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권병길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배우  권병길

 

<고도를 기다리며> 희곡은 1952년에 탈고돼 54년에 파리에서 공연되었다.

작가 사뮈엘 베케트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2차 대전이 일어난 시기에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다가 프랑스에 정착 한다 그는 숨어 지내면서 글 쓰는데 전념을 한다.

고도는 처음엔 소설로 쓸려던 목적이었는데 희곡으로 바뀌어 발표하자 비평가들은 사실주의 작품에 반기를 든 부조리 작품을 대하자 일대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놀랍게도 1969년 노벨 문학상을 타게 된다.

 

이 작품엔 두 사내 에스트라곤과 블라디미르가 연극을 이끌고 주위에 포조, 럭키 그리고 소년이 등장 한다.

배경은 황량한 시골길에 마른 나무가 서있고 두 사내가 허름한 의상에 바보 같은 몸짓으로 이해 할 수 없는 말을 계속 지껄이며 시작된다.

자 ! 가자…어디를…갈수 없어…왜?…고도를 기다려야해…참 그렇치!…언제 오는데?…곧 올거야! 이런 식으로 말도 안 되는 말을 지껄이고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며 주고받고 딩굴고 나무에 올라 가기도하고 끓임 없이 장난치듯 움직인다 지껄이는 말들은 아무 의미 없는 말의 유희처럼 혼란스럽다.

 

작가가 의도하는 고도는 무엇일까? 고도는 절망에 빠진 사람에겐 희망? 억압받는 사람에겐 자유? 상실한 사람에겐 꿈? 고독한 사람에겐 사랑? 전쟁 중인 곳엔 평화? 그리고 궁극엔 죽음? 등 다양하게 해석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소망은 오지 않는데 올 것 이라는 기다림은 우리 인간에게 누구나 있는 것, 그래서 오지 않는 그 무엇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고독한 존재임을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아마 이 작품을 쓴 베케트는 전쟁이 끝나고 평화를 바라는 인간의 마음을 표현 했을 것이다.

그는 2차 대전을 격었고 공교롭게도 우리에겐 민족의 상잔이 극에 달한 625가 진행되든 1952년에 이 작품을 내 논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베케트는 인생을 비관적 인식이랄가? 어둠과 우울함 그늘을 벋어나지 못한 모든 것들의 죽음을 상징하듯 회색이다

그는 “인간은 없다” 라고 고백 한다 이러한 비애의 고백은 충격적이다 그는 전쟁으로 인간이 짐승보다 못한 죽음들을 목격하면서 심적 갈등을 크게 느겼을 것이다 니체가 말한 “신은 죽었다” 보다 한발 더 나간다.

 

고도는 불합리 속에서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과 부조리한 현실에 인간의 소통의 부재 인간의 소외 죽음 등 비관적인 물음에 도취 한다.

이 작품은 부조리한 인간들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듯 구원을 기다리는 방랑자인 주인공 두 사람은 절망 가운데에도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모습을 시종 이 연극에서 보인다. 그러다 우울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목숨이 붙어 있으니 살아갈 수밖에 없듯이 꿈틀거리며 히히 낙낙하고 장난 치다, 그리고 좌절, 다시 일어나 지껄이고… 그런 행위가 우리에게 암시하듯 절망하고 포기 할 수 없는 인간들의 실존을 말 한다.

그들은 어제 있엇던 일도 잊고 오늘 또 얘기하고 방금 하고 있는 일도 잊고 심지어는 지금 하고 있는 말을 의미 없이 내 뱉는다 그리고 싸우기도 하고 어쩌면 방향을 잃은 현재의 인간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이 작품엔 포조와 럭키가 등장하는데 포조는 럭키를 목에 밧줄을 걸고 끌고 다닌다 그런 모습은 주종관계로 억압과 노예관계? 오늘날 힘 있는 자와 약자와의 관계 설정과 같은 것이다.

