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연극(1)/ 이재진

종교와 연극(1)

이재진

 

[목차]

I. 기독교와 로마연극 II. 기독교와 중세연극 III. 수난극/오버암마가우 IV. 잔 다르크/요한나 V. 맺는 말

 

I. 기독교와 로마연극

homo ludens. 38억 여 년 전 바다에는 어느새 생명체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생명의 본질은 도전이던가, 긴 시간의 흐름과 기다림, 자연의 섭리 혹은 신의 의지가 모두 한 뜻으로 모였는지 생명체는 홀연 뭍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진화에 진화를 거듭한 생명체가 뭍으로 올라온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5억 년에서 6억 년 전쯤으로 추산하고 있다. 지구가 태어나서 40억여년의 세월이 그사이 흐르고 있었다. 커다란 달덩이는 바다에서 땅위로 힘들게 기어오르는 생명체의 발길을 축하라도 해 주듯 밝게 비추어 주고 있었다. 그 당시 달은 지금보다 어미 행성에 훨씬 더 가까이 (초창기에는 24만 km, 지금 간격의 약 3분의 2정도) 붙어 있었다. 진화에는 멈춤이란 없는 법이다. 진화란 창조의 또 다른 말이기도 하다. 2천 여 만 년 전 나무위에 어느새 원숭이들이 모여 앉아 밝아오는 동녘하늘을 맞이하며 울음소리로 아침의 정막을 깨트리고 있었다. 5백만 여 년 전 그 중 한 종이 우연히 그 무리에서 벗어나 조심스레 나무에서 내려왔다. 이들은 홀로 자신만의 진화를 거듭하기 시작했다. 영리한 그 유인원은 점차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으로 진화하기에 이른다. 이 인간이란 동물은 놀이를 즐기고 자신을 개발할 능력을 갖추게 된다. 놀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생각을 생각해 내었다. 슬픔을 슬퍼하고 기쁨을 기뻐할 수 있는 피조물이었다. 석기시대에 이미 동굴벽화에 그런 놀이의 흔적을 남겨 놓았다. 우리의 털북숭이 조상들은 폭풍우 내리치는 험한 날씨에 사냥을 포기하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 추위에 떨며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벽에 이런 저런 그림을 그려 넣었다. 망설이다가 그림 옆에 손바닥으로 뻘건 도장을 찍어 자신의 존재를 새겨놓았다. 그런 손도장을 보면 나는 숙연한 마음으로 깊은 생각에 잠기곤 한다. 손도장을 찍으며 원시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 어데서 와서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공포와 두려움과 허전함과 망막함 속에 갇혀 이들은 어렴풋이 신의 모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새 이들에게 제례의식이 생겨났다. 여기에서 인류의 문화는 시작되었다. 의식주를 포함해서 문화와 전통의 역사가 그런 의식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죽은 이를 애도하며 흐느끼던 소리에서 노래가 이어 흘렀다. 고인에게 아쉬움 속에 음식을 올리며 웅얼대다 그 속에서 언어를 만들어 내었다.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훔쳐내며 고인을 보내는 슬픔을 온몸으로 담아내었다. 자연스레 연극이란 형태가 생성되고 있었다. 모든 예술을 아우르는 가장 원초적인 예술의 모둠형태는 바로 연극일 것이다. 제례의식은 끝내 그리스의 경우처럼 국민대축제란 화합의 장이 되기도 하였고 때로는 국민대통합을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리스 연극과 로마 연극. 기원전 240년 로마인들의 가장 큰 축제였던 ‘ludi romani’(로마축제)를 맞이하여 그리스 출신인 Livius Andronicus는 그리스 비극과 희극 한 편씩을 라틴어로 만들어 공연하게 되었다. 안드로니쿠스는 고국에서는 원래 배우였으나 노예로 로마에 끌려왔다.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Livier 귀족의 가정교사가 되어 일하다가 이름과 함께 자유의 몸을 얻게 되었다. 안드로니쿠스는 많은 그리스 문학작품, 드라마를 번역하거나 직접 개작해서 소개했던 모양이다. 기원전 3세기경에 로마는 지중해 서부 연안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장악하게 된다. 로마의 집권세력은 이런 정치적, 군사적 우위뿐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정신적 자신감마저 얻고자, 오래 동안 부러워하던 헬레니즘의 문화권에 동참하고 싶었을 것이다. 연극사에서 말하는 Seneca, Plautus, Terenz 등이 주도했던 로마연극은 이와 같이 기원전 240년에 시작된 것이다.

