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의 고현학
―연극 <마흔>
성유경
작ㆍ연출: 김한길
출연: 지우석, 임은희, 강현식, 이동용, 유지수, 오주환, 박기만, 조유진, 김수현
공연기간: 2013.12.12~29
공연장소: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김한길 작ㆍ연출의 <마흔> 시놉시스만 보면 주인공 마흔 줄 남자에게 어떤 자극적인 사건이 일어날 것 같다. 그의 아내는 이모의 생일잔치를 위해 일본으로 떠나고, 어린 딸도 시가에 맡겨진다. 홀가분한 기분과 자유를 느끼는 남자는 대학 선배와의 술자리에서 대학시절 짝사랑의 소식(이혼)을 듣게 된다. 여기까지의 개요라면 이후 유혹에 직면하는 유부남의 갈등과 일탈이 중심축이 될 듯하다. 하지만 <마흔>은 남자의 일탈보다는 사는 것 자체의 힘듦으로 시선을 돌린다.
<마흔>은 비슷한 시기에 공연된 이만희 작가의 <좋은 녀석들>과 비교하면 눈에 띄는 차이점이 있다. 두 작품 다 사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는 중년 남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이들의 욕망과 갈등, 선택의 문제를 중심에 놓는다. 그들은 사업 적자로 인해 직원을 정리해고 했고, 아내 외의 여자에 연정을 품는다. 하지만 <좋은 녀석들>의 경우 중소기업 사장박장수는 직원을 70명 해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규모가 큰 사업체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그에게는 짝사랑의 아픔도 없고, 그의 여자들은 모두 순정파다. 사별한 첫 아내는 죽기 전 자신을 잊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주라 했고, 재혼한 여자는 양처다. 외도를 알아도 화 한 번 안내며 남편이 돌아와 주길 마음속으로 바랄 뿐이다. 연애 중인 여자는 한참 연하에 미모와 매력을 갖추었는데, 남자의 돈에 접근한 것도 아니고 오직 사랑만을 준다. 박장수는 어린 연인과 티 나게 연애하며 그녀에게 몰입한다. 반면 <마흔>의 찬영은 디자인회사 사장이지만 영세하여 직원 몇 해고했더니 달랑 직원 하나 남고, 곧 사무실도 내줄 처지에 있다. 집 대출금도 갚아나가는 중이다. 짝사랑은 무릎 꿇은 사랑이었고, 사무실 여직원과의 감정교류는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그친다. 그녀가 큰 기대를 하지 않도록 만든다. 항상 연적도 존재하여 짝사랑과 연애한 총학생회장 출신 선배를 여전히 싫어하고, 여직원의 남자친구에게 협박도 당한다. 즉, <좋은 녀석들>이 낭만주의적 영웅 캐릭터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마흔>은 평범하고 일반적인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만희의 희곡이 금욕에 대한 집착과 삶의 한계만을 정해주는 도덕률에 대한 철학적 사고실험에서 나왔다면, 김한길의 희곡은 외부의 사회적 현실을 마주하고 나왔다. 이만희의 작술이 인물 형상화나 결단이라는 요소에서 드라마틱하다면, 김한길의 작술은 보다 일상적이다. 이만희가 남녀의 육체적 관계를 드러내고 그것에서 미련의 허물을 벗지 못하는 남자의 난항을 솔직하게 그렸다면, 김한길은 육체적 관계를 제거하여 아직 고결하고 지식인인 척 하는 위선을 남겨놓고 있다. 그리고 <좋은 녀석들>이 문민정부 시대에 집필됐다면, <마흔>은 다시 암울해진 요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흔 줄의 찬영, 삶의 퍽퍽함을 경험한 그에게 펼쳐지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처자식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짝사랑과의 만남? 여직원과의 하룻밤? 아니다. 일본에 갔던 아내가 큰돈을 얻어 돌아오고, 연적이었던 총학생회장 선배의 도움을 받아 회사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고통과 권태를 피하고 만족으로 치닫는 삶은 로맨스가 아닌 생존이다. 약간 자존감을 잃으면 뭐 어떤가. 그는 이미 운동권이라는 이력 하나 가슴에 품고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지 않았던가. 인권전문 변호사였던 선배가 이혼전문 변호사가 되고, 총학생회장 선배가 오히려 기득층이 된 상황을 비웃던 그 역시 같은 길로 향해가고 싶을 뿐이다. 아내의 부재 사흘 동안 (사랑의)추억은 방 한 켠과 후미진 선술집에 뒹굴었지만, 아내가 돌아오자 찬영은 이렇게 말한다. “보고 싶었어.” 이 대사는 <마흔>에서 많은 의미를 담고 있으며, 가장 뛰어난 대사다. 찬영은 연극의 결말에서 그렇게 싫어하던 연적에게 붙어 회사를 유지하고, 여직원을 정리하고, 여직원의 前남자친구 남학생과는 호형호제한다. 그가 젊었거나 불의로 가득 찬 세상을 경멸하고 새 희망을 꿈꾸었다면 모두 불가능했을 일이다.
