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어디로 가야하나?/ 우상전

연극은 어디로 가야 하나?

 

우 상전(연극배우)

 

원로 소설가인 한수산 선생은 신문에 이런 말을 남기고 있다.

“종이책의 시대는 끝난 것 아닌가 싶다. 시나 소설, 희곡같이 과거에 만들어진 장르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 나이든 원로는 새로운 장르의 출연을 불안 속에서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적지 않은 예술가들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미래의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으며, 어떻게 해야 자신들의 예술이 살아남고 적응할 수 있을 것인가를 걱정하고 있다. 특히 순수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가장 ‘원시예술’(?) 장르인 연극만은 그저 조용할 뿐이다.

오로지 모여서 어떻게 하면 자존심 상하지 않고 거금의 ‘지원금’이나 받을 수 있을까를 궁리하는 게 전부다. 앞으로 10년 후면 어떻게 변할지도 모를 연극을 두고 그저 단편적인 평가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게 현실이다. 어디에서도 연극의 불확실한 미래의 변화에 대한 대책이나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어느 젊은 후배 연기자가 공연을 끝낸 후에 나에게 이런 문자를 보냈다. ‘샘 연극에 무엇이 문제인지 암 ^^ 연극을 연극인만 본다는 거심’ 관객은 없고 연극인들만 연극을 보는 게 한국연극의 문제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거다.

지금 순수예술은 위기다. 예전의 위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종이책’이 사라질 거대한 변화가 눈앞에 펼쳐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모두가 착잡한 심정으로 미래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돈타령’이 고작이다. 솔직히 연극인들 중에는 ‘지원금’ 때문에 연극이 망했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또 어떤 사람은 나에게 이런 말도 했다. 좋은 연극만 만들어만 준다면 돈은 얼마든지 끌어올 자신이 있다. 또 어느 장관은 100억을 투자해서 좋은 연극이 나온다는 보장만 있으면 그 정도는 충분히 투자할 수 있다고 외쳤다.

연극에서 ‘돈’과 ‘예술’은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 돈이 없어서(투자가 약해서) 연극이 안 되는 것인지 아니면 연극을 잘못 만들어서 돈이 귀해진 것인지를 단정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극은 도대체 어디로, 어떻게 가야하는 것일까? 정말 정부의 지원이 미약해서 발전을 멈춘 것이지 아니면 우리가 신뢰를 잃어 지원이 없는 것인지 알기조차 힘든 게 작금의 연극세상이다.

이 세상에 이유 없는 결과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인과응보’니 ‘사필귀정’이니 하는 말이 있게 마련이다. 물론 연극이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한 부분이 존재할 것이다. 이런 걸 우리는 ‘운명’이라고도 한다.

즉,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운명’이 존재하는 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개인의 노력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닌 게 세상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것은 아닌지, 아니면 알고도 변화를 시도하지 않은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좌우간 어쩌다가 연극은 이런 ‘운명’을 맞게 된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도 현실을 보는 우리의 ‘통찰’이 필요하다. 그래야 우리의 미래의 모습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몇 해 전 동아일보가 세계의 예술축제를 찾아다니면서 다룬 르포 기사를 실은 적이 있다. 헝가리의 축제였는데 이미 동유럽에서도 뮤지컬 공연이 차지하는 비율이 60%에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이런 판국에 연극적 전통이 허약한 한국에서 순수연극이 살아 갈 방법이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우선 나라가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 좋기만 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은 게 현실이다. 아무래도 후원이나 지원금이 늘어서 좋을지 모르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왜? 풍요로워지면

첫째로 예술이나 공연환경이 글로벌화 된다는 것이다. 자연히 외국 예술가들의 출입이 잦아지고 해외의 유명공연들이 많아지면서 당연히 우리 관객들의 만족도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자연히 우리의 예술이나 공연의 수준이 이에 이르지 못하면 자국민의 외면을 받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눈과 귀의 수준이 높아지고 입맛이 까다로워지면서 자칫 자국의 공연이나 예술을 업신여기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처럼 세상은 우리의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치 않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외의 유명 단체들의 공연에 관객이 몰리게 될 뿐만 아니라, 이제는 해외의 중요 축제에 직접 시간과 돈을 들여 참가하는 부유층(‘글로벌마니아’)도 증가하는 추세다. 한국에서 그들의 공연들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관람을 하는 부류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경제적 풍요와 사회의 안정이 ‘실험성’의 작품이나 ‘전위적’ 공연을 기피하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모두가 즐기는 오락성이 강한 작품이나 공연을 선호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연극이야말로 이런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해외 명품 브랜드가 더 호황을 맞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 연극은 이런 여러 현상들과 맞물려 있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여기서 우선 논하고 싶은 것은

내가 오랫동안 국립극장에 몸담고 있으면서 내 눈으로 확인한 다른 장르들의 현실을 우리의 연극 처지와 비교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우리 연극의 현실을 확인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게 중요하리라고 생각한다.

