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연극 교육 어떤 의미인가?
우 상전(연극배우)
요사이 배우들의 ‘대담’이 눈길을 끈다. 이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커서 여기에 소개하기로 한다.
배우 안석환은 “연기를 가르쳐보고 싶은 게 소망”이라며 (한국연극 2월호) 김태훈교수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성균관대 공연예술협동과정 석사과정에 진학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중요한 건 테크닉이 아니라 연기자로서 어떠한 삶을 영유할 것인가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배우의 생명력도 길거예요” 그는 배우에게 중요한 게 ‘개성’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성공한 배우’가 자신의 ‘개성연기론’을 후배들에게 펼치고자 대학원에 진학했음을 알리고 있다. 그런 그가 왜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연극대학 (그는 경영학전공) 출신이 아닌 그가 혹시 현행 연극대학에서 실시하고 있는 테크닉 위주의 ‘연기교육’에 불만을 품고, 이를 개선해보려고 하는 의지가 발동한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니면 당장 ‘자격증’이 필요해서?
좌우간 그가 장차 자신의 새로운 ‘개성연기법’을 정리해 선보이면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배우의 ‘대담’도 있다. (한국공연예술센터가 발행한 ‘극장과 나’ 3월호) 중견 여배우인 경기대 이항나교수의 이야기다. 그는 그곳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연극평론을 하려고 동국대 연극과에 진학한 그가 연기를 하게 되었는데 “학부에서 저는 유독 연기를 전 학년을 통틀어 제일 못했다고 봐야 해요.” 그러면서 자기가 무대에서 한 대사가 타학생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그가 지금에 와서 40대 여배우의 ‘대표주자’라고 대담자에게 칭송을 듣고 있다.
그가 연기를 잘하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구체적인 연기트레이닝이나 체계적인 방법을 배우고 싶어 러시아에 갔고, 러시아선생님들과 거의 맨투맨으로 공부했죠.”
그가 대학교수로서 자신의 ‘지진아 탈출기’(?)를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서술하면 후학들에게 좋은 연기 교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연기교육’에 대한 의구심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대담을 통해) 대학교육에 대한 여러 가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1. 먼저, 과연 우리 대학의 연기교육을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연기를 배우러 일부러 대학에 다닐 필요가 있는냐 하는 것이다.
두 배우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통해서 연기에 관한 한, 대학교육의 ‘무용론’을 그들을 통해 읽지 않을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이건 대학에서 ‘연극부’ 활동을 하던 비전공생이 현장에서 배우로 우뚝 설 수 있다는 현실이, 또 대학에서 ‘놀림감’이 되던 배우가 유학을 통해서 좋은 배우가 되었음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2. 따라서 대학의 연기교육이 배우들의 연기력에 보탬이 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 생긴다.
비전공자인 배우가 자신 있게 배우에게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테크닉’ 위주의 연기교육이 합당한 것인가? 혹여 ‘타고난 선천적 재능’만 있으면 배우가 될 수 있는 것을 구태여 비싼 돈을 들여 대학에 다니면서 테크닉을 익히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솔직히 우리는 지금까지 이에 대해 아무도 질문을 던진 적이 없다.
3. 그럼 연극대학은 연극인에게 어떤 존재인가?
왜? 자기 학생이 ‘놀림감’이 될 정도로 연기를 못해도 우리의 대학은 아무런 대책도 강구할 수 없었던 것일까? 그럼 대학은 배우들이 스펙을 따기 위해 다니는 곳인가, 또는 장차 연기를 가르치는 교수가 되기 위해서 다녀야 하는 곳인가 하는 등의 여러 의구심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입시전형’이 교육무용론의 배후?
이런 의구심의 출발은 바로 입시를 위한 ‘사교육’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솔직히 동숭동의 젊은 배우들치고 이에 대한 우려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들의 우려는 입시학원을 포함한 사교육의 황당한 입시를 위한 연기교육 때문이다. 이게 연극계 전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크게 걱정하고 있다.
