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게임/ 성유경

극장을 나간 바티스트는 어떻게 되었을까

―연극 <무대 게임>

 

                                                                      성유경

 

작: 빅토르 아임
연출: 까띠 라뺑
번역: 김보경
드라마터그: 임혜경
공연일시: 2014.03.11~03.30.
공연장소: 게릴라극장

 

 

존재감=이름값=있어 보이는 것

 

홍상수의 영화 <우리 선희>에서 선희의 한마디는 압권이다. “저는 운이 없어요.” 예술전공자가 아무리 타인에게 시각이 독창적이다, 분석력이 좋다, 순수하다, 저돌적이다, 자기만의 끼가 있다 이런 칭찬 받아도 운 없으면 허망하다. 선희를 칭찬하는 소수의 ‘우리’는 이미 입봉을 하거나 교수직에 있지만 선희는 일반 전공자일 뿐. 그러니까 재능이라는 것도 ‘운’을 제대로 만나야 한다. 그래서 <<정의론>>의 저자인 롤스는 본인의 선택으로 되지 않는 우연적인 운이라는 것을 숙고해야(배제해야) 도덕성을 강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선희 같은 사람은 실패와 자기 불신에 빠지기 쉬우며, 욕구와 활동은 공허하게 되고, 결국 사회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기 십상이다. 운 없는 예술전공자들의 현실을 웃기면서 슬픈 유머로 풀어낸 영화가 <우리 선희>라고 생각된다.

극단 프랑코포니가 공연한 프랑스 극작가 빅토르 아임의 <무대 게임>은 두 잘난 인물 오르탕스와 제르트뤼드의 말다툼으로 진행되지만, 오히려 주목을 끄는 인물은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 바티스트다. 바티스트는 어떤 인물인가. 우선 바티스트는 오르탕스와 제르트뤼드와 달리 존재감이 없는 게 특징이다.

오르탕스는 극장에 등장하는 것만으로 존재감을 발산하는 유명 여배우. 스타니슬라브스키가 싫어하는, 육체적인 매력으로 어필하는 여배우지만 어쨌든 남들과 출발선이 다르다. 텍스트 독해력은 빈곤하다. 두뇌를 쓰지 않는다. 그런데 결과는 다 괜찮았다. 감정과 좋은 기억력(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대사 전달 능력)으로 자리를 점하고 있다. 돈 때문에 허접한 텔레비전극에 출연했다.(TV출연도 연 닿고 운 좋아야 가능하다.) 돈을 아주 잘 벌었다. 어려운 극을 쓰는 유명 작가 겸 연출가 제르트뤼드와 일하면 연극배우로서의 자존감이 회복될 것 같아 그녀와 손을 잡았다. 전화벨(지인이나 대중의 관심)이 울리지 않으면 죽어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외부의 시선에 민감하고, 재능이나 명성이 뛰어난 남자들과의 연애를 자랑하고 싶어 한다. 설령 남자가 악인에 독재자여도 상관없다.

수많은 문학상과 훈장을 받은, 세계적인 명성의 제르트뤼드는 대충 이런 인물이다. 말할 때 현학적인 어휘를 즐겨 쓰며, 외국어도 섞고, 작의(作意)에 도저히 못 알아들을 내용을 적는 자기과시용 지식인. 죽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는, 매우 있어 보이는 인물이지만 위선자이기도 하다. 사회 정의와 민주화의 선봉자처럼 보이지만, 막상 공연 과정에선 스태프나 배우들에게 독재자로 군림한다. 디렉션하는 자아의 모습에 자존감을 느낀다. 주변인들은 그녀 때문에 힘들거나 미치기 직전. 예술가들을 검열하는 반민주적인 남자(극에서는 국정원장으로 설정)와 연애하는 오르탕스가 자아와 작품을 훼손할까 불같이 화내면서도, 대중성을 지닌 그녀가 꼭 필요해 붙잡고 있다.

<무대 게임>은 제르트뤼드의 신작 공연 6주 전, 제르트뤼드와 오르탕스가 연습을 위해 극장에 왔다 큰 말다툼을 벌이는 내용으로 이뤄지는 연극이다. 제르트뤼드는 텍스트에 대한 이해와 분석 없이 극장에 온, 평소 속물이라 깔봤던 오르탕스를 욕보이기 위해 일부러 더 어려운 어휘를 쓰고, 생각을 많이 하는 게 문제라는 반어법과 함께 아예 장님 역할로 바꿔 연기해보라 조롱한다. 오르탕스 역시 연극에 대해 유식한 체하며 가식에 찌든 제르트뤼드를 부수고 싶어 한다. 텍스트를 이해했다 말하면 본인이 무게감 없는 극작가로 여겨질까 싫어하는 것 아니냐, 네 극을 보러 오는 관객들이 불쌍하다, 환자들이 죽음을 앞당길 수 있는 글이다, 졸작이다 등등. 둘은 연극평론가를 욕할 때만 의견의 일치를 보고 내내 틀어지지만, 서로가 ‘윈-윈’할 수 있는 협력자라는 계산은 머릿속에서 지우지 않는다. 결국 극장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지배력을 지닌 두 유명인의 팽팽한 기 싸움과 네임 밸류의 영향력은 이 극이 둘 중 한 명의 복종이나 패배로 끝나지 않음을 예견하고, 여러 결함에도 불구하고 둘이 얼마나 운이 좋고 성공한 사람인지 파악하게 한다.

