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9-7번지/ 문세영

<959-7번지> 

-흔하고 뻔해서 필요한 가족 이야기-

  문세영

 

연출 : 김정숙
단체명 : 무대지기
공연 기간 : 2014.01.14-26
공연장소 :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연극의 소재야 숱하지만 그래도 흔한 소재를 꼽으라면 단연 가족 이야기다. 그 이야기가 신파든 서스펜스든 코미디든 간에 가족이 소재라면 갈등의 중심 역시 당연히 가족이다. 미국 대비 장르의 폭이 비교적 좁은 국내 TV드라마 역시 가족 이야기가 다수다. 그렇게 흔한 소재지만 가족 이야기를 보기 위해 관객들은 극장을 찾는다. 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족이라는 관계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가족으로 인해 웃고 울어보지 않은 사람도 없다. 가족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고 또 슬프게 만드는 시소 놀음을 한다. 현재의 나는 가족의 반영물이기도 하다. 본인이 현재 떠안고 있는 문제점이 가족사 안에서 촉발됐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가족의 삶을 엿보고 싶은 심리가 있다. 다른 가족들도 이렇게 궁색스레 살고 있을까, 동질감을 느끼며 위로 받고 싶고 우리 가족보다 못한 관계를 보며 위안을 삼고 싶기도 하다. 혹은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염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제각각의 사정에 따라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그 흔한 이야기를 보기 위해 공연장에 모여든다. 하지만 이 뻔하고도 흔한 이야기 역시 작품의 구성, 무대 연출, 배우들의 연기, 감칠맛 나는 대사 등으로 다채로운 변주가 가능하다.

‘959-7 번지’는 등장인물들이 처한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와 배우들의 친근한 연기로 관객들의 동질감을 이끄는 데 비교적 성공한 작품이다. 독남독녀나 형제가 한둘뿐인 20~30대 젊은 관객들에게 다섯 남매라는 극중 가족구성원은 거리감이 있을 수도 있지만 부모세대가 대체로 5명 이상의 형제·자매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딴 나라 이야기도 아니다.

극중 노모인 영순이 칠순을 맞이하면서 영순의 다섯 자녀는 칠순잔치를 어떻게 벌일지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큰딸 경옥은 남부럽지 않게 큰 연회장을 빌려 잔치를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동생들에게 돈을 분담해 낼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동생들은 재정적인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간소하게 가족들끼리 저녁 식사나 하자고 말한다.

경옥의 동생들은 모두 각자 다른 이유로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장남인 준봉은 사업에 실패해 거리에 나앉게 된 형편이고 셋째 경숙은 작가가 되겠다며 37살이 되도록 집에서 글만 쓰며 돈을 벌어본 일이 없다. 넷째 경님은 의문의 남성의 아이를 밴 상태고 막내 옥봉은 경찰서를 들락거리며 합의금을 물어줘야 할 처지다. 극의 말미에 이르러 드러나는 사실이지만 첫째 경옥도 사실 그녀의 남편인 춘택에 의해 집이 담보로 잡힌 상황이다.

극은 크게 다섯 남매의 시점과 영순의 시점으로 교차 대비된다. 극이 진행되면서 남매들의 어려운 재정적 상태가 하나씩 드러나는 동안 자식들의 칠순잔치 계획을 극구 사양했던 영순은 다가오는 잔치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뜨기 시작한다. 영순은 가까운 친인척들에게 잔치에 꼭 오라며 전화를 돌리기도 하고 오랜만에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며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기도 한다.

이런 장면의 대비는 관객들에게 복잡한 심경으로 다가온다. 중년층 이상 관객은 자신의 모습을 되비침해 볼 수 있고 젊은 관객들은 노인이 된 부모와 중년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영순의 나이에 이르렀을 자신을 모습을 생각하며 ‘고독하고 청승맞은 노인이 되지는 않아야 할 텐데’라고 고민할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배를 곯거나 추위에 떨지도 않는 2014년, 왜 아직도 가족 갈등의 문제는 돈으로 수렴되고 생활은 오히려 각박해진 것일까. 풀이나 나무껍질을 뜯어 먹으며 배를 채울 필요도 없고 얇은 천조각과 검정고무신에 의존해 겨울을 날 필요도 없는, 극단적인 생존 문제와는 거리가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 왜.