이는 고정관념의 노예(?)가 된 기성세대보다는 이제 막 연극에 입문하려는 신세대에게 좋은 정보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녹음기와 창극(판소리)

 

어느 날 갑자기 소리꾼들이 판소리를 (일부가 아닌) 오랜 시간에 걸쳐 ‘완창(完唱)’을 하는 시대가 된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 옛날에 소리꾼이 완창을 한다는 것은 필생의 소망이자 작업이었을 정도의 예술인생의 ‘대사건’이었다.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천재소년마저도 자그마치 다섯 시간짜리 완창을 하기도 한다. 그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예전에는 소리를 배울 때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일대일의 도제교육이 전부였다. 그래서 스승이 “오늘은 기운이 없어 못 가르치겠다!”고 하면 제자는 왔던 길을 돌려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배움의 길이 험하고 길었다. 소리 한 대목 배우기가 정말 어려웠다.

한데 어느 날 ‘녹음기’라는 게 생겼다. 그래서 이제는 매번 스승과 마주 앉지 않아도 녹음된 음성자료를 통해 듣고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음향기기의 발달이 판소리의 발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와 ‘완창’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를 반복적으로 듣게 되고, 예전과 달리 단기간의 교육에 의해서도 ‘완창’이 가능해지게 된 것이다.

거기다 판소리는 춘향가, 흥보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 다섯 마당뿐이다. 그러니까 배우고 익힐 레퍼토리가 다섯 개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국립창극단 단원들은 이를 열심히 익혀 마스터하면 ‘명창’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렇게 판소리는 이 다섯 마당을 통해서 음조와 가락을 익히면 모든 게 완성된다.

물론 판소리를 배우기가 쉽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잘 배울 수 있는 조건(행운)이 조성되어 있는 판소리가 연극인으로서는 부럽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입문하지 20년이면 ‘명창’이 될 수 있고, 본인만 열심히 하면 ‘명창’ 소리를 듣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게 된 게 국립창극단의 현실이다.

그에 비하면 연극은 어떠한가? 입문한지 30년이 지나도 ‘명창’ 소리는커녕 항상 신인(?)의 자세로 임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는 ‘메소드 연기를 찾아서’를 ‘한국연극’에 연재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현실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창극, 한국무용, 국악연주와 같은 ‘전통예술’은 우선 입문하는 자들에게 가르침을 줄 훌륭한 재능을 가진 ‘기능보유자’와 명확한 ‘교재’- 레퍼토리가 있어 입문자들에게 좋은 교육이 가능한 행운이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들의 노력에 따라 훌륭한 예술적 재능을 발휘할 교육체계가 마련된 게 전통예술이다. 이런 현실이 우리 연극인들로서는 부러울 뿐이다. 하지만 우리 연극은 교육체계가 미비해 아무리 20년을 노력해도 ‘명창’은커녕 여전히 서툰 기량으로 무대에 나서야 하는 게 현실이다. 이런 처지가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국립발레단의 경우를 보자

 

그럼 전통예술이 아닌 글로벌예술인 국립발레단을 예로 들어보자. 원로인 임성남단장이 물러나고 미국에 있던 김혜식단장이 취임했다. 그러자 그는 당시 러시아에서 조기 유학을 한 신인 발레리나 김지영과 김주원(지금도 활동)을 한국에 불러들였다. 당시 그들의 나이 19세였다. 이들은 중학교 시절에 당시 막 개방을 한 소련에 들어가 유명 발레학교에 입학해 그곳에서 수학을 했다.

그들을 통해서 발레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이를 시작으로 세월이 흘러야 주역무용수가 되던 발레단의 관행이 깨지게 되고, 새로운 ‘신데렐라’에 의한 발레단으로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또 그들이 국제 대회에서 입상을 해 한국인들의 관심을 끌게 되자 (항상 대학입시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는) 많은 학부모들이 자기 딸들의 ‘조기교육’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유학’이 붐을 이루어, 힘들고 고생스러운 발레가 한국에서 각광을 받는 무대예술의 총아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때부터 ‘조기’ 러시아유학이 한국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이에 힘을 받아 갑자기 대중의 관심을 끄는 ‘흥행장르’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거기다 유럽에서는 이미 발레가 체중조절과 신체부상에 따른 고통으로 인해 3D업종으로 전락하게 되고, 그나마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에서만 번성하던 발레가, 이마저도 정치적인 개방으로 서서히 쇠퇴의 길을 가던 참에 새로운 발레 중흥국(?)으로 한국이 부상하게 된 것이다.

물론 여기서 ‘대학입시’를 최고로 여기는 한국의 교육현실과 잘만 하면 자기 자녀들의 재능을 세계적으로 알릴 수 있다는 부모들의 ‘글로벌적 희망’까지 겹쳐 발레가 아주 매력적인 장르로 부상하게 된다.

