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연극(2)/ 이재진

종교와 연극(2)

이재진

 

 

I. 기독교와 로마연극 II. 기독교와 중세연극 III. 수난극/오버암마가우 IV. 잔 다르크/요한나 V. 맺는 말

II. 기독교와 중세연극

 

– 지난번 ‘기독교와 로마연극’에서 보았듯이 인간의 모방본능(연극)은 타고난 것이다. 그리스의 연극전통은 로마로 이어진다. 로마는 문화와 예술보다는 전투에 더 어울리는 민족이었다. 로마의 멸망과 놀이문화를 연계시킬 정도로 로마시민은 유흥과 놀이에 탐닉했다. 그러니 즉흥적이고 외설적인 연극도 로마멸망에 일조한 셈이다. 연극은 마차경기, 검투사의 격투기와 같은 거대한 콜로세움 경기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색다른 연출과 기발한 소재의 발굴에 결사적이었다. 기독교가 국교가 된 후에도 연극은 세례나 십자가의 죽음, 부활 등 기독교 예식이나 성스런 기적까지도 웃음거리로 삼아 무대에 올렸다. 말씀의 종교인 기독교와 보여줌의 속성을 갖은 연극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기독교는 연극공연을 제한하거나 금지시켰다. –

 

암흑시기

로마시민들이 한곳에 모여 마구 즐기는 놀이에는 폭력성이 응집되기 마련이었다. 마차경기나 검투사의 격투기는 물론 연극도 대중성과 연계되어 있었다. 세상을 재패한 전투적인 로마의 자존심이나 전통이나 덕목을 과시하는 이런 자리는 교회의 권위에 반하고 교회의 권위를 훼손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 덩어리로 어울려 유흥을 즐기며 마음대로 날뛰는 그와 같은 풍토를 기독교는 받아 드릴 수가 없었다. 실제로 폰티우스 필라투수는 관중의 요구에 따라 살인자 바라바스를 풀어주고 예수에게 사형을 내리지 않았던가! 검투사가 결정적인 순간 관중에게 몸을 돌려 관중의 의사에 따라 상대를 죽이듯 대중의 뜻에 따라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이다. 교회는 오랫동안 연극을 거부했다. 극장 문만이 닫힌 것이 아니라 지난번 ‘분서갱유’에서 살펴보았듯이 연극에 관련된 서적까지도 마구 불살라 버렸다. 공연문화에 멈추지 않고 기독교는 간섭의 폭을 예술, 정신문화 전반으로 넓혀갔다. 점차 인간은 하나님을 함부로 손댈 수 없게 되었다. 교회 밖에서는 하나님을 그리거나 조각하거나 함부로 노래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 이외는 어느 것에도 손댈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를 우리는 소위 중세의 암흑시대라 부른다. 수백 년간 연극무대는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가 연극을 죄악시하고 척결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예배와 종교극

기독교에 버림을 받으며 위축되었던 연극은 중세에 이르기까지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다. 동로마제국 즉 비잔틴 제국에서는 그나마 모방, 묘사 등 보여줌의 문화에 상대적으로 관대했다. 비잔틴 교회에서는 7세기경에 마리아와 요셉이 질투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표현할 정도로 표현예술에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다. 8세기에 성화를 둘러싼 논쟁도 있었으나 결국 예수 그리스토를 그릴 수 있게 허락되었다. 성화의 표현이 비잔틴 교회에서 합법화되고 예식화 되자 이는 점차 서방교회로 이어졌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표현하는 자유는 성화의 경우처럼 동부지역 교회에서 시작하여 점차 서방으로 건너가 수용되었다. 비잔틴 교회의 중심이었던 소피아 성당(Hagia Sophia)이 연극무대로 사용됨을 개탄하는 주교도 있었지만 이는 교회가 점차 예배에 연극형식을 도입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10세기 경 연극형식을 예배의 한 요소로 받아드리자 종교극이 개발되고 연극행위는 비로소 다시 생기를 얻게 된다. 교회는 연극의 특성을 활용하기에 이르게 되고 기독교의 믿음과 연극의 특성이 손을 잡게 된 것이다. 연극을 거부한 교회는 이제 연극을 재생시키는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그리스 사람들이 디오니소스 등 올림포스 신들을 연극의 무대 위에 세워 그리스 고전극의 전통을 창조했던 것처럼 이제 기독교는 교회라는 무대 위에 여호와의 제단을 세우며 종교극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로서 연극은 소생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는 누구에게나 삶의 한가운데에 믿음과 교리가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종교극을 통해 사람들은 경건함과 믿음을 자연스레 접하고 교회는 교회대로 교리를 직접 관객과 만나게 함으로서 더욱 강건해 진다고 믿었다.

