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과 이론] 돈데보이/ 박연숙

사멸하는 존재를 위로하는 노래: 연극 <돈데 보이>

 

박연숙 (공이모 평론가/숭실대교수, feelogo@ssu.ac.kr)

 

작: 우고 살세도
번역: 김선욱
연출: 송현옥
드라마트루기: 장경욱
안무: 이영찬
무대감독: 표종현
출연: 정아미 김충근 이주원 송아영 홍기준 나현민 조환준 강경래 윤국희 오주원 안태영 강지은 장진호 김예샘 김수지
공연일시: 2013년 3월 14일- 3월 17일
공연장소: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관람일시: 2013년 3월 14일 3시/ 16일 3시

 

인간은 누구나 홀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알고 있다. 다만 죽음으로 끝날 자신의 운명을 애써 외면하거나 늦추기를 소망할 뿐이다. 적어도 오늘만은 자신에게 죽음이 찾아들지 않기 바란다. 누군가는 홀로 죽고 누군가는 홀로 남겨질 운명이라는 것을 아는 인간은 그 두려움을 무엇으로든 달래고자 한다. 그것이 음악이 되기도 하고 이미지가 되기도 하고 글이 되기도 한다. 익히 알려진 노래의 제목을 빌려온 연극 <돈데 보이>의 원제는 <가객들의 여행>이다. 작품에서의 ‘여행’은 생사를 건 불법 밀입국을 의미하고 ‘가객’은 불법 밀입국자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 의미를 넓게 보자면 ‘여행’은 죽음에 이르는 삶의 여정을 의미할 수도 있고, ‘가객’은 언젠가 다가올 죽음의 두려움을 노래로 달래는 ‘인간’으로 확장될 수 있다.

 

음악의 절제와 조화

 

1989년 스페인의 대표적인 연극상인 티르소 데 몰리나 수상작인 우고 살세도의 <가객들의 여행>은 1987년 7월 1일 19명의 멕시코 불법 이민자들이 브로커를 통해 미국으로 밀입국하기 위해 기차 화물칸에 숨어들었다가 기차가 선로를 이탈하는 사고로 18명이 질식사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원작은 사건 이틀 전부터 시작하여 장례식에 이르기까지 열흘 동안의 떠난 자와 남겨진 자의 이야기이다. 기차를 타고 미국으로 떠나는 자는 아들이자 아버지이자 남편이고, 멕시코에 남은 자는 어머니이자 딸이자 아내이다. 총 10장으로 구성된 원작은 시간적 순서에 따라 인물들이 대화하고 낭송하고 합창하고 독백하는 형식이다. 이 원작이 송현옥 연출을 거치면서 ‘노래’와 ‘이미지’가 더해지고, 프롤로그 에필로그 외에 7개의 장이 더 추가되고, 순차적 사건들과 기억들이 뒤섞이면서 밀입국자들의 처절한 죽음을 낮은 음조로 읊조리는 음악극으로 창조되었다.

 

원제가 ‘가객들의 여행’인 만큼 이 작품에는 음악의 비중이 클 수밖에 없다. 이번 공연을 위해 작곡된 곡은 악사 최윤혁의 기타곡이 중심이고, 새로 작곡된 곡들과 아울러 흔히 듣지 못한 클래식 명곡들이 선택되었다. 밀입국자들을 안내하는 브로커의 하수인 모스코가 분노한 밀입국자들에게 살해당할 때 바로크 음악의 작곡가인 페르골레시의 ‘슬픔의 성모’ 성악곡이 흐르는데 비인간적이고 끔찍한 상황을 담담하게 그려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여자들의 춤추는 장면에서는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op. 400번 ‘키스 왈츠’가 우아한 분위기를 잘 이끌어주었다. 제목에 사용된 티시 이니호사의 ‘돈데 보이’가 과하게 사용되지 않은 점도 이 작품의 미덕이다. 테마 곡은 작은 읊조림과 플롯으로 고즈넉하게 연주되었다. 여자들이 기도하며 부르는 노래 역시 고요하다. 시의 상징어처럼 이 작품의 음악은 절제된 이미지로 단아하게 표현되었다.

 

인물의 반전

 

<돈데보이>에는 주인공이 따로 없다. 누구 한 사람의 비극적 사건을 보여주기보다 억압받는 사람들 모두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밀입국자 중 아무도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남자가 막판에 합류한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의 설정은 비극적 사건의 희생자가 익명의 누구라도 될 수 있음을 의식하게 한다. 미키, 차요, 노아 등의 밀입국자들과 그들 가족들의 애환이 조명되고 브로커의 하수인인 모스코 역시 무게감 있게 다뤄지고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주목 받는 배역인 눈먼 장님 할머니가 모스코의 가족인 점을 감안하면 이 작품은 사건에 희생된 자들보다 오히려 남겨진 자의 고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에필로그에서 밀입국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두 남자가 기차 사고를 전해 듣고 나누는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만일 지난번에 국경을 넘어가려고 했을 때, 우리한테 총을 쐈다면 어땠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죄를 갚고 있는 거라면 …” 이 대화에서는 누가 살아 남았고 누가 죽었는지가 애매하다. 살아 있는 것이 오히려 대신 죄를 갚는 것이라는 말은 아이러니다.

