을 보고 나서. 공연을 보면서는 배우들과 동일시되면서 마치 자신이 강원도 사람이 된 듯 거기를 느낄 것이고, 공연이 끝나고 나면 자신의 거기는 어디일지 생각하다 이내 어딘가를 생각해낼 것이다.

공연에 사건이 없는 것은 항상 얘깃거리이다. 물론 사건이 없을 수는 없다. 다만 극적 사건이 없을 뿐이다. ‘극적’을 ‘드라마틱’으로 풀면 훨씬 이해가 쉬울 것이다. 재미없는 연극인데 극적 사건이 없으면 당장 그것이 실패의 주범으로 몰린다. 하지만 사건이 없이 재미있을 경우 그것이 재미의 요인으로 꼽히진 않는다. 참으로 불공평한 해석이다. 그래서 공평한 해석을 해본다. 극단 차이무의 <거기>는 극적 사건이 없기 때문에 재미있다고. 그렇다. 이 작품에서 제일 강렬한 부분이라면 유일한 여성인 김정이 아이를 잃고 방황하게 된 자신의 아픈 과거를 털어놓는 장면이다. 그러나 직접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앉아서 차분히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마치 일부러 극적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한 듯하다.

연극 관객은 특별한 시간에 특정한 공연을 보려고 특정한 장소까지 돈과 시간을 들여 찾아온 사람들이다. 영화처럼 여기저기 근처에서 쉽게 선택할 수도 없다. 공연 중 나올 수도 없다. 음식도 먹을 수 없고 핸드폰도 꺼야 한다. 이렇게 까다로운 과정을 감수하고 보려는 사람들이니 당연히 대단히 협조적이라고 해도 좋다. 극적 사건이 없이 평평한 가운데 살짝살짝 도드라지는 부분에 관객들은 열심히 반응한다. 물론 그것은 연기력이 받쳐줄 때 가능하다. 어쨌든 <거기>를 보는 관객들은 그냥 수다스러운 늙다리 총각들의 별 의미 없는 말들을 재미있게 듣는다. 그러다 ‘거기’ 끼어든 한 여인의 ‘말 수 적음’에 ‘차이’를 느낀다. 그리고는 아주 아끼고 아꼈다 나오는 그녀의 아픈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그리고는 모두 생각한다. 자신의 거기와 자신의 상처와 자신의 살아가는 방식을. 극단 차이무의 <거기>는 그렇게 관객이 만들어 주고 만들어 가는 연극이다. 그러나 관객으로 하여금 그렇게 나서도록 하는 능력은 분명 대단한 것이다. 비워놓을 수 있는 자신감과 그럴 줄 아는 재주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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