 

기원전 3세기경에는 로마의 군사력이 막강해 지고 지중해를 정복하면서 그리스의 철학, 문학, 예술 등이 로마로 쏟아져 들어갔다. 로마 사람들의 그리스에 대한 평가는 드높아지게 되었다. 로마시민들 사이에는 그리스 문화와 예술에 심취하고 열광하고 지지하는 무리가 적지 않았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전성기를 이루던 그리스의 문화를 동경했다. 로마의 문화는 헬레니즘의 모방과 영향아래 놓이게 되었다. 특히 연극은 예외일 수가 없었다. 로마 귀족들은 반대로 전통적으로 로마의 덕성으로 내세우던 복종, 규율, 도덕이 그로 인해 무너진다고 두려워했다. 이런 덕성을 로마의 근간으로 생각하던 원로회의가 젊은이들의 풍조를 로마 권력의 와해로 느낀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기원전 2세기 중엽에 나타나는 기록을 보면 로마 원로회의는 배우가 등장해야 되는 무대는 어쩔 수 없지만 관객은 서서 관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안락한 공연장환경을 조성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는 셈이다. 로마시민이 연극공연을 앉아서 관람하면 그런 습관으로 인해 너무 나태해지고 허약해짐을 막기 위해서라는 터무니없는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이는 물론 핑계였고 원로원들은 연극공연자체에 부정적이었던 모양이다. 연극의 내용이 주로 희극의 경우 매우 부도덕하고 비도덕적임으로 척결의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연극은 때가 되면 수많은 시민들이 한 곳에 모여 축제를 벌이는 국가행사였다. 고급 공무원(Archon)이 축제를 관리하고 운영하였다. 그리스 연극은 축제극, 가면극, 대중극, 음악극(코러스), 야외극 등으로 그 특성을 집약할 수가 있다. 로마의 연극은 그리스와는 달랐다. 로마의 연극축제는 어디에서 개최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리스 사람들처럼 언덕에 야외공연장을 세운 것이 아니라 옥수수 밭 같은 곳에 임시로 닫힌 공간(무대)을 만들었다. 기원전 1세기 중엽까지는 로마의 공연장은 공연 후 즉시 다시 치우기 쉽게 나무로 간단히 지었다. 배우가 등장하는 무대나 관객이 앉을 의자를 간단히 만들었다. 로마 정치권은 연극을 거부하고 그 결과 반듯한 극장을 짓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제대로 된 돌로 된 극장은 안드로니쿠스가 공연한 후 200여년이 지나서야 건축되었다. 연극이 사양길에 들어서자 그때야 비로소 로마인들은 호화로운 석조 건물의 극장을 짓기 시작했다. 기원전 55년 대리석으로 된 폼페이극장이 위용을 들어냈을 때는 플아우투스, 세네커, 테렌츠, 아키우스 등이 주도했던 로마연극의 전성기는 이미 끝난 지 오래 되었으니!

 

연극축제에는 많은 작품들이 무대에 올랐고 많은 관객의 관심이 쏠렸다. 그리스에서는 모든 정치적 결단이 온 국민의 정신적 합의로 형성되었다. 로마의 국가행정력은 그리스의 경우와는 달리 군사적 경제적 이해관계와 권력추구의 결과로 좌우되었다. 역사학자 뒤랑 (Will Durant)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예술에 뛰어난 민족은 아니었단다. 이들은 오히려 세계를 재패한 전투에 뛰어난 전사들이었다.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즐기기 보다는 국가체재를 정립하고 질서와 안전을 확보하는데 더 가치와 의미를 주었다. 물론 죽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를 하였지만, 반면 살아있는 예술가들은 골빈 쓰레기 정도로 취급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 사람들에 비해 로마 사람들은 획일적인 국가체제 속의 일원이었다. 그리스는 도시국가(polis)로서 개인의 특성이 전체에 융합, 조화되어 개인의 자율성이 살아있는 반면, 로마 시민은 거대한 국가체제(res publica)의 한 일원으로 전체를 위해 자기희생을 강요받으며, 개인은 국가에 예속되어 있어 개인의 특성이 보이지 않는 획일적인 존재였다. 그리스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특성은 무엇보다도 로마 사람들은 종교적인 민족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즉 로마연극에는 디오니스적인 열정과 神에 기대는 기원이 없었다. 로마의 시인 Juvenal은 로마 시민을 ‘panem et circenses’(‘빵과 서커스놀이’)로 압축해서 표현했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으로도 유명한 유베날은 주권은 권력자들에게 넘겨주고 오직 마차경주나 검투사들의 경기에 정신을 파는 그 당시 로마시민들을 비꼬았다. 반대로 위정자들은 그런 식으로 통치를 용이하게 이끌었다. 로마 시민들은 국가통치에 직접 참여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수 없이 많은 행사나 축제가 시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 우리들이 섹스, 연예나 영화, 스포츠에 정신을 팔고 노예처럼 살고 있듯이!