 

 

incarnation

예수는 인간의 육신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성경은 적고 있다. 성부, 성령과 함께 이런 육신화 된(incarnation) 성경속의 인물들을 형상화해도 되는 것일까, 있다면 어느 정도까지 그럼 허용이 되는가?!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함은 그나마 관대한 편이었지만 예수를 노래나 혹은 무대에 직접 표현해도 되는가?

 

성화(Ikone/icon)를 그릴 때 예수는 실체를 그대로 표현해도 되었다. 제한적이었지만 인격화된 예수 그리스도는 물론 성자, 성령도 상징적으로 그릴 수가 있게 되었다. 점차 천사, 성자, 순교자들이 포함되기 시작했다. 성모 마리아, 악마나 이교도의 신들도 대상이 되어 자리를 잡게 된다. 이런 형상들은 모두 인간처럼 육신을 얻고 표현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무대에 직접 세우기에는 여전히 어려웠다. 무대를 통해 직접 대면하게 된다면 지나치게 인간화, 인격화 되어 일반대중들에게는 친근감을 주고 흥미를 끌게 되겠지만 교회의 권위나 일신교적인 교리에는 위배된다. 이슬람교에서는 알라 신이나 마호메트를 화폭에도 담지 못한다. 성스러움을 직접 형상으로 표현하는 자체를 신성모독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달구지무대

종교극 중에는 부활절 극이 가장 일찍 시작되었다. 부활절이 되면 예수의 삶을 무대에 장면별로 표현했다. 그 다음이 수난극이다. 예수의 고난의 삶을 무대 위에 연출했다. 성탄절 극이나 성체축일, 기적이나 성자들의 이야기도 극화시켰다. 특히 인기를 끌었던 종교극은 신비극이었다. 종교극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주로 소재로 삼았지만 그 시대상이나 민속적인 요소를 가미해 넣었다. 10세기 경 부터 부활절 축제에 문답형식의 본격적인 연극형태가 나타났다. 교회의 예배형식의 일부라 해도 물론 연극적 재미는 어느 정도 갖추어지기 마련이다. 반듯한 고정 무대는 없었다. 공연은 주로 교회에서 이루어졌지만 13세기에 접어들면서 연극무대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터나 야외장소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무대는 여러 장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동시무대’(Simultanbühne/ multiple stage)였다.

 

– ‘동시무대’는 14, 15세기 영국에서 주로 사용되던 ‘달구지무대’(Carriage stage/Wagenbühne)에서 유래되었다. ‘달구지무대’란 무대장면을 마차 위에 부착시키고 관객들 앞을 지나가는 무대형식이다. ‘동시회전무대’는 여러 연결된 장면을 연속으로, 동시에 볼 수 있게 설치해 놓은 무대이다. 이 무대는 신비극에서 많이 사용하였다. 주로 시장터 주변에 무대장면을 모두 연결해서 세워둔다. 이는 근대연극에서도 즐겨 사용하는 연극무대이다. 극작가 네스트로이(Nestroy. 1801-1862)의 작품에서는 서로 다른 두 장면이 위 아래로 동시에 무대에 설정되는가 하면 연출가 피스카토아(Piscator. 1893-1966)는 영화의 기법처럼 여러 장면을 무대에 동시에 세워 연출했다. –

 

성탄절 극 특히 부활절 극은 전 유럽에 걸쳐 공연되었다. 예수의 수난을 다룬 수난극은 며칠에 걸쳐 공연이 이어졌고 마을이 모두 마음을 모아 하나님에게 받치는 종교적 성격이 짙었다. 종교극의 배우들은 원래 승려들이었으나 점차 마을사람들이 맡게 되었다. 여자 역은 젊은 남자배우들이 맡았다. 여인들의 몸뚱이를 드러내는 것을 그 당시 죄악시 하였다. 여성이 여성 역을 맡게 된 시기는 프랑스의 경우 대략 14세기 경, 독일은 대략 16세기이다. 교회는 물론 사회에서도 이를 허용하거나 용납하지 않았다. 다음 장 오버암마가우의 수난극에서 보듯 마을 사람들 모두가 공연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화는 문답형식이었다.