이러니 자연히 발레가 한국에서 붐을 이루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지금은 세계의 발레리나, 발레니노를 가장 많이 양산하는 나라로 한국이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다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강수지’같은 발레리나가 세계적으로 성공한 ‘스타’예술가로 국내에서 각광을 받게 되자 발레는 더욱 ‘흥행장르’가 된 것이다. 이제는 남자 발레리노들이 ‘잘생기고 춤 잘 추는’ 새로운 트렌드로 여성관객들의 인기를 끄는 ‘스타’로 부각되면서 관객들의 환호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러니까 발레의 중흥은 뭐니 뭐니 해도 러시아의 ‘정치적 개방’에 있다. 구소련의 체제에서 단련된 발레예술이 정치적으로 개방되면서 유학생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탁월한 기술에 의한 인재양성과 ‘흥행 레퍼토리’의 전파, 그리고 안무기술이 세계에 퍼져나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을 한국이 제때에 받아들인 것을 첫손으로 꼽아야 할 것이다.

아마 국립발레단은 소련이 개방을 해 ‘러시아’가 되지 못했으면 비약은 꿈도 꾸지도 못했을지 모른다. 거기다 러시아의 유명 발레단으로부터 좋은 레퍼토리와 안무의 수입이 가능해져 한국발레는 중흥을 맞게 된 것이다.

이는 뮤지컬의 발전과도 맥을 같이 하는 일이다. 한국 뮤지컬이 미국으로부터의 레퍼토리의 수입과 직접적인 기술도입을 하지 못했다면 지금과 같은 붐을 형성하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오페라의 유령’을 과감히 직수입한 설도윤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다 ‘비디오’의 보급은 발레리나들의 기술혁신에 절대적인 공을 세우게 된다. 비디오를 통해 스스로 자신들의 약점을 수시로 보완하여 기술향상을 꾀하게 된 것이다.

이는 뮤지컬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자료 비디오’라는 과학의 힘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글로벌 장르들은 기술도입과 동시에 원산지의 유명 레퍼토리를 직수입해오므로 해서 비약적인 발전을 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스타’를 배출해 붐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오페라(교향악단)의 현실

 

국립오페라단도 발레단과 형편이 비슷하다. 이미 해외에서 완성된 레퍼토리와 기술의 도입, 입시제도에 따른 뒷받침, 그리고 해외로 진출이 가능한 교육여건 등이 발레와 동일하다.

실제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흥행이 가능한 레퍼토리는 오페라나 교향악도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따라서 당연히 신작(창작)오페라는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의사들이 오페라의 유능한 해설자로 등장하기도 하는 현실을 목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오페라도 발레처럼 ‘음악’이라는 ‘만국공용어’를 통해 한국의 공연무대에서도 얼마든지 발전을 도모할 잠재력을 갖춘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발레처럼 세계적으로 재능 있는 성악가를 배출하는 중요국가로 한국인들이 떠오르게 된 게 현실이다.

이건 여타의 교향악단들도 마찬가지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세계적 ‘음악연주가’로 만들고자하는 여망이 ‘조기교육’으로 이어지게 되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자 좋은 교육의 노하우를 갖고 있는 나라로 유학의 꿈을 이루게 된 환경으로 이어져 한국의 음악시장을 도약시킨 계기가 된 것이다.

이 역시도 대학입시를 통한 진학의 ‘잠재된’ 소망이 악기연주를 조기교육으로 정착시켜 인재양성의 밑거름이 되면서, 이러한 여건들이 세계 교향악단에서 한국인들의 활동영역을 크게 확대시킨 것이다.

물론 이 역시도 글로벌예술이 갖는 ‘흥행 레퍼토리’와 인재양성의 장점을 갖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즉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곡을 연주하지 못하게 하면 세계의 모든 오케스트라단이 전부 문을 닫아야 하는 실정에서 이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예술의 한계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 전통예술의 한계다. 창극, 한국무용, 국악관현악단 등 전통예술은 인재양성이 ‘한국’에만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자신이 우리 전통예술의 탁월한 예술가와 재능을 지속적으로 발굴해내지 못하면 발전을 멈출 수밖에 없다.

글로벌예술은 세계인 모두가 참여하므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발전에 동참하지만 전통예술은 그럴 수 없어 자칫하면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국립극장도 발레단, 오페라단, 합창단을 서초동 ‘예술의 전당’으로 보내고 나서 극장 측이 조금은 당황해 했던 게 사실이다.

왜? 창극단의 한정된 레퍼토리(다섯 마당)와 한국무용의 안무가 부족, 레퍼토리 개발의 취약, 또 국악관현악단의 작곡가와 우리 작품 (레퍼토리)의 취약은 솔직히 이들 장르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국과 한국인으로만 제한된 예술인재와 우리 손으로 만들어진 레퍼토리의 결핍은 국립단체를 이끌어 가는데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게 현실이다.