 

기독교와 익살극. 공화정시대에는 규모가 큰 축제가 4번에 걸쳐 공식적인 축제일은 일 년에 48일이었다. 로마의 첫 번째 황제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 Oktavius. BC 63- AD14) 황제시대에는 축제일은 77일(56 연극공연)이나 되었다. 축제일은 점점 늘어서 4세기경에는 176일(102 연극공연)에 이르렀다. 황제나 부유한 귀족의 지원을 받았다. 좌우간 축제에는 다른 행사에 비해 연극을 가장 많이 공연하였다. 무엇보다 엄청난 경비가 드는 다른 경기에 비해 연극공연에는 비용이 워낙 적게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공화정 시대(기원전 6세기부터 시작해서 기원 전 30년 아우구스투스가 황제시대의 문을 열기 전까지의 로마국가체제)에는 비극과 희극이 골고루 공연 되었으나 황제시대에는 점차 눈과 귀를 자극하는 익살극 형태를 선호하게 된다. 로마의 희극은 그리스의 희극을 수용한 전통 희극이외에 점차 눈을 자극하는 즉흥적인 익살극 형태로 변하게 된다. 로마의 전통희극은 mimus, atellane 형식이었다. 극단단원은 서너 명에 불과했고 아주 적은 경비도 이유가 되겠지만 공연시간은 대체로 한 시간이 체 넘지 않았다. 내용을 중심으로 한다기보다는 즉흥적이고 거친 언어로 재미 위주의 익살극형태였다, 기원전 2세기부터 인기를 끌던 이 연극형태는 온전히 남아있는 작품은 없고 일부 단편이 전해질 뿐이다. ‘미무스’의 주제는 한 마디로 섹스와 범죄로 뒤범벅이었다. 이 희극형식은 잘 짜인 줄거리는 없이 매우 외설적이고 난잡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애정행각, 간통, 살인, 사기, 결혼 사기, 어리석은 농부 이야기, 난파, 주먹다짐, 죽음, 독살 등 이런 저런 시끄러운 이야기를 무대에 올려놓았다. 물론 정치적인 현안 문제나 인물들을 다루기도 했다. 쥬피터 등 신들과의 애정행각도 사랑받는 주제였다. 특히 미무스 공연에서는 공연전후에 여배우들이나 창녀들을 동원해 나체 춤 같은 볼거리로 관객을 끌었다.

 

축제가 벌어지는 동안 연극은 물론 마차경주, 검투사들의 격투, 맹수와의 혈투 등 볼만한 오락경기도 동시에 벌어졌다. 집권자들은 좀 더 호화로운 극적 장면으로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하였다. 이런 화려한 볼거리와 처음부터 연극은 경쟁상대가 되지 않았다. 초라한 공연장 옆에는 거대한 콜로세움에 물로 가득 채워 놓고 카르타고와의 해전을 실감나게 연출하고 있었다. 다른 오락물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연극은 두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콜로세움에서 벌어지는 해전이나 검투사들의 혈투보다 더 실감나는 연기를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다. 사형수를 싼 값에 사다가 무대에서 직접 죽이는 깜짝쇼를 연출했다. 이런 현실감 넘치는 실감나는 연출도 하지만 마차경기와는 경쟁이 되지 않았다. 마차경기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연극은 더욱 재미있는 소재를 발굴 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의 박해가 가장 극심했던 도미니티아누스 황제시대(Domitianus, 81- 96)에는 유행처럼 그 당시 국가체제의 큰 위협으로 보던 기독교인을 무대를 통해 조롱하고 멸시했다. 로마에서는 ‘예수쟁이’만큼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재미를 주는 우스꽝스런 대상은 없었다. 기독교가 국교가 된 후에도 이런 풍조는 지속되었다. 로마시대의 연극은 상업적인 놀이문화로서 대중성을 얻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우스꽝스러운 익살극의 소재로 삼았던 것이다. 이런 연극의 특성을 국교가 된 후 기독교에서 받아드릴 리는 없었다. 검투사들의 경기, 마차경주 등도 그러했지만 무엇보다 난잡한 오락물은 기독교교리에 반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 로마의 비극이나 희극은 그 당시 사회적 의미를 잃은 지 이미 오래 되었고, 그뿐 아니라 교회는 교회의 권위를 오락거리로 삼아 대중화시킴을 반대했음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더구나 대중성은 폭력의 산실이 되기 일쑤였다.