 

 

[누구를 찾는가?] (Quem-quaeritis?)

[무덤 참배]라고도 하는 이 작품에서 천사가 텅 빈 무덤 앞에서 슬퍼하는 세 여인들에게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누구를 찾는가?]는 예배 중 질의문답식으로 이루어지는 대회형식으로 된 최초의 대본이다.

 

천사 이 무덤에서 누구를 찾는가? 그대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여인들인가?

여인들 나사렛 예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분을 찾습니다, 천사님.

천사 그분은 여기에 없다. 예언하신대로 부활하셨다. 가서 널리 알리거라, 그분은 무덤에서 나오셨다고.

 

위의 예문에서 보듯이 예수가 부활했지만 여인들은 무덤가에서 이를 믿지 못한다. 의심쩍어하는 여인들에게 천사는 이렇게 말한다. “믿어야 한다, 예수가 무덤에서 나와 부활하셨으니!” 천사는 자신이 말했기에 믿어야 한다고 따지듯 주문한다. 예수도 자신의 부활을 믿지 않는 제자들에게 못이 박혔던 손을 보여주며 믿음이 적음을 안타까워하지 않는가?! 이 작품은 예배를 드리면서 두 패로 나뉘어 노래로 ‘문답하는 형식’(antiphonal)으로 가장 오래된 중세기 연극인 셈이다.

 

문답 형식으로만 이야기가 전달되지 않고 여인들은 대화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질문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말을 먼저 꺼내기도 한다. 지금까지는 보지 못하던 연극형태가 나타난 것이다. 예배 속에 도입된 연극형태는 오직 대화형식에 머물고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에 있을 때였다. 이야기의 주체가 대화 속에 가시화되어 나타나면 안 되었다. 보여주면 아니 되고 오직 들려주는 형식만이 허락되었다. 기독교는 보여줌의 종교가 아니라 말씀의 종교임을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는 간접화법이 아니라 직접화법으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연극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여인들은 승려들의 무리로 이루어진 코러스에서 벗어나 제단이 있는 곳에 서서 예수의 부활을 알리는 천사에게로 다가간다. 예수는 등장하지 않지만 벗어 놓고 나간 듯 예수의 성의가 걸린다.

 

 

mimesis

문답형식의 연극형태는 대화로만 전달되기에 연극적인 보여줌은 미미하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이야기 식 전달 즉 디에게시스(diegesis) 밖에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극적 움직임, 모방, 표현 즉 미메시스(mimesis)는 보이지 않는다. 예배 속에 도입된 비연극적 대화체 연극은 보여줌 보다는 말해줌이, 앎보다는 믿음이 우선이었다. 연극적 형태를 도입하고는 연극적 특성을 빼버린 것이다. 하지만 ‘보여줌’이라는 연극적 특성은 점차 종교극이 활성화되면서 살아나기 시작했다. 보여줌을 애써 회피하던 서부교회도 비잔틴 교회와를 쫓아 보여줌의 연극을 받아드리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는 이야기 형식의 디에게시스와 드라마의 미메시스를 소개하고 있다. 플라톤은 문학자체의 의미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플라톤은 미메시스를 일종의 사기라고 보았고 창조예술전반을 국가에 해를 주는 행위로 보았다. 결국 드라마를 적대시했다. 하기야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처럼 허구의 서술문학 자체를 반대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과는 반대로 드라마(비극)가 아테네 문화전반에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커다란 활력소가 된다고 이를 옹호하였다. 문학의 높은 가치와 교육적 기능을 아리스토텔레스는 강조하며 연극(비극)이 인륜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고양시킨다고 주장했다. 참다운 존재는 문학의 표현형식과 내용과 맞물려 실현된다고 즉 창작의 문학세계 속에 존재의 실체가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했다. 인간의 감각에서 동떨어져 존재하는 우리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플라톤이 말하는 순수한 이데아를 아리스토텔레스는 거부했다.