이를 통해서 예술의 장르에서 글로벌이 아닌 전통장르의 한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창조자의 인적고갈과 관객들과 친숙한 레퍼토리가 없으므로 해서 오는 한계는 전통예술장르의 미래를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요인이 된다는 것 말이다.

 

현대무용이 연극의 ‘반면교사’

 

그에 반하여 현대무용은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게 현실이다. 잘 알다시피 현대무용은 글로벌예술 장르다. 한국에서만 공연되는 전통예술 장르가 아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행운을 누릴 수 있는 글로벌 장르이면서도 전혀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는 현대무용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한국연극의 부조리적(?) 현실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현대무용도 역시 만국공용어인 춤과 음악으로 표현되는 예술이다. 따라서 다른 글로벌 장르처럼 인재양성에서 또 기술과 레퍼토리 도입, 해외교류에 이르기까지 전혀 어려움이 없다. 그런 점에서 연극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좋은 여건에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글로벌 예술의 장점을 갖고 있으면서도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현대무용은 우리 연극에게도 좋은 교훈이 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예전에 현대무용이 전성기를 이룰 때, 새로운 장르의 신선함으로 발레는 진부하다고 여겨졌을 정도로 감히 넘볼 수 없는 처지에 있었던 게 사실이다.

현대무용은 새로운 장르로 부각되어 이화여대를 중심으로 가장 현대적인 최고의 예술로 자리 잡았었다. 이대무용과를 중심으로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무용수들을 중심으로 호황을 누리던 현대무용이, 그런 현대무용이 지금에 와서는 겨우 국립현대무용단을 만들어 명맥을 유지하려고 드는 처지로 추락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연극계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게 현실이다.

직접적인 동기는 리더 격인 교수가 비리에 처하게 되면서 붕괴(?)의 길에 들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이 전부일까?

첫째, 새로움만을 추구하다가 관객들에게 난해하고 추상적인 재미없는 ‘실험무용’만으로 비쳐져 흥미를 잃게 된 점

둘째, 많은 무용과가 우후준순으로 생기면서 창조자들이 학교교수로 자리를 옮겨 현대무용이 이런 교수들에 의해 연례행사격인 ‘학교무용’으로 전락하게 된 점

셋째, 어차피 흥행이 되지 않자 ‘평론가’들에 의한 평가로 만족하며, 스스로 지성적인 예술로 치부하면서 ‘자가당착’에 빠져 발레에 밀리게 된 점

넷째, 그동안 관객들을 모을 성공적인 레퍼토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글로벌 장르로서 인재양성과 레퍼토리 개발 등의 장점을 포기해버린 점

다섯째. 자국에서의 창작을 포기하고 국제적인 페스티벌을 유치해 외국무용의 수입에만 의존해 스스로 창작의욕을 잃게 된 점.

이제 현대무용은 외국작품을 통해서 감상할 수 있는 장르로 전락해 버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글로벌예술’이면서도 관객들을 만족시킬 새롭고 획기적인 레퍼토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발레처럼 ‘스타’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무용수들의 ‘개인발표회’로 안주한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정말 주목해야 할 것은 현대무용이야말로 애초부터 관객을 받아 ‘흥행’을 시도하려는 의도를 가져 본 적이 없는 장르로 출발했다는 점이다. 개개인들의 경제적 부유함이 ‘흥행’을 외면하고 자신들을 과시하기 위한 ‘발표회’를 목표로 하는 ‘집안잔치’로 만족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발레가 ‘흥행’을 위해 줄기차고 피나는 노력을 한 것에 반해, 현대무용은 애초부터 ‘발표회’라는 태생적 결핍을 안고 태어나 결국 이게 발전의 ‘발목을 잡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다.

이를 통해 공연 장르에서 발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덕목이 관객을 모으려는 치열한 정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게 바로 장르 생존의 원동력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점점 ‘흥행’을 포기해 가는 (지원금에만 의존하는) 연극의 장래가 불안해지는 게 사실이다.

아무리 춤과 음악, 글로벌예술의 강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자신들의 안이함과 관객들의 외면, ‘흥행’을 위한 새로운 개척정신이 없으면 쇠퇴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현대무용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현대무용이 이미 한국이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가고 중산층과 새로운 귀족계급(?)이 생성되어 가는 한국현실에서 아직도 추상적인 ‘실험극’의 자세를 버리지 못해 채 관객들에게 아무런 자극도 주지 못하고 식상하게 한 점.

그러면서도 평론가들에게 질질 끌려 다니면서 그들의 호사에 공헌한 점을 그나마 한국예술에 대한 공로로 쳐야 할 것이다.

내용을 알 수 없는 춤으로 일관하고 이를 가장 지성적(예술적)이라고 여기며 – 현대무용은 제목부터 감히 다른 장르가 넘보지 못할 ‘철학적’이다. 새로운 재능 있는 ‘신인’을 발굴해내지 못해 발레처럼 ‘스타’를 부각시키지 못한 점 등에서 우리 연극의 ‘엘리트주의’와 아주 흡사한 점이 많다.