연극에서 유심히 짚어볼 점은 재일교포 3세인 아내의 일본행과 무대배치다. 우선 아내와 이모에게 벌어지는 일은 일상극의 틀과 이질적인, 매우 드라마틱한 전개로 이뤄진다. 아내와 이모는 조총련과 연관이 있으며, 이모는 전직 암살교사. 찬영의 사촌형을 북송해야 하는 임무를 받으며, 북송이 실패하면 그를 암살해야 된다. 이모는 ‘푸른 여우’ 아내는 ‘붉은 민들레’라는 암호명으로 불리고, 사촌형을 보호하고 있는 NIS 요원과 접촉한다. 재밌는 것은 이 셋이 임무수행에 있어 (서로 녹음으로 협박하여)억대의 돈을 탐하는데, 생존을 위해서는 거래를 해야 하고 이윤 추구에 목적을 두면 가릴 일 없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보여준다. 따라서 비현실적인 서사처럼 느껴지고, 한국에서 떨어진 일본이라는 공간을 상정하지만 결국 우리의 일상과 다르지 않다. 그런 이유로 한국 찬영의 집, 사무실, 술집과 이곳은 같은 공간을 점유한다. 김한길은 일본 집을 외떨어진 영역에 세워두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보자면 잘 나온 글이고, 쉬운 대사로 파고드는 미덕이 있다. 찬영을 딸바보로 그리지 않아서 진솔했다. 아내와 이모가 나누는 대사나 이모의 (작전 설명을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려 말하는)렉처 퍼포먼스, 한국과 일본 모두에 출몰하는 NIS 요원은 잔잔한 극에 윤기와 재미를 더하면서도 생각거리를 준다. 구겨진 마흔을 표현하기 위해 바닥에 낙엽을 깔고, 일상을 재현한 꾸밈없이 너저분한 무대도 무리가 없다. 배우들의 고른 호연도 좋았는데, 특히 찬영 역의 지우석 배우가 역할을 잘 수행했다. 여느 사장이 여직원에게 대하듯 형식적 태도를 잘 포착하면서도, 여직원이 잠깐 자릴 비운 사이 짐 박스를 훔쳐볼 때 흔들리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게 인상적이었다. 찬영은 흔한 성격의 소유자다. 특별히 순하지 않고, 그렇다고 드세지도 않고. 학력은 있고. 이런 사람이 여자를 대할 때, 짝사랑을 대할 때 어떨까 생각한 흔적이 보였다. 그리고 “보고 싶었어.”는 발화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한 상태에서, 입에 딱 맞춰 나왔다. 작품 분석을 깊게 했다.
불만이 없진 않다. 남성 작가의 판타지인지 찬영을 둘러싼 여성 인물들의 성격이 예쁘다. 왜 예쁘다는 표현을 썼냐하면 어둡고 우울한 매력이 있으면서 깔끔하다. 일본에서 괄괄했던 아내는 찬영 앞에서 양처로 변한다. 관객 입장에서 봤을 때 감동이 없다. 그리고 연극하는 사람이 가난과 무능의 상징으로 직결되는 빤한 작술을 삼갔음 한다. 배우들이 맨발로 출연한다. 삶의 힘듦을 신체화한 것인지, 솔직한 연극임을 내세우는 것인지 아무튼 의도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 창의적인 설정도 아닌 듯하다.
관람 후 이 연극에 ‘생존의 고현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싶었다. 고현학은 ‘모더놀로지(Modernology)’의 일본식 조어로, 과거를 대상으로 하는 역사학의 범주인 고고학과 달리 현대를 대상으로 하는 사회학 범주를 뜻한다(이민호 시집 <<피의 고현학>> 중 고봉준 평론 참조). 탐정의 눈으로 당대를 관찰하고, 숨겨진 삶의 편린을 끄집어내는 것이 바로 고현학이다. 김한길은 탐정의 눈으로, 관찰자의 눈으로 당대의 어떤 모습을 포착했다. 그래서 생존의 고현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