 

 

[시학] (poetic)

 

– [시학]([문예론])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가 대략 기원전 335년 예술창작에 관해 강의한 내용이다. 1, 2부로 되어 있었으나 1부만 전해오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예론은 오늘의 주제가 아니고 더구나 이에 대한 자료는 필요하면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으니 여기서 길게 설명을 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학]은 연극인들에게는 필독서이고 특히 비극을 정의해 놓은 6장은 서양연극의 근본이라 할 수 있고, 서사극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모른 척 지나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

 

번역되어 있는 [시학]을 읽어보면 무슨 뜻인지 몰라 제대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2천 5백여 년 전에 다른 문화권의 석학이 쓴 글을 간단히 번역하기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인터넷에서 번역을 몇 개 찾아 나란히 열거해 보았으니 비교해 보시라. 영어번역도 참고로 달아 놓았다. 애매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밑줄 쳐서 나름대로 해설을 붙여 보았다.

 

“Tragedy, then, is an imitation of an action that is serious, complete, and of a certain magnitude; in language embellished with each kind of artistic ornament, the several kinds being found in separate parts of the play; in the form of action, not of narrative; through pity and fear effecting the proper purgation of these emotions.

 

“비극은 진지하고(1) 일정한 크기를(2) 가진 완결된(3) 행동(4)을 모방(5)하며, 쾌적한 장식을(6) 가진 언어를 사용하되 각종의 장식은 작품의 상이한 제부분에 따로따로 삽입된다. 비극은 드라마적 형식을 취하고 서술적 형식을취하지 않으며(7) , 연민과 공포(8)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바로 이런 감정의 카타르시스(9)를 행한다.” (천병희 번역)

 

“비극은 진지하고 완결된 일정한 크기를 가진 행동을 모방하며, 쾌적한 장식을 가진 언어를 사용해서 각종의 장식은 작품의 상이한 모든 부분에 따로 따로 삽입된다. 비극은 드라마적 형식을 취하고 서술적 형식을 취하지 않으며,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하다. (이상진 번역)

 

“비극이란 심각하고 완전하며 일정한 크기가 있는 하나의 행동의 모방으로서, 그 여러 부분에 따라 여러 형식으로 아름답게 꾸민 언어로 되어 있고 이야기가 아닌 극적 연기의 방식을 취하며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하는 것이다.” (해피엔드)

 

-해설-

1) 진지하고(serious): 높은 신분의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문제를 말한다. 비극에서는 주인공의 신분(Ständeklausel/estates-clause)이 중요하다. 왕이나 귀족이 비극의 대상이다. 하층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주인공의 신분이 높으면 높을수록 비극의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는 낙차(Fallhöhe)의 깊이가 커지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신분이 서민으로 내려온 비극을 시민비극(bürgerliches Trauerspiel/ domestic tragedy/tragédie bourgeoise)이라 한다. 18세기 중엽부터 George Lillo, Lessing, Schiller 등의 시민비극이 등장하고 있으나 주인공의 한쪽만이 서민이기에 아직은 반쪽 시민비극이다. 19세기에 와서야 남 여 주인공이 모두 시민계급으로 내려왔다. 예를 들면 헵벨(Friedrich Hebbel. 1813-1863)의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 1843).

 