자유롭고 다양한 표현에다 섹시하기까지 해 현대인에게 가장 어필할 것 같은 현대무용이 한국에서 고전발레나 모던발레에 밀리고 있는 것은 우리의 ‘반면교사’로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교훈을 주고 있는 게 사실이다.

(초창기에는 남자무용수가 없어 연극배우들이 현대무용에 출연했다. 그래서 내가 따지고 보면 한국에서 현대무용의 남자무용수로는 1기에 해당한다.)

 

연극의 취약성

 

이러한 다른 여러 장르들의 비교를 통해서 한국연극이 처한 취약성을 금방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전통장르도 아니어서 ‘기능보유자’가 없어 자국에서조차도 제대로 된 교육이 불가능한 점, 그렇다고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해외로부터의 인재양성도 어려운 현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아직도 우리의 창작극이 미약해 한국의 대표적 ‘흥행레퍼토리’도 갖지 못해 관객들의 흥미를 유발하지 못하고 있는 점, 그렇다고 해외로 눈을 돌리지도 못한 점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창작극이 부실하니 당연히 연출력도 동시에 허접해질 수밖에 없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연극이 그토록 연기와 연출에서 발전을 이룩한 것은 ‘체홉’이라는 특출한 작가가 배출됐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을 소화하려니 ‘스타니스랍스키’도 나오고 온갖 연극기술이 발전하게 된 것을 상정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한국의 창작극은 배우의 입장에서 보면 등장인물에 ‘캐릭터’가 부재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솔직히 연기다운 연기를 할 만 한 배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히 ‘스타’가 배출될 수 없는 구조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인생에 대한 관조나 인간에 대한 통찰이 없이 그저 작가들의 ‘너스레’로 일관하는 깊이가 없는 작품이 태반이어서 배우도 연출가도 이런 작품에서는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건 창작극에서 ‘재공연’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국민레퍼토리’가 없는 것으로 충분히 우리의 현실을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대개 무대장치만 그럴 듯하면 ‘명작’으로 보이는 게 우리 창작극의 현실이다. 따라서 관객들의 관심을 끌 ‘스타’도 없고 그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일 ‘감동적인’ 작품도 일천한 게 현실이다.

 

우리 국립극단의 현실

 

이런 현실은 우리의 국립극단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가(또 있었는가)를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의 국립극단은 ‘창작극’이 우리 연극의 활성화를 위한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이건 국립극단의 레퍼토리에서도 분명이 알 수 있다.

그럼 ‘창작극’이 우리 연극의 희망이 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자.

먼저 번역극이 살아지고 ‘창작극’이 주도하는 연극계가 되었지만 어디에서도 국민들의 관심을 끌 ‘국민레퍼토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한국을 대표할 창작극을 꼽아보라고 하면 모두가 망설일 것이다.

그래도 번역극을 할 때는 ‘윤석화’나 ‘강태기’같은 ‘스타’라도 배출했다. 하지만 창작극이 연극계를 압도한 이후로는 그런 존재마저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대신에 오태석, 이강백, 이윤택, 김광림, 이만희, 이상우 등의 나름의 ‘스타’ 극작가들을 배출했다. 하지만 여전히 세계적인 작품은 고사하고 국내에서라도 우뚝 선, 모든 국민이 즐길 레퍼토리 하나도 건져내지 못한 게 현실이다.

그저 평론가와 일부 연극엘리트들을 ‘즐겁게’만 작업에 머물고 있는 게 현실이다. 흥행에 성공한 희곡도 없다. 이미 한물간 소재로 한 연극이 고작이거나. 아니면 일본의 ‘앙그라 연극’을 흉내 낸 난해한 ‘실험극’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정으로 ‘남북분단’을 이야기 하는 작품도 ‘산업화’의 어두운 구석을 다룬 작품도 아니면 ‘돈에 미쳐 날뛰는’ 우리의 모습을 풍자한 ‘흥미로운’ 작품도 없다. 솔직히 국산영화만큼도 감동도 재미도 없는 게 우리의 창작극이다. 그걸 위해서 우리의 국립극단은 전력을 쏟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한마디로 동숭동의 민간극단과 차별화 되지도 못했다. 물론 제작비가 넉넉해 국립연극이 고급스럽게 보이기는 하다. 그런데도 국립극단을 위시한 한국 연극계는 조악한 창작극으로 연극의 생존을 유지하려고 든다. 그것도 지원금으로 말이다.

솔직히 이런 현실이라면 차라리 ‘창작극’이 아닌 배우들의 기량을 향상시켜 ‘볼거리’로 삼는 게 더 빠른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힘에 부치는 창작극에 매달리기보다 실력 있는 배우를 양성하는 게 덜 힘들고 공연에서도 ‘볼거리’가 생겨 생색을 내기에 좋다는 생각이 든다.