이 작품에 소년이 등장 한다 소년은 고도의 전령사 역할을 한다.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내는 어떤 때는 나무에 목메 달고 싶어 한다 어쩌면 자아를 찾기 위해서? 아니면 자유를 찾기 위해서? 한줄기 구원을 구걸하다 지쳐서?

그러나 끊임없이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고민하고 비관 할때 소년이 나타나 고도가 오지 못한다고 알린 다

 

시간이 흘러감을 보여주듯 나무에 나뭇잎이 열리면서 그들은 늘 하던 대로 일상적인데 소년이 다시 찾아와 오늘도 고도가 오지 못함을 알리게 된다. 그러자 이들은 광기를 부리며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리고 우리가 여기에 있다고 제발 알려달라고! 외친다. 그러면서 잠이 드는 두 사람 끝내 고도는 오지 않으며 이 연극은 막이 내린다.

 

이작품은 실제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를 말들을 시종 중얼 댄다 연출자도 모르고 배우도 모르는 말들일 것이다. 어쩌면 작가도 말이 안 되는 말을 늘어 놓았 다고 스스로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수많은 사실주의적 언어가 진실이 현실화 되지 못하고 은폐되고 왜곡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작가는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부조리한 언어의 방식을 통해서 부조리한 인간 사회와 인간들의 부조리함을 모아서 역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리라.

 

작의는 무엇인가? 언어의 해체, 언어의 무의미? 온다는 고도는 아니오고 오기를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자의 관계가 어쩌면 인간 소망의 단절을 웅변하고 절망과 꿈의 외줄타기와 같은 상태를 말하듯 인간의 의지와 한계는 인간들의 의지와 실행이 뒤 따라야 하지만 야속하게도 인간은 그 반대의 절망과 좌절의 질곡으로 떨어 트리는 것이 아닌가? 바라는 꿈은 결코 오지 않을 수도 있고 그 꿈을 이루도록 하는 것도 인간이지만 이 모든 것을 인간이 하는 것이고 인간이 신의 대리인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 일수 밖에 없음을 이 작품은 암시 하는 것이 아닌가?

 

오늘날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혹은 정치하는 사람들 쌍방의 토론자들의 말을 듣다보면 언어의 유희처럼 느껴 질 때가 많다 진실은 무엇인지? 그래서 결론을 어떻게 가리자는 것인지? 이러한 숫한 말들이 오늘도 언론매체 등을 통해서 홍수처럼 쏟아 내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그러한 것을 통해서 인간의 삶이 유효하게 진화하는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아무 의미 없는 도리어 비관적인 것으로 진화 하는 것인지 보게 된다

 

곧 등장 인물 들의 소통의 부재와 부조리를 보여주고 있는 고도를 기다리며는 오늘날 인간들의 어리석은 삶을 바보스럽고 희화화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오는 네 인물은 아무도 구원을 못받는 신세가 된다 두 방랑하는 사내는 끝내 구원의 고도를 만나지 못하고 지배자 포조는 그래도 폭군으로 출세도하고 별도 달았지만 끝내 장님이 되고 끌려 다니는 럭키는 순종의 미덕만이 다는 아닌 듯 벙어리가 되고 만다.

작가는 왜 이렇게 비관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어둠으로 채색한 극의 결론을 내렸을까?

 

다시 말하면 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작품을 가지고 우리의 얘기를 풀어 보기로 하자.

 

오늘날 우리가 꿈꾸는 평화가 도래 할 것 인지 또한 그 평화를 기다리다 이 세상을 떠난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도는 오지 않았고 지금도 오지 않았음을 대입 시켜 봄직하다 그리고 희망을 꿈꾸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해방 이후 오늘날 까지 수많은 고도를 기다리는 백성들과 겨레의 상황을 보면서 희망 보다는 어둠이 드리워 있다고 했을 때 우리가 기다리는 구원의 빛은 언제 오는 것인지? 그러한 민족사뿐 아니라 삶의 양식 혹 이념 등 통일을 위한 담론 들은 어디까지 진행 되었으며 과연 긍정적 결론에 와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대 하건데 진실이 있다면 한 번에 날 결론일수도 있는 산적한 문제들을 결론이 매번 꼬여 수십 년을 질질 끌고 인간의 속물적인 이기심과 이타심이 결합하여 비극적 상황에 도달 하게 된 어둠의 현실이 아닌가 한다.