2) 일정한 크기(a certain magnitude): 하루에, 한 곳에서 벌어지는 한 가지 사건을 다뤄야 한다는 시간, 장소, 사건의 단일성을 요구하는 소위 ‘비극의 삼 원칙’ 혹은 ‘비극의 삼 통일’ 법칙이다. 여기서 말하는 ‘일정한 크기’란 물론 세 가지 중 사건의 단일성을 뜻한다. ‘비극의 삼위일체’라고도 혹 번역하지만 이는 적절하지 않다. 기독교의 교리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삼위일체(Trinity)와도 부딪치고 더구나 [시학]에는 세 가지 법칙을 요구하는 이론은 들어있지도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연극)을 산문과 구별하기 위해 시간(5장)이나 사건(23장)에 관한 제한이나 규정은 두고 있으나 장소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리스 비극은 아침에 시작한다. 한 사건을 하루 동안에 물고 늘어진다, 그렇지만 극이 벌어지는 장소의 변화는 상관하지 않는다. 장소의 단일성은 르네상스에 와서 프랑스 이론가들이 이 법칙에 추가한 것이다. 지나친 장면 변화를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장소의 제한은 이탈리아의 인문학자 스칼리게르(Justus Scaliger.1540-1609)의 이론을 받아드린 것이다. 이는 쉽게 전환시키기 어려운 화려하고 복잡한 바로크 무대(Barocktheater)와 관련이 있다. 몰리에르, 라신느와 함께 프랑스 고전주의 연극을 대표하는 코르네이유(Pierre Corneille. 1606-1684)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장소의 제한을 두지 않았지만 그런 제한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셰익스피어는 이런 3법칙을 무시했다. 괴테나 실러는 셰익스피어로 전향하면서 이 법칙의 굴레를 뛰어넘는다. 그로서 결국 프랑스의 연극전통은 물론 총체적으로 프랑스 정신문화에 예속되어 있던 독일은 문화적으로도 프랑스의 틀에서 벗어나게 된다. 뒤렌마트는 [물리학자들](Die Physiker. 1961)에서 의도적으로 이 ‘삼 통일’ 전통기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3) 완결된(complete): 막이 내릴 때 사건이 완전히 종결되어 있는지 아니면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열려 있는지에 따라 우리는 일반적으로 희극과 비극으로 분리 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에 따르면 비극은 종막에 가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상태라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건의 흐름이 처음과 중반 그리고 종반이라는 세부분으로 된 구조를 바람직하게 보았다. [시학]의 11장에서 설명하기로는 이 세 부분사이를 ‘재회’ 혹은 ‘상봉’(Anagnorisis’)이라는 기법이 연결해 준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남으로서 갑자기 사건의 전모가 뒤집어엎어지고 행과 불행이 뒤바뀌게 만드는 기법이다. 예를 들어 엘렉트라는 동생 오레스트를 만나 아버지의 원수인 어머니를 죽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간의 다시 만남만을 뜻하지 않고 사건(인식)의 되 뒤집기 또한 이 기법에 속한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오이디푸스가 점차 사건전말을 인지하면서 고통과 불운의 강도는 더욱 커진다. 이로서 8번에서 설명하듯 애통함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서양연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극 이론과의 기나긴 줄다리기 속에서 변화하고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중 프라이타크(Freytag 1816-1895)의 드라마 이론을 소개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극작가에게는 교과서라 할 수 있는 [드라마의 기법] (Die Technik des Dramas. 1863)에서 프라이타크는 사건의 변화과정을 피라미드 구조로 상정했다. 5막으로 구성된 극을 모델로 제시했고 소위 기승전결의 “도입 – 상승 – 클라이막스 – 반전 – 파국” 등 다섯 부분으로 분류했다.

 

4) 행동(an action): 사건의 흐름, 극의 줄거리

 

5) 모방(mimesis/imitation): 묘사, 표현, 전개

 

6) 쾌적한 장식(artistic ornament): 귀족들이 운율에 맞추어 쓰는 고양된 언어. 1번에서 설명한 주인공의 신분과 관련이 있다.

 

7) 서술적 형식이 아니라(not of narrative): 이야기체가 아니라 대화체로 전개하며 묘사한다. 5번의 미메시스와 연관된다.

 

8) 연민과 공포(pity and fear): 독일의 극작가이며 극 이론가인 레씽(Lessing. 1729-1781)은 eleos, phobos를 ‘연민과 공포’로 번역했다. 이 번역에 대한 논란은 연극사에 오래 지속되었다. 지금은 ‘애통(한탄)과 경악(무서움)’을 더욱 정확한 번역으로 받아드린다.

 

9) 카타르시스(the proper purgation): 감정의 순화.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목적은 관객을 ‘카타르시스’에 이르게 유도하는 데 두었다. 이런 무대를 전형적인 환상극(illusionstheater)이라 부른다. 환상극에서는 관객을 무대현실에 빠져들게 만든다. 브레히트는 무대가 관객을 마취상태로 몰아가서는(‘관객의 납치’라고도 표현한다.) 안 된다고 생각한다. 관객을 환각상태로 유도하기 위한 막이나 조명을 서사극에서는 그래서 제거하거나 차단한다.