국립오페라단만 해도 거금을 들여서라도 과감히 세계적인 공연을 한국에 들여오고 이식시키고 있으며, – 그래서 공연시간만 5시간이 넘는 ‘수입 오페라’를 공연하기도 해 한국 관객들과 매스컴으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국민 누구도 ‘창작오페라’를 살리지 않는다고 불만을 표하지도 않고 오페라계도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그런데도 국립극단만이 ‘원죄의식’에 휩싸여 여전히 ‘희망도 없는’ 자국희곡의 진흥과 발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아마 ‘언어’를 사용하는 장르로서의 한계를 냉철히 절감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오로지 ‘민족자결주의’(?)와 ‘자국예술의 진흥’을 목표로 관객들의 관심도 끌지 못하는 창작극의 개발에 몰두하면서, 여전히 ‘아마추어리즘’에 묶여 관객들과의 접촉을 삼가고(?) 있는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다.

이런 형편에서도 우리 인력에 의한 예술을 고집하면서 중산층들이 갈망하고 관심을 갖는 ‘고급연극’을 멀리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통예술처럼 기술습득도 어렵고 글로벌예술의 세계화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에서도 여전히 자국예술가와 우리의 창작극 육성을 내세우며 ‘아마추어급’의 배우를 내세워 ‘지원금’으로 열심히 공연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연극계가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집단이어서 그동안 살아온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설명이 아니면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게 사실이다.

러시아 연극이 아직도 ‘체홉’ 작품에 목을 매고 있은 것은 그가 훌륭한 작가이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러시아에서 그동안 괄목할만한 새로운 신작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러시아의 많은 연극인들이 자신들의 옛 고전소설을 각색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지금 세계는 예전과 같은 고전적 향기를 가진 새로운 클래식한 작품(희곡)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그래서 아직도 셰익스피어에 의지하고 있는 게 현실인데도 한국만은 여전히 새로운 ‘창작극’에 목을 매어 스스로 관객을 쫒는 짓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외려 관객들의 ‘관람권’을 무시하고 자기들만의 ‘자기만족‘에 빠져 전혀 입장료도 내지 않는 일부 연극엘리트나 매스컴종사자, 평론가들의 ’심사‘와 ’평가행위‘를 만족시키는데 진력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창작극의 현실

 

이런 연극계의 ‘엘리트주의자’들의 줄기찬 노력에도 불구하고 왜 창작극은 ‘명작’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한마디로 어째서 ‘국민레퍼토리’가 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일단 창작극을 쓰겠다는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소설이나 시나리오, TV드라마 작가들에 비해 너무나 적은 수입을 얻을 수밖에 없어 좋은 인재들이 희곡(장르)을 넘보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다 희곡은 일단 쓰기가 어렵다.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쓰기보다도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래서 세계적으로도 좋은 희곡이 나오기 어려운 현실에 있는 게 이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연극인들이 셰익스피어 같은 고전을 각색하거나 윤색하고 있고 있다.

발레나 오페라와 같은 글로벌예술 장르의 관객들은 (이런 현실을 감안해) ‘창작물’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오페라는 가장 흥행이 용이하다는 ‘라 트라비아타’만 해도 각 오페라단에 의해 한해에 15회에 걸쳐 반복 공연되기도 하는데, 그래도 누구 하나 이에 불만을 표하지 않다. 이는 창작 뮤지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관객들은 창작에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연극만이 (특히 평론가들에 의해) ‘창작극’이 아직도 강요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는 번역극이 (언어를 표현도구로 해서) 소통과 공감이라는 측면에서 취약함을 보이고 있음을 내세울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 창작극이 이런 미션을 완수하고 있는가?

다른 장르의 ‘마니아’들은 조악한 공연을 보느니 차라리 해외의 좋은 공연물을 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연극관객들만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것인가?

관객들은 ‘졸작’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연극인들이 스스로 고정관념에 빠져 있을 뿐이다. ‘엘리트주의’가 원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창작극을 하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우리 자신들이 스스로 ‘죄의식’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의 창작현실을 한번 들여다보자. 지금 한국에서 ‘희곡’만을 써서 밥벌이를 하는 작가는 단 한명도 없다. 그런데도 한국연극계는 자국어를 통한 연극의 소통과 공감이라는 ‘소망’만으로 ‘밥벌이’도 안 되는 극작가의 양성을 꿈꾸고 있으며 그들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환경에서는 좋은 창작극이 잉태될 수가 없다. 그런데 그저 어느 날 ‘밥을 먹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희곡천재’가 탄생해 우리 연극을 살려낼 거라는 일념으로 흥행도 포기한 채 모든 고난을 견디어 내며 ‘구세주’가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더욱 아이러니컬한 것은 자신들은 대학교수로서 여유 있는 생활을 영위하는 평론가들과 연극 엘리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밥벌이’가 안 되는 극작가의 양성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한국에서 극작가를 꿈꾸는 그들의 속마음을 모르겠다. 역시 배고픈 배우들의 경우는 잘되면 영화나 TV드라마에라도 진출해 ‘복권당첨’이라는 꿈이라도 꿀 수 있지만 극작가는 영화나 TV드라마 작가로 성공은 고사하고, 희곡으로 ‘밥벌이’를 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도 이를 본업으로 하겠다고 덤비는 심리를 알 수가 없으니 말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극작가가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언제나 투자비만 날리는 극단 대표나, 자기 작품을 연출하는 연출가로 입신하거나, 최고로 성공해야 대학에서 몇 안 되는 극작가 교수가 되어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게 고작인 슬픈 현실이 전부다.

