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현실로 나타난 예술의 싹 자르기 / 오세곤

(제42호 편집인의 글)

드디어 현실로 나타난 예술의 싹 자르기

최근 모대학 연극과가 폐과 통보를 받았다. 그러자 학생들이 대학로로 나와 시위를 벌였다. 예술의 죽음을 상징하는 관을 든 행렬과 부둥켜안고 오열하는 학생들의 사진이 그 날 하루 어지럽게 언론을 장식했다.

학생들 중에는 입학한지 한 달도 안 돼 자기 과가 없어진다는 황당한 소식에 말문이 막힌 신입생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 사실 이 일에서 가장 억울한 건 학생들이다. 그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 죄인은 내심 그런 계획을 숨긴 채 멀쩡히 신입생을 뽑아 입학을 시킨 학교 당국이고, 그런 눈치도 없이 학교와 학과를 믿으라고 가르친 교수들일 것이다.

물론 더 큰 죄인은 대한민국 정부이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진로교육은 없이 오로지 대입을 위한 경쟁만 존재하도록 해놓고는 갑자기 대학에다 취업의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야말로 이번 사태의 원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납득할 수 없다. 작년 6월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은 대학의 인문, 예체능계열 학과들을 취업률로 평가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하였다. 이어 7월 초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인문, 예체능계열에 대한 취업률 적용 철폐 방침을 발표했다.

더욱이 3대 국정과제 중 하나로 ‘문화융성’이 발표되고 전담 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그에 맞춰 전국민을 위한 문화예술교육 강화가 중요한 정책으로 떠올랐다. 모든 국민이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예술을 삶 속에서 즐기도록 하려면 많은 수의 예술인들이 필요하다. 그러니 대학에 예술 관련 학과와 학생이 늘어나야 할 텐데 현실은 정반대이다.

대학들이 예술계를 기피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정부가 들이대는 취업률이라는 잣대에 예술계는 항상 불리한 결과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 대학이 거의 100% 정부의 지원금과 학생들의 등록금만으로 운영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물론 대외적으로 발표할 때는 재단의 전입금이 있겠지만 그걸 믿는 이들은 거의 없다. 오히려 재단으로 빼가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어쨌든 그렇게 절대적인 정부 지원금을 타내는 데 있어서 취업률은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정부로서는 대학들을 다그쳐 취업률 수치도 올리고 아울러 손쉽게 순위를 매겨 지원금을 결정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인 셈이다.

그러나 도대체 그렇게 올라가는 취업률 수치가 교육에는 무슨 도움이 되며 현실에는 어떤 이득을 줄까? 아니, 도움이나 이득까지는 원하지도 않는다. 해악이나 끼치지 않았으면 다행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취업률이라는 잣대는 이미 교육을 파괴하고 현실을 죽이는 독약이 되고 말았다.

이번 폐과 사태는 시작일 뿐이다. 이 일을 신호탄으로 조만간 수많은 예술 전공학과들이 폐과와 구조조정, 정원축소의 선고를 받을 것이 틀림없다. 실제로 정부에서는 획일적 수치를 들이대며 각 대학들에 정원축소 및 구조조정을 압박하고 있다. 얼마나 과감한지에 따라 등급을 매기고 그에 따라 지원금이 결정되는 것은 물론이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 한다. 예술 현장의 입장에서도 교육은 그렇다. 대학에서 예술가를 양성하는 것의 좋고 나쁘고를 떠나 우리의 상황은 오래 전부터 그렇다. 즉 대학의 예술교육이 죽으면 예술 현장의 미래도 장담할 수 없다.

이렇게 예술의 싹을 자르는 정책을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된다. 그저 대학과 교수와 학생들의 일로만 생각하기에는 그 위험의 정도가 너무 크다. 예술계가 모두 나서야 한다. 연극계도 당연히 나서야 한다. 더욱이 가장 먼저 터진 일이 연극과의 폐과 통보 아닌가? 예술이 사회적 불의에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술과 관련한 사회적 불의, 즉 스스로의 일이라고 그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모두 나의 일로 생각하고 발언하고 투쟁하는 태도야말로 사태를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모두가 깨어서 행동하는 연극인이 되기를 기대하며.

2014. 4. 1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오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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