 

브레히트는 자신의 서사극을 ‘非 아리스토텔레스 연극’이라고 정의했다. 3번에서 설명한 프라이타크의 피라미드 구조를 서사극은 무너트린다. 서사극에서는 극이 끝날 때 상황은 종결되지 않고 열린 상태로 남겨 놓는다. 그러므로 서사극에 비극은 없다. 더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대화체의 틀에서 벗어나 상당부분 이야기체(서사적)의 기법을 사용한다.

 

밑줄 친 부분을 중심으로 쉽게 풀어서 번역해 본다.

“높은 신분의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단일 사건을 한정된 시간 안에 전개해서 종막에 가서는 완전히 사건을 매듭지어야 한다. 리듬과 멜로디를 그때그때 달리 사용하고 고양된 언어를 쓰데 이야기체가 아니라 대화체로 이를 표현한다. 이를 통해 애통함과 두려움을 관객에게 심어주어 감정의 순화를 불러일으킨다.” (이재진)

 

 

학교극

위에서 밝힌 것처럼 비잔틴 교회는 서방측 교회보다는 고대 그리스 연극전통을 쉽게 받아드리는 분위기였다. 동쪽 지역에서 연극을 예배형식으로 받아드리자 이는 빠른 속도로 유럽 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비잔틴 교회의 연극에 대한 관심과 수용 덕분에 연극은 소생하기에 이른 것이다. 더구나 성당이나 도시가 점점 더 거대해 지면서 보여줌의 욕구와 필요성이 극대화 되고도 있었다. 점차 극의 대본은 형식이 다양해지고 내용이 풍부해지며 발전해 나갔다. 예배형식, 축제, 야외극 형태로 이어지던 연극은 점차 성탄절축제나 부활절 축제로 발전하게 되고 결국 수난극, 신비극, 도덕극, 학교극 등으로 계승된다. 라틴어 학습에 주안점을 두고 개발되었던 중세의 학교극은 어린이/청소년극의 효시이다.

 

– 학교극에 관해서는 오래되었지만 [한국연극]에 이미 기고한 적이 있어 여기서는 다루지 않았고 신비극, 도덕극만을 간단히 소개한다. 수난극에 관해서는 별도로 다음 장에서 정리해 보았다. –

 

 

신비극(Mystery play)

신비극은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종교적 내용을 담은 이야기 형식이다. 주로 영국과 프랑스에서 널리 퍼져있었다. 14세기에 이르러 기독교적 내용을 담은 드라마, 음악극의 형식을 갖추게 된다. 그 당시 종교드라마는 보편적으로 예배의 일부로 그에 예속되어 교회 안에서 공연되었다. 하지만 신비극은 종교적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교회예식과는 별도로 공연이 이루어졌다. 신비극은 중세기에 교회 측보다는 서민들 사이에서 인기와 즐거움을 주던 볼거리였다. 원래 라틴어를 사용하다가 독일의 겨우 점차 독일어로 바뀌게 된다. 독일어(deutsch)라는 단어 자체도 서민들이 즐겨 쓰고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부활절 극(Easter Drama)이 여기에 속한다. 부활절 극은 전체 예수의 수난극 중 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14세기경에는 아주 짧게 삽입되어 있다가 점차 그, 규모가 커지더니 끝내 며칠에 걸쳐 공연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교회의 지원과 감독을 받기는 했지만 시민들이 시장터에서 공연을 하기에 이르렀다. 시민들은 이와같이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최후의 심판 등을 교외 밖 시장터나 공공장소에서 막을 올렸다. 마을 공동체의 시민들이 배역을 맡게 되었고 점차 부활절, 성탄절 등 기독교 축제일에 맞추어 막을 올리게 되었다.

 

 

Jedermann/Everyman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신비극은 잘츠부르크 축제극 [예더만]([에브리맨])이다. 부유한 한 남자의 죽음을 다룬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 1874-1929)의 이 신비극은 1911년 베를린에서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가 연출했다. [Jedermann]은 1920년부터 매년 잘츠부르크 축제극으로 공연되고 있다.

 

중세 신비극의 모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이 신비극에는 하나님, 악마는 물론 죽음, 재물, 믿음 등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도 의인화되어 무대에 등장한다. 부유한 한 남자가 갑자기 죽음에 직면한다. ‘죽음’은 이 ‘누구나’(Everyman)를 하나님에게 끌고 가려한다. 충직한 하인이나 친구들, 돈이던 어느 것도 무덤으로 동행하려 들지 않는다. 믿음이 ‘누구나’를 기독교로 귀의시키자 믿음을 다시 찾은 ‘누구나’는 평온한 마음으로 끝내 무덤에 들게 된다.