 

뮤지컬의 교훈

 

뮤지컬이 처음 한국 땅에 등장했을 때 모든 사람들은 그저 새로운 장르를 맛본다(구경한다)는 심정이었던 게 사실이다. 그건 우선 뮤지컬을 전문으로 하는 단체도, 기능을 가진 배우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연출자도 전문 작곡자도 없었던 게 현실이었다.

그래서 처음 뮤지컬을 대할 수 있었던 게 극단 가교의 ‘철부지들’ 극단 현대의 ‘빠담 빠담 빠담’ 극단 민중의 ‘아가씨와 건달들’ 정도였다.

그러니 가끔 연극판에서 노래를 가르치던 선생들을 모셔 노래 공부를 시키고, 무용을 가르치던 선생을 안무가로 모셔 겨우 공연을 올렸던 게 현실이다. 그리고 미국의 공연물인 경우에는 전문가도 없어서 미국에 가서 ‘공연을 구경시키는’ 연수(?)로 겨우 막을 올리곤 했다. 그렇던 뮤지컬이 이제는 공연계의 대세로 자리를 잡았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건 바로 뮤지컬의 표현력을 담당하는 노래와 춤이 ‘만국 공용어’라는데 있다. 그러니까 연극처럼 ‘언어의 장벽‘이 있을 수 없어 누구나 쉽게 그리고 빨리, 정확히 익힐 수 있다는데 있다.

한마디로 뮤지컬을 만들기 위한 노래와 춤이 기술도입에서 전혀 어려움이 없어서 그렇다. 영어를 몰라도 누구나가 뮤지컬의 메인 송을 부를 수 있고, 당연히 그들의 ‘춤’도 그대로 따라 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은 ’언어의 장벽‘으로 이게 불가능하다.

또 연출도 미국 뮤지컬의 ‘자료 비디오’를 보고 그대로 복사(모방이나 베끼기)해도 된다. 그리고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연출자를 브로드웨이로 보내 그대로 모방하게 하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자국의 창작뮤지컬이 없다고 한국국민 누구도 뮤지컬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지 않는다.

거기다 괄목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에 로열티를 주고 연출가과 안무가 등을 직수입해 무대수준을 업그레이드시킨데 있다.

그런데 연극은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저 창작극의 진흥에만 목을 매고 있었다. 국민 누구도 창작극의 진흥에 소홀하다고 불만을 갖지 않는데도 우리 연극인들은 창작극이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나름의 ‘가이드라인’을 설정하고 국가지원의 거금을 투자하면서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연극공연이 국민들(관객들)과 멀어지는데 결국 일조를 하는데 그치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시대의 ‘트렌드 읽기’를 포기하고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소통을 포기한 채 마냥 엘리트주의에 빠져 국가의 지원금을 탕진한 결과를 가져 왔을 뿐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연극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먼저 창작극이든 번역극이든 관객들에게 훌륭한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모든 공연에서 ‘최고의 볼거리’는 인간이다. 즉 배우인 것이다. 따라서 공연에서 배우가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볼거리’가 없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판소리만 해도 ‘안숙선’ 명창을 내세워 관객을 모은다. 발레, 오페라. 뮤지컬 어느 장르를 막론하고 자기 장르의 ‘스타’를 내세워 관객들을 모으지 않는 게 없다. 이건 영화나 TV드라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오로지 연극만은 이걸 무시해도 너무 무시한다.

아무리 재미없는 연극일지라도 배우가 뛰어난 연기력을 보이면 충분히 ‘볼거리’로 만족할 수 있는 게 연극이다. 이는 연극이 영화나 TV와 달리 무대에서의 ‘라이브’여서 더욱 ‘볼거리’가 가치를 질 수밖에 없어서 그렇다.

이런 장점을 가진 연극이 배우들의 연기력 부족으로 ‘볼거리’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은 관객을 모으는데 치명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한국연극은 오히려 극작가를 앞세워 최고의 ‘볼거리’를 스스로 죽여 버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되레 좋은 작품을 양산하기 어려운 희곡에 목을 매 막상 중요한 ‘볼거리’인 배우를 죽여 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게 연극이다.