 

작가 사뮈엘 베케트는 당시 2차 대전이 끝난 유럽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 정치 경제 사회의 혼란상과 인간관계 등이 역시 우리가 체험한 것들과 비슷했으리라 생각한다.

언어의 폭주 속에서 그 말의 진의와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는지 아니면 말이 말을 낳고 그 말의 전달과 곧 소멸, 말의 약속과 파괴등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그래서 본질이 흐려지는 현상을 통해 우리가 바라는 것을 확대하여 작의와 그가 말하는 소망 즉 고도가 평화의 대한 갈구가 내재 되었을 것으로 보는 관점으로 놓고 토론 해 봄직하다.

혹 세계사적 비극의 한반도 전쟁의 계기가 작품의 영향을 준 배경으로도 가정 해보며 고도는 우리 겨레의 평화속으로 대칭시켜보는 상상을 해 보는 것이다.

이제 정전 협정 60년을 맞이하여 아직까지 종전을 못하고 휴전을 하고 68년의 세월을 돌이켜 보면 우리 민족 즉 남북이 곧 작품 속에 나오는 허름한 옷차림의 두 바보같은 인물 에스트라곤과 블라드미르가 아닌가? 초라하고 한심해 보이는 그러면서 살아가며 밑도 끝도 없이 말하고 먹고 딩굴고 서로 잘났다고 한다면 통일이 온다고 말 하면서 수십 년을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것이 우리의 자화상처럼 보여진다면 불쌍하고 처량하고 불상한 한심한 존재가 아니겠는가?

소위 연극을 보러온 관객들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자기 자신의 얘기인줄 모르고 히죽히죽 웃고 연극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반응일까 그래서 그 들은 히죽이죽 웃고 있는것이 아닐가?

 

뒤돌아보면 남북은 쌍방이 수많은 대화를 하고 반복하고 약속하고 도장 찍고 사진 찍고 악수 하곤 했다.

1972년 7,4공동성명 1991년 남북 기본 합의서 2000년 6,15 공동성명 2007년 10,4선언등그 외 장관급 회담 적십자 회담 군사 회담 등 헤아 릴수 없이 많다.

그러나 급기야 오늘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핵으로 위협을 하니 유엔이 제재를 하겠다며 북의 숨통을 조이고 미국은 핵우산을 더욱 광범히 넓히어 위협하고 전쟁 연습이니 한미일MD체제를 구상하며 끊임없이 전쟁 연습을하며 전쟁 간주니 서로 공격하며 사람을 담보로 매일 귀신만 알아듣는 말들을 쏟아 내고 있다.

이는 베케트가 작품을 쓴 그때에서 지금의 21세기의 현주소 우리의 상황인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고도를 기다리는 무수한 소망을 노래하는 이 땅의 사람들…

그들은 목을 빼고 오늘 오려 나 내일 오려 나 허공을 바라보는 이 땅의 민중들이다.

그러나 고도는 끝내 오지 않고 있다.

등장인물 소년이 고도에게서 메시지를 가져왔는데 고도는 못 온다고 한다 왜 못 오느냐고 소리치고 싶지만 작금에 한반도의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면 알수있는 것인데 작가를 원망해봐야 우리만 망신인 것이다.

 

고도가 못 오는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단일화를 기필코 이루어 정권교체를 한다더니 물거품이 되었고

진보는 얼마 되지도 않는 세력인데 분렬하여 서로 잘 났다고 하고

새 정부의 내각을 구성 하려니 무슨 해먹은 것이 모두 하나같이 많아 청문회에서 망신살이 뻗혀 과연 그들이 국민을 위해 무슨 희소식을 전할 것인지 기대를 버린 사람들이 많다.