 

세례의 장면은 물론 심지어 순교의 고통까지도 무엄하게(!) 이들은 조롱거리로 희화화 하였다. 예수의 순교를 우스꽝스레 연기하는 도중 자신은 기독교인이라며 신앙고백을 하고는 끝내 순교자가 된 배우도 있었다. 트라이누스 황제 (Traianus, 98-117) 이후로는 적발된 기독교인에게는 살아남을 기회를 주었다. 로마가 섬기는 신들에게 제물을 받치고 경배를 하면 용서를 받고, 이를 거부하면 사형을 받았다. 게네시우스(Genesius)는 춤이나 음악, 무대 등의 종사자는 물론 배우들을 보호하는 수호성자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분은 익살극 (mimus)배우로 대머리 분장에 갖은 우스꽝스런 간질병 연기를 도맡아 하며 기독교인의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마침 디오클레티안(Diokletian, 284-305) 황제가 관람하는 중 이 사람은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밝혔다. “내가 지금까지 무대에서 보여준 것은 모두가 사실이다, 나는 정말 기독교인이다.” 전설에 의하면 갑자기 예수의 얼굴을 보고나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물론 게네시우스는 참수형을 당했다. 이와 같이 공연 중 무대에서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밝히고 순교한 배우들의 기록은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펠라기아(Pelagia)라는 여인은 원래 창녀이면서 배우, 춤을 추어 남자를 유혹했으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는다. 그 후 이 여인은 세례를 받고 연극을 멀리하고 예루살렘에서 기도하며 여생을 보낸다. 이 여인도 성녀의 대열에 올라 배우들을 수호해 준다.

 

말씀의 종교. 기독교는 로마제국에서 300여년이나 심하게 박해를 받았다. 콘스탄틴 황제(Constantinus. 280 경 -337)가 서기 313년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381년에는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국교로 제정되었다. 오랫동안 쫓김을 받던 기독교는 어두운 까따꼼베(catacombe)에서 나오게 되었다. 나오자마자 자기들 교리에 반하면 누가 되었던 사정없이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 이외는 전혀 용납하지 않는 소위 암흑시기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리스, 로마의 화려했던 연극의 전통은 제자리걸음은커녕 오히려 퇴보하고 말았다. 기독교는 수세기 동안 과학(천문학)과의 갈등만 빚은 것은 아니었다. 연극과의 갈등 또한 만만치 않았다.

 

기독교는 말씀(logos)의 종교이다. 기독교는 형상(eikos)의 종교는 아니다. 즉 보여주기 보다는 말하는 종교이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신 후 계속 말씀으로 창조를 이어간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로 시작한다. 이 최초의 말씀에서 온갖 것이 시작되고 모든 것이 그 속에 들어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고 하나님이 곧 말씀이다. 삼라만상 중 이 말씀에서 시작되지 않은 것이 없고 이 말씀에 시작되지 않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속에서 생명이 시작하였으며 이 생명이 바로 인간의 빛이었다. 요한복음의 말씀은 대체로 이와 같이 설명이 되어 있다. ‘보여줌’ 보다는 ‘이야기함’을 더 선호하는 이런 경향은 기독교의 교리와 연계된다. 형상(보여줌)은 우상숭배와 맥을 같이 한다. 성경의 십계명에도 명시되어 있는 우상숭배는 로마로 이어졌다.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어떤 실체를 형상화함을 경계하고 거부했다. 하나님 이외는 어느 것도 보면 되지 않는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주인공은 온갖 우주의 비밀을 연구하였지만 요한복음의 1절에 나오는 ‘logos’란 단어 하나를 만족스럽게 옮기지 못함을 한탄한다. 파우스트는 ‘말씀’보다는 ‘뜻’이나 ‘힘’으로 번역해본다. 만족스럽지 않다. ‘행동’이나 ‘행위’ 정도로 번역함이 옳지 않을 가 고민한다. 결국 “태초에 행함이 있었다”로 번역한다.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 (Thomas Mann. Doktor Faustus. 1947)에서 주인공은 ‘logos’를 ‘음악’이라고 번역함이 옳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럼 우주의 근원은 괴테가 생각하듯 행동에 즉 어떤 의지에서, 아니면 토마스 만이 주장하듯 음악에 즉 조화로운 소리에서 시작된 것인가? 행위를 내세우는 괴테보다는 소리를 우주의 근원으로 제안하는 토마스 만이 결국 성경에는 더 걸맞을 것이다.