솔직히 이 기나긴 신극의 역사에서 다시금 재공연을 할 만한 수작 하나도 만들어내지 못한 게 한국의 창작희곡이면서, 이를 위해 배우들의 ‘볼거리’마저 – 연기력을 위한 노력마저도 포기해 버리는 현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연극이 관객들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따라서 앞으로 연극이 추구해야 할 목표는 희곡을 건지지 못하면 배우라도 건져야 한다는 ‘인식전환’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희곡이 너무 많다’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계적으로 양산된 많은 희곡이나 소설, 만화, ‘이야기 거리’들을 이 시대에 새롭게 짜 맞추고, 해석하고, 연출해서 그리고 재능 있는 배우를 통해서 관객들에게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완성하려면 한국 연출가들의 재능을 최고조로 높이는 안목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왜냐면 현대연극에서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는 게 연출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감각에서 배우는 언어를 표현도구로 사용하므로 해서 한계가 존재하지만, 연출만은 얼마든지 글로벌의 개념을 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와 국적을 초월한 연출의 기능까지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그러니까 해외의 뛰어난 연출가라도 과감히 초빙해 글로벌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라도 외국의 연출가들에게 연극의 창조를 맡겨 ‘글로벌’로 나아가는 것도 주저하지 않아야 생존을 이어갈 수 있다. 그런데 우리와 정서가 다르고 사고가 달라서 안 된다고 반대하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연극에서 중요한 것은 정서와 사고만이 아니다. 시대의 흐름은, 이런 태평성대에는 ‘볼거리’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무대장치, 의상까지도 글로벌예술가들을 동원해 완성도가 높은 공연을 만들어 ‘볼거리’를 관객들에게 제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반대를 일삼는 사람들이야말로 ‘시대의 트렌드’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을 필요가 있다.

 

한국연극이 깨달아야 할 점

 

현대무용을 ‘반면교사’삼아 한국연극의 쇠퇴를 어느 정도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현대무용처럼 트렌드를 읽는데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점, 많은 연극들이 교수로 안주하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멈추고 ‘학위’에만 매진한 점 등을 들 수 없을 것이다.

거기다 정부나 지자체에게도 ‘신뢰’를 주지 못해 지원금이 지속적으로 삭감되고 있는 점 등을 냉정하게 반성하고 성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 최고의 ‘볼거리’인 배우를 양성할 기술개발을 게을리 한 점, 뮤지컬의 바람에도 여전히 자기만족에 빠진 점. 현장 일을 하지 않는 이론가와 평론가들만이 득세한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와 ‘엄숙주의자’가 만연해 흥행이나 오락성이 외면당해 대중들에게 ‘즐기는 연극’, ‘재미있는 연극’을 꿈꾸기조차 어렵게 한 점. 거기다 동숭동 뒷골목의 저질연극이 횡행한 것을 막지 못한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제대로 된 ‘전업연출가’를 양산하지 못한 점이다. 거기다 관객과의 소통을 배제하고 지원금에 목숨을 건 점. 어차피 관객이 없을 것이니 연극평이나 연극상을 염두에 두고 연극을 만드는 게 이제는 관례화된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연극이 지속적으로 생존을 유지하려면 우선 연극인들의 인식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것인가를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의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시대의 흐름을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창작극, 번역극을 따질 게제가 아니다. 그리고 꼭 연극은 한국인이 연출을 해야 한다는 부질없는 고집도 꺾어야 한다. 이제는 소재도 가리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섹스나 정치적이고 사회성이 강한 소재라도 과감히 다뤄야 한다.

특히 코메디 장르의 육성에 힘을 모아야 한다. 소설가나 시인들이 희곡을 쓸 수 있도록 끌어들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글로벌 감각을 살려내 외국의 기술과 인력을 과감히 받아들일 자세를 가져야 한다.

 

결론

 

1. 한국공연예술 중 무대에 나서는 행위자가 제대로 기술습득이 되지 않는 채 관객을 맞는 장르는 연극밖에 없을 것이다.

2. 공연장르 중에서 관객들에게 어필할만한 강력한 레퍼토리 하나 없이, 흥행에 보장도 없는 신작만으로 공연을 영유하는 장르는 연극밖에 없을 것이다. 거기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롭게 탄생하는 장르의 도전은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다.

3. 러시아와 동유럽의 체제가 몰락한 후에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유지되는 공연예술은 사라졌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고수하는 우리가 ‘지원금’만으로 생존을 기대하기는 너무나 힘들 것이다.

거기다 연극은 국가가 보존을 해야 할 전통예술도 아니다. 따라서 끊임없이 스스로 생존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누구도 우리를 돌보려하지 않을 것이다.

4. 그런데도 누구 하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 이는 대학을 통해서 끊임없이 연극지망자가 배출되고 있으며, 동숭동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소극장을 갖고 있는 외형적 풍요로움(?)이 가져다주는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다 허상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5. 거기다 연극만큼 양극화가 극심한 장르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노후에 예술원 회원이 되는 수혜까지 누릴 완벽한 복지(?)가 보장되는 리더들이 미래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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