화물칸에 갇힌 19명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미키가 경찰이 묻는 질문에 모든 것을 말하고 나서, 밀입국자 중 살아남은 사람이 있는지 경찰에게 되묻지만 아무런 답을 얻어내지 못한다. 그러자 미키는, “내 말 안 들려요? 왜 대답을 안 해요? 난 이제 모든 걸 다 말했습니다. 왜 내게 아무 말도 안 하는 겁니까? 내가 살아있긴 하는 겁니까? 말 좀 해보세요. 한 번 만이라도. 난 그걸 알아야 되요. 거기 누구 없어요?”라고 말하는 장면 또한 인상적이다. 결국 이 작품은 죽은 자와 산 자, 선한 자와 악한 자,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이분법을 뛰어 넘고 있다.

<돈데 보이>에는 당황스러울 정도의 반전이 있다. 밀입국자들에게 돈을 뜯어내는 브로커의 하수인인 모스코가 밀입국자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장면 연출이 그러했다. 화물칸 안의 살해 장면에서 모스코는 모기를 연상시키는 이름으로 멸시당하고 외모와 성격으로 놀림 당한다. 기차가 선로를 이탈해 멈춰 서자 밀입국자들은 광기에 가까운 분노를 모스코에게 터트리며 두들겨 죽이는데, 죽은 모스코의 모습이 마치 예수처럼 두 팔을 벌린 채 늘어져 있어 희생 제물로서의 예수를 연상시킨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과 동시에 기차 밖의 공간에서 눈먼 장님 할머니가 ‘슬픔의 성모’ 곡을 배경으로 비탄에 젖은 성모처럼 등장하는데 이는 원작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의미가 부가된 것이다.

우고 살세도의 원작에서는 사건 희생자 모두를 예수로 지칭한다. 마지막 장에서 장례식이 거행될 때 신부의 설교는 다음과 같다. “저는 지금 새로운 예수가, 새로운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암살당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기차 칸에서 돌아가신 겁니다. (중략) 오늘 우리가 묻을 저 예수는 내일 부활해서 인간들에게 정의를 실현하실 것입니다.” 원작자가 사고에 희생된 죽은 자 모두를 정의를 위해 죽은 예수로 보고 있는 반면, <돈데 보이>에서는 가장 약하기 때문에 더 악할 수밖에 없는 모스코를 가장 예수처럼 연출하였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폐병에 걸려 곧 죽을 줄 알았던 아이, 못생겨서 결혼도 못하고 브로커의 하수인으로 살아가는 모스코를 예수와 가장 닮은 인물로 연출한 점은 새롭고 의아했다. 이 또한 선과 악, 삶과 죽음,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을 넘어서려는 또 하나의 새로운 시도라고 생각된다.

 

리듬을 살린 무대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무대이다. 목조 사다리와 바퀴가 달린 철조 구조물로 활용된 무대가 추상과 구상의 조화를 이루어냈다. 목조 사다리를 눕혔을 때는 브로커와 밀입국자들이 몰래 숨어드는 기찻길이 되고 여인들의 빨래터가 되지만 사다리 여러 개를 한 인물 당 하나씩 무대 전면에 세웠을 때는 밀폐되고 고립된 사고 현장이 된다. 철조 구조물 또한 이중의 역할을 한다. 바퀴가 여럿 달린 철조 구조물이 가로로 놓였을 때는 6명의 여인이 자유자재로 끌어주어 질주하는 기차로 변신하지만, 세로로 고정되었을 때는 선로를 벗어난 사건의 상황으로 연출되어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철조 구조물이 극의 흐름에 맞게 천천히 회전하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모습이 극의 리듬을 잘 살려 주었다. 같은 오브제가 이중의 용도로 다양한 분위기로 연출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극 후반부에 무대 천장에서 내려온 사다리는 의외였다.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의 높은 천장에서 내려진 사다리 위에서 미키가 자신이 살아 있기는 한 것이냐고 절규하듯 부르짖는 모습은 위태롭고 처절하였다. 이 장면은 극단 물결의 2010년과 2012년에 공연했던 <5분간의 청혼>을 연상시켰다. 그때도 미키 역의 나현민 배우가 높은 구조물 위에서 매우 강렬하게 외치듯 연기하였다. 브로커 가빌란과 밀입국자들이 기찻길을 리듬감 있게 조심스레 걷는 연기, 화물칸으로 들어가는 것을 연기하기 위해 무대 왼편 바닥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오른편 바닥을 열고 사다리 위로 오르는 연출도 재미있었다. 어둠 속에 싸여 두려움에 떠는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가빌란, 모스코, 차요, 노아, 배불뚝이, 미키 등의 밀입국자의 개성은 분명했다. 그들의 어조와 개성은 분명히 드러났다. 다만, 영어를 사용하며 거친 목소리로 ‘Singing in the rain’을 부르면 들어오는 왼편 상수의 기관사 장면이 거슬렸다. 물론 철조 구조물을 가로에서 세로로 전환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시간과 공간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관사답지 않은 어조와 모습으로 등장해 시끄럽게 소란만 피우고 퇴장하여 막간극의 인상을 주었다.

 

위로의 노래

 

<돈데 보이>는 개성 있는 한 인물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인간이라는 존재와 인간의 운명을 관조한다. 언제가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 죽음이 언제 찾아오는지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자신이 가는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인간은 두렵고 고독하다. 그가 강자이건 약자이건 선인이건 악인이건 산자이건 망자이건 모든 인간은 그 고독한 운명 때문에 위로 받아야 한다. 그 위로를 노래가, 음악이, 예술이 대신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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