 

스티븐 호킹 등 많은 서양 천체물리학자들은 우주의 시작은 태초의 대폭발 (BIG BANG)에서 시작되었다는 가설을 세우고 있다. 이와 같이 우주는 137억여년 전 거대한 불빛과 함께 큰 소리에서 시작되었다면 이 태초의 거대한 소리는 성경의 말씀과 토마스 만의 음악과 어느 정도 상통한다. 우주의 생성을 생각하면서 노자의 도덕경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된다. 노자는 우주는 無(무)의 상태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없음에서 온 세상이 시작된다’로 도덕경은 시작한다. ‘없음’이란 삼라만상이 시작되기 전, 모든 것을 품어 안고, 그러면서도 전혀 아무 모습도 드러내지 않는 그런 완벽한 상태인 것이다. 그곳은 호킹이 생각하는 우주가 대폭발 하기 직전의 절대적 상태의 단일점(singularity)의 단계일 것이다.

 

분서갱유. 로마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면서 4세기 말에 극장문은 거의 모두 닫히게 되었고 연극에 관한 서적뿐 아니라 그에 관련된 많은 서적이 불타거나 파기되었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도 그렇지만 나치도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많은 책을 불살랐다. 로마시대의 소위 분서갱유는 종교적 이유로 일어났다. 그 손실은 엄청났다. 3세기에서 6세기 사이 많은 문화적 유산이 상실된다. 이 시기에 그리스, 로마의 고전문학이 대부분 사라진 것이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진서들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손에 전해 내려오는 그 당시의 고전작품들은 중세기에 다시 만든 필사본이다. 7세기 8세기에는 기독교 관련 서적이나 고전작품들을 제법 많이 필사본으로 만들었다. 장시간에 걸쳐 대량손실로 이어진 이런 비극은 한 가지 원인으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무엇보다 종교적 탄압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초기에는 기독교와 관련된 서적을 제거하다가 그 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받자 그때부터는 반기독교적이면 즉 이교도의 서적을 체계적으로 제거했던 것이다. 물론 로마의 몰락과 함께 자연스레 문화적 유산이 함께 파괴되었음도 분명하다. 더구나 파피루스로 만든 고대의 서적은 다시 복원하고 손질하지 않으면 그 수명이 오래 지속되지 않고 사라지게 마련이다. 비잔틴 제국(동로마제국)에서는 제법 고전작품의 보존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 외 서로마제국 등 서방세계에서는 일부 지식인이나 부호들의 손에 의해 간신히 문화유산이 전수되었을 뿐이었다. 15세기 서양의 인쇄기술이 개발되면서 비로소 점차 고대 고전작품들이 넓은 독자층을 얻게 되고 분서갱유의 위험성도 사라지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로부터 시작한 로마제국은 476년 게르만 족장 오도아커(Odoaker)에 의해 멸망한다.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는 첫째 황제와 이름이 같은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Romulus Augustus)였다. 뒤렌마트의 [로물루스 대제] (Dürrenmatt. Romulus der Große.1949)는 바로 이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다루고 있다. 여러 개 붙어 있던 금 잎이 다 떨어진 황금 관을 겨드랑이에 끼고 로물루스는 역사의 장을 마감하며 천천히 무대에서 걸어 나간다. “이렇게 해서, 신사 여러분, 로마제국은 역사의 장에서 사라졌던 것입니다.” 1966년 원어 극으로, 1969년에는 우리말로 나는 이 ‘비역사적인 역사극’을 드라마센터의 무대에 올렸다. 나로서는 연극인생의 첫 발걸음을 실제로 내딛는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하였다.