 

 

도덕극(Morality Play)

신비극은 14세기에 발생했고 신비극에서 파생된 도덕극은 15세기, 16세기 크게 발전되었다. 교훈적이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내용을 담은 도덕극은 중세에 가장 사랑받던 연극이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에서 크게 유행했다.

 

도덕극은 비유극이다. 극중 인물들은 쾌락이나 탐욕 등 부도덕한 인간의 속성을 드러낸다. 그런 과정에서 이웃사랑, 자비 등 도덕성을 교훈적으로 비유한다. 그렇다고 고리타분한 훈장식의 가르침을 주려고 관객을 괴롭히지는 않는다. 부도덕함을 재미있고 희극적으로 관객을 무대 위로 끌어드려 끝내 교훈적인 결말을 이끌어낸다. 널리 사랑받던 도덕극의 소재로는 갑자기 죽음을 맞는 인간을 다루는 이야기 등이다. 돈이나 주위의 도움으로는 이 사람의 구제가 불가능해 진다. 결국 선행과 종교적인 믿음만이 구원을 주게 된다. 촬스 디킨스(Charles Dickens)가 19세기의 유럽사회를 풍자한 스크루지(Scrooge) 이야기는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이야기다.

 

 

종교극의 세속화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종교극은 위축되거나 도처에서 그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민중축제의 성격을 띠게 된 종교극은 그나마 도시를 떠나 시골로 숨어들었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라틴어는 점차 무대에서 사라졌다. 12세기 경 부터는 민중이 이해할 수 있는 토속어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내용도 토속적이고 민속적인 형태로 바뀌었다.

 

상권이 활발해 지고 상인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시장이 활성화되고 도시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이제 힘 있는 시민들이 공연을 지원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대학이 건립되었다. 교육 속에 연극이 접목되자 연극의 수용범위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끊이지 않는 전쟁이나 전염병 등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은 사람들을 더욱 깊숙이 교회 안으로 끌어들였고 이는 종교극의 활성화를 더욱 부추겼다.

 

13세기경부터는 수난극, 부활절 극 등이 전성기를 맞는다. 마리아, 예수가 몸소 등장한다. 성스런 사건이나 인물들을 보여주기를 꺼리던 시대는 이제 지나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극 이론을 다시 읽기 시작했고 보여줌의 진수인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극대화 시켰다. 익살스런 사육제극이 뒤를 이으며 점차 연극의 세속화가 시작되었다. 그래도 아직은 여전히 시민사회의 문화를 이끌던 연극은 종교적 배경을 담은 신비극, 도덕극 등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 중세기를 지나 종교개혁, 부분적으로는 18세기까지 기독교는 연극공연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서양연극을 유지, 발전시킨 주체는 무어라 해도 극장 문을 닫게 했던 바로 그 교회였다. 예배(liturgy)에 연극형식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성경공부나 라틴어 교육을 위해 학교수업에 연극을 활용했다. 교회 다음은 시민계급이었다. 십자군 원정 이후 기사계급이 점차 몰락하고 아랍권과의 교역이 활발해 지면서 상권이 일어나 시민들의 입지가 강화되고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시민극이 활성화 되었다. 교회, 시민 못지않게 연극발전에 기여한 주체는 귀족들이 중심이 되어 지원하고 운영하던 궁중 극(court theatre)이었다. 분산되어 살고 있던 귀족들은 때때로 궁전에 모여 음악을 듣거나 춤을 추거나 연극을 감상하였다. 궁중 극은 오늘의 주제에서 벗어남으로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

 

 

르네상스(Renaissance)

15세기, 16세기에 걸쳐 문예부흥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문예사조는 중세기가 끝나고 휴머니즘의 새로운 시대를 잉태하고 있었다. 르네상스는 ‘다시 태어남’이다. 유럽 예술문화가 인간성을 중시하는 그리스, 로마의 고전예술, 고전문학으로의 회귀함을 뜻한다. 르네상스란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갇혀있고 가려있던, 닫혀있고 막혀있던 창조적 인간이 긴 잠에서 다시 깨어남이리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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