반면 마치 신과 같은 높은 위치의 조명실에서 그 둘을 바라보고, 속마음을 듣는 바티스트는 아이러니하게도 존재감 제로의 인물이다. 모욕이 과시로 변하는 희한한 싸움의 현장에 결코 끼어들 수 없으며, 사물인 핸드폰 벨소리만큼의 소리도 내지 않는다. 싸움을 말리기 위해 무대에 뛰어들거나, 제르트뤼드가 연습은 끝났으니 가라고 말할 때 인사 한 마디 정도 할 수 있었다. 조명 담당이니까 분명 조명 감독이나 조명 디자이너의 지위로 자존감을 펼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토르 아임이 바티스트를 무대 위에 등장시키지 않는 점, 오르탕스로 하여금 바티스트의 이름을 잘못 부르게 하고, 제르트뤼드에게 꾸중 듣는 장면을 설정한 점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첫째, 오르탕스와 제르트뤼드의 독선과 이기심이라는 허물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 둘째, 사실주의에 입각하면서도 연극의 마법 같은 성격―조명으로 시간과 명암과 자연현상을 창조하는―을 강조. 따라서 바티스트를 현실화시키지 않음. 셋째, 이름값의 문제. 공동작업의 경우 결실을 나누지 못하고 묻히는 이름들의 다수.

필자는 이 중 세 번째 이유에 관심이 간다. <무대 게임>은 연극계에 몸담고 있는 연극인이라면 크게 공감할 사실적인 인물 묘사와 상황이 장점이다. 인간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이 더해진 풍자와 유머가 예증적이기까지 하다. 번역극이지만 이질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물론 공연에 초점을 두어 번역에 신경 쓴 면도 있겠다.) 아무리 사실주의와 판타지 사이에 있는 극일지라도, 첫째/둘째 이유가 주를 이룰지라도 바티스트를 권력으로 예술가를 억압하는 오르탕스의 연인과 ‘존재의 비존재’라는 공통항으로 수그릴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 생긴다. 또한, 극에서 이름의 문제, 이름의 어감, 권위자 등 이름값에 관한 호소가 반복적으로 나온다. 만약 바티스트를 현실과 밀착된, 특히 국내 상황과 밀착된 인물로 파악하자면 무명의 스태프가 아닐까 여겨진다. 조명 감독이라기보다 말단 조명 스태프, 혹은 본업이 조명은 아니지만 그간의 현장 실습으로 연습과정에 조명 담당으로 참여한 인물로 해석해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왜 바티스트를 주목하나면 <무대 게임>이 연극의 의미와 생각할 거리를 주는 코미디임은 분명하지만, 가슴을 건드리는 뭔가가 부족하지 않았나 싶기 때문이다. <무대 게임>은 전술했듯이 두 연극인의 설전이 거듭될수록 모욕이 과시로 들리며, 그들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운이 좋고 성공한 삶을 사는지 그림이 그려지는 작품이다. 작가가 바티스트의 존재감을 무화시킨 의도로 냉소와 풍자는 쏠쏠하지만, 오르탕스와 제르트뤼드의 새도매저키즘이 흥미롭게 부각되지만, 그만큼 소외된 인물을 향한 시선은 두께감이 얇지 않았나 생각된다.

아마 극장을 나간 바티스트는 그 다음날부터 또다시 오르탕스와 제르트뤼드의 설전을 견딜 것이다. 유명인과의 인맥이 바티스트의 운일지 모른다. 연극에서 유명인의 존재감과 기 싸움은 ‘말(언어)’뿐만 아니라 시각적인 장치로도 드러난다. 배우들의 ‘킬힐’ 착용은 공연 연습임을 가정하면 설득력이 떨어지지만, 꼿꼿한 높이와 파괴적인 성향을 즉물적으로 보여준다. 바티스트는 소리도 무게도 없다. 공연은 정석대로 갔고, 번역도 자연스럽고, 배우들의 표정 연기도 시선을 끌었는데 씁쓸한 감상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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