 

동쪽에 붙어있던 로마제국은 395년 동로마제국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지금은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동로마제국은 1453년 오스만제국에 의해 멸망한다. 이스탄불은 비잔틴(Byzanz) 이라고도 부르기에 요즘은 동로마 대신 주로 비잔틴제국 혹은 비잔틴 문화라 부른다. 동로마제국은 즉 비잔틴제국은 로마의 국가체제, 그리스 문화, 기독교 등의 혼합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참고로 독일정신은 게르만 전통, 그리스 고전문화, 기독교의 합일체로 형성되어있다고 분석한다.

 

기독교 교부(Church Fathers). 콘스탄틴 황제가 세례를 받고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된 후에는 반기독교적인 희극공연이 무대에서 사라졌을 것이라 짐작을 하게 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기독교는 이제 이교도의 종교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기독교가 조롱의 대상이 되자 지도자 회의에서는, 기독교를 조롱하지 말 것, 신부나 수도승의 옷을 무대에서 욕되게 하지 말 것 등을 결의해서 공포하고 있었다. 극장에서 예수교인들이 조롱을 받고 있는데 이를 보려고 교회를 비워놓고 그곳으로 달려간다고 콘스탄틴노블의 주교 요한네스 크뤼소스토모스 (Johannes Chrysostomos, 349 – 407)가 한탄하는 기록도 보인다. 기독교인들이 이런 희극무대 위에서의 조롱을 얼마나 견디기 어려워했고, 한편 분노했는지는 짐작이 간다. 초기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희극(mimus, atellane)에 대해, 더 나아가 연극 전반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왜 연극을 혐오하며 반대하게 되었는지는 쉽게 이해가 간다. 연극을 사탄의 예술이라 부르며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한 비잔틴 교회의 지도자가 바로 크뤼소스토모스 주교였다. “네가 극장에 가서 벌거벗은 여배우의 몸뚱이를 더듬어 본다면 잠시라 해도 너는 가슴에 엄청난 죄악의 불씨를 붙이는 것이다.” 교회지도자들은 처음부터 그리스 전통연극에 비판적이었다. 그리스가 연극의 수호신으로 떠받치는 디오니소스(Dionysos)는 이들 지도자들의 눈에는 사악한 악마에 불과했다. 기독교교리를 논리적으로 정립하고 분석한 테르툴리안(Tertullian, 대략 150-230)이 보기에는 연극은 악마들의 짓거리인 것이다. 기독교인이 희극을 보러 간다면 그만으로도 그런 사람은 신성모독에, 율법을 저버린 결과가 된다. 세례 받을 때 악마와는 어떤 거래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그런 곳에서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다. 그러니 하나님의 성전에서 나와 악마의 소굴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향해 받쳐 기도하던 그 손으로 극장에 가서 박수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중세기까지 연극이 발을 붙이지 못하고 움츠린 것은 기독교 교리를 정립한 교부(敎父) 중 한 사람이었던 이 사람의 영향이 가장 크다 할 수 있다.

 

4세기 경 기독교가 점점 자리를 잡아가면서 연극을 좋아하는 일부 기독교인들 중에는 신화적 특성이 강한 그리스 연극과 같은 고전극은 수용해도 믿음에 별 해를 주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은 갖게 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는 자서전적 “참회록”(Confessiones. 397-401에서 자신도 젊었을 때 연극이 너무나 크게 마음을 끌었기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국 많이 부족했었다고 참회하고 있다. 그러면서 연극은 악마의 소산물이라 낙인을 찍고 있다. 하지만 수업시간에 고전비극이나 희극을 다루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로마는 피를 보는 검투사들의 격투나 긴장감 넘치는 마차경기, 야하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즉흥적인 희극놀이에 탐닉했다. 향락문화에 빠져있던 로마 시민들에게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장벽은 보이지 않았다. ‘민족이동’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기술한 역사가이며, 초기 기독교 교리를 세운 독일의 신학자인 살비안(Salvian von Marseille. 400-480)은 심지어 로마의 멸망과 연극을 연계시키기도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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