그 ‘왜’에 대한 질문에 답변을 주지 못한 점이 이 연극의 아쉬운 측면이다. 이 연극은 저마다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인간 군상들을 모아 오늘날의 문제를 표면적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우리가 도대체 왜 이런 상황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본질적 고민은 없다. 또 다섯 남매가 서로 티격태격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사이가 된 원인에 대한 개연성도 없다. 경제적 어려움은 사람의 마음에 쉽게 생채기를 내는 만큼 내적 분노와 화를 참지 못하는 삐뚤어진 성격이 형성됐을 것이라는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금전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 오히려 우애가 돈독해지는 남매들도 있다는 점에서 극중 남매가 시종일관 서로에게 윽박지르고 티격태격하는 상황은 관객들을 납득시키기 부족한 측면이 있었다. 남매간 혹은 부부간의 갈등 관계를 강-강 전개로 일관하기보다 서로 다투다가도 때로는 침착하게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강-약 전개를 펼쳤다면 좀 더 관객들의 공감을 사기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다섯 남매가 왜 서로 소리 높여 싸우게 됐는가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 그렇다면 과연 그들은 어머니인 영순보다는 적어도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분에 넘치는 소비생활을 하면서 남들에게 그럴 듯해 보일만한 잔치를 벌이는 겉치레는 행복을 가져다줄까. 뼈 빠지게 일만 하며 자식들에게 정성을 쏟아 붓다가 결국 칠순잔치도 못해보고 숨을 거둔 영순이 더 불행할까, 아니면 연극의 마지막까지 결국 금전적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한 다섯 남매가 더 불행할까.

연극의 마지막 장면은 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건넨다. 마지막 무대를 장식하는 가족사진 속에는 천진난만한 영순의 표정과 성난 빛의 다섯 남매의 얼굴이 대조를 이룬다. 영순처럼 돈 없이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성인군자 같은 결론을 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행복은 물질적 풍요와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가난이 죄라는 말이 있을 만큼 궁색하고 빈곤한 삶은 행복을 쉽게 앗아간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먹고 살만한 요건이 갖춰졌을 때는 행복과 돈이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것은 본인의 물욕과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가족사진을 찍는 시간이 불필요하다고 느끼는 것 역시 삶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자신의 가치판단에서 비롯된다. 누구나 하는 칠순잔치에 들뜨는 영순과 분에 넘치는 행동으로 금전적 위기에 처한 남매 중에는 적어도 영순이 더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공연이 끝난 극장 로비에는 영순과 다섯 남매가 다함께 밝게 웃고 있는 액자가 한개 더 놓여 있다. 공연을 보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전 이 사진을 본 관객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각자가 바라는 가족상과 행복한 삶은 무엇인지 자문을 던져볼 것이다. 이것이 가족을 소재로 한 이 연극의 목적이기도 하다. 가족의 소소한 이야기를 찾아 극장에 온 관객들은 철학적 혹은 정치적 사유를 하기 위해 극장을 찾은 것이 아니다. 나는 어떤 가족을 원하는가, 또 나는 가족의 어떤 일원인가, 우리 가족의 관계는 지금 안전한가에 대한 사적 고민이 관객들에게는 보다 중요하다.

그렇다면 이제 이 작품이 허례허식 풍조가 만연하게 된 이유, 돈 문제로 고민하는 인간 군상들로 가득한 시대가 된 원인 등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의도가 이해된다. 관객의 시각을 분산시키거나 확장시키지 않고 온전히 가족 문제 안에만 머무르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사실주의 연극치고 지나치게 간소하다 싶은 텅 빈 무대 역시 모든 포커스를 남매의 다툼질로 집중시키려는 연출의도로 파악된다. 관객들이 이 연극을 보고난 뒤 ‘엄마에게 좀 더 잘해야 겠다’거나 ‘보증이나 담보 문제로 가족들에게 민폐를 끼치진 말아야지’ 정도의 고민을 했다면 이 연극의 목적은 달성한 것이다. 배금주의라든가 경제성장으로 인한 폐해 등에 대한 고민은 이 연극을 찾은 관객의 몫이 아니다. ‘959-7 번지’는 막장가족이 등장하는 막장드라마도 아니고 가족을 살해했다는 끔찍한 패륜 뉴스도 아니다. 비교적 평범한 범주 내의 가족 갈등 이야기이고 가족 소재 연극의 보편적 목적을 충실히 이행한 흔하고 뻔해서 필요한 이야기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