 

고도를 기다리는 농촌과 공장 그리고 학원에서 뿐 아니라 비정규직 또는 가난하여 그날그날 허덕이는 사람들

문화 예술의 긍지를 갖지 못하고 소위 돈 좀 있는 귀인들의 구미에 맞춰 어릿광대 노릇을 하는 예인들 그리고 창작을 가로막는 구조적 비문화적 행태

이 땅의 교육의 현장은 무엇을 가르치고 내일의 조국의 역군을 만드는데 우선 순위를 뒤 바꿔 영어 공화국을 만들어 아이들의 정체성을 저버리게 한 교육현장

 

수많은 돈을 번 재벌들은 같이 살면 좋으련만 돈을 더 벌어야 내일의 부강한 나라를 만든다는 이유로 계속 축적성 투자를 해외에다 하여 그림의 떡처럼 처다만 보고 언제쯤 우리 입으로 올려나 기다리는 서민을 우롱하는 이 땅의 이름으로 설치는 재벌 기업들 차라리 돈을 더 많이 벌어 세계기업으로 하는 것이 차라리 우리는 관심을 안 갖는 이유가 될 것이다.

 

대통령은 당선되면 제일 먼저 미국을 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 땅의 평화를 위한 길인지 고도에게 물어보고 싶은데 오지 않으니 어쩔수 없는 것이 아니가?

 

이 도도한 고도는 무엇인가? 고도는 평화를 약속 하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가장 인류의 보편적 진리요 모든 학문과 종교 역시 평화를 말하는 것이다 수 십년 동안 평화도 없고 전쟁만 지속되는 오늘 우리의 현실은 세계의 조롱꺼리가 되었고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풀지 못하고 외세에 맡기어 해결 하겠다는 어리석음이 한심한 것이다 사랑과 민족 공동체 정신으로 돌아가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찿는 길인데 연극에 보여지는 어리석은 두 사내처럼 남과 북이 그런 모습 그대로 우수광 스런 동작과 대사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다.

 

50년 만에 정권교체를 해서 순항의 길로 들어 서는듯하다 10년 만에 도루아미 타불이 되엇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두 눈을 크게 뜨고 보면 거대한 반 통일 세력 기득권의 세력들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들은 고도를 붙들고 가지 못하게 늘어지는 사람들이다.

정전 60년인데 아직까지 전쟁 중에 있다 종전을 못하고 휴전을 하므로 그 휴전 때문에 서로 적대하고 상호 비방하며 정말 동포끼리 눈뜨고 할수 없는 진기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휴전을 했으면 서로 조건이 있을 것인데 그 조건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일 진데 오늘까지 한 행위는 상대를 인정 못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이런 근본이 잘못된 상황에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리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순간을 국민은 불안에 오늘도 떨어야한다.

과연 우리가 바라는 평화는 올 것인가? 온 다 언제 곧 올거야 이렇게 반복되기를 정전 60년과 분단 68년이 되어 가는데도 그 소리에 그 소리만 되풀이 하고 있다.

 

이런 현상 속에서 그래도 희망을 가져야 우리가 살수 있듯이 하루하루를 의미 잇게 실천하면서 실존의 의미를 찿아 가야 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시지프스 신화에서 보듯이 올리고 또 올려 싸우고 싸워서 정의가 바로서고 서로 사랑하고 불평등이 없는 평화가 있는 그러한 세계를 꿈꾸는 것이라면 그 고도는 우리에게 찿아 올것 이라는 희망을 가져 보는 것이다 그 고도는 가만 이 있는 곳엔 결코 오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우리 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실존 철학가 하이 데커는 비록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주어진 권리 자유를 최대한 누리는 것,그것은 내가 세계에 던저진 의미를 찿는 것이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며 오직 지금 내가 선택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찿아서 과감히 떨쳐 일어나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러해야 우리가 바라는 평화의 시대를 쟁취 할 수 있으며 고도는 기필코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지금도 고도는 우리에게 물을 것이다.

너희는 평화를 진정으로 원하느냐?우리는 모두가 합창으로 그렇다고 말해야 될 겄이다 그러면 고도는 올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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