그들의 전언에 의하면 요사이 입시학원이 입시생들에게 ‘피부관리 코스’까지 만들어 많은 수강비를 갈취(?)하는 변칙까지도 횡행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어째서 ‘사교육’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연기교육이 일반대학을 위한 일반적인 사교육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적으로
1. 사교육이 연기에서는 ‘기초교육’으로 너무나 중요성을 갖기 때문이다. 왜? 고교과정에 공교육이 전무한 상태여서 자연히 ‘사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기를 어디서, 누구에게 배웠느냐에 따라 엄청난 격차를 보이게 마련이다. 한마디로 예술교육은 세계적으로 ‘도제교육’의 형태가 일반적이다. 러시아도 ‘맨투맨’으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이걸 아무런 자격증도 없는 사람들이 입시생을 떼거리로 모아서 ‘사교육’을 시키고, 이를 연극대학교수들이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방치(?)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2. 거기다 연극대학이 아직껏 연기에 관한 한 공인(?)된 ‘연기접근론’과 교육방법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우려는 연극대학으로부터 파생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엄격하게 말하면 입시학원이나 예술고를 탓할 필요가 없는 사안이다. 그들이야말로 대학의 눈치를 살펴 가르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들의 목표는 학생을 대학에 입학시키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입시에 관한 제반 문제점은 연극대학이 책임을 져야 한다.
이건 서울대의 입시전형의 변경에 따라 입시학원이나 고교과정의 수업방식이 달라지는 것과 하나도 다름이 없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2. 또 하나는 대학에서 막 졸업한, 또는 졸업한지 얼마 안 되는 교사들에 의해서 그들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대학에는 이런 ‘교육자’를 위한 프로그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따라서 그들의 ‘가르침’이라는 것도 바로 연극대학의 교육수준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어서 그렇다.
거기다 입시생에게 “내가 이렇게 공부를 해서 입학의 영광을 얻었다”고 선배가 우기면(?) 이를 따르지 않을 수험생이 어디 있겠는가?
따라서 그들의 교육 방법론이란 결과적으로 자신들이 대학에서 배운 것을 전수하는 게 전부일 뿐이다. 따라서 ‘배운 대로’ 가르침으로 해서 생기는 파행임을 동숭동 배우들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3. 그렇다 하더라도, 최소한 대학에 학생이 입학하면 대학이 학생들에서 좋은 ‘클리닉’을 베풀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문제가 더 확대될 수밖에 없다.
우선 러시아처럼 일대일 교육도 불가능하고, 현장경험이 풍부한, 가르침이 많은 출중한 유능한 교수가 태부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학이 현재의 ‘입시전형’을 시급히 개선할 필요가 있다. 아니 아예 없애버리는 것도 좋은 정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이 (이런 현실에서) 최선책은 입시생들에게 ‘테크닉’을 요구하기 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잠재력’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기우리는 게 더 옳은 일이 아닐까? 이런 처지에서 되레 입시생들에게 사교육을 통한 ‘선행학습’을 요구하다가 대학교육까지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난맥상으로 인해 결국 TV드라마 현장에서는 ‘한류’를 핑계 삼아 한예종에 ‘드라마 연기과’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대학은 배우 지망생의 ‘잠재력’을 발견하려 들기 보다는 되레 ‘입시전형’에서부터 불필요한(?) 연기의 ‘테크닉’만을 확인하려 들어 더욱 부작용을 확대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배우 안석환의 주장대로 ‘삶을 영위하므로 해서’ 터득되는 연기를, 초보자인 입시생들에게까지 테크닉 위주의 ‘입시전형’을 실시하므로 해서, 외려 그들을 무가치한 ‘사교육장’으로 몰아넣는 파행을 저지르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현재 실시되고 있는 ‘3분 테스트’에 의한 ‘연기력 테스트’ 방식이 연극대학의 무용론에 크게 한몫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초보자에게 과잉교육?
이건 단적으로 대학이 초보자에게 과잉으로 ‘연기적 테크닉’을 요구하는데서 기인하고 있다고 보는 사람이 나다. 한마디로 지금의 입시전형이 초보자인 연기지망생들에게, 대학이 과도하게 ‘선행교육’을 요구하고 있는데서 기인하고 있다.
과연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에 대한 대답은 두 배우가 대담을 통해 명확히 대신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한국연극은 (물론 세계적 현상이기도 하지만) 짧은 단문인 대사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다, (현대문의 구어체가 주여서) 거기다 셰익스피어연극처럼 과도하게 캐릭터를 요구하지도 않기 때문에, 과도한 화술표현력을 초보자들인 입시생들에게 요구할 필요가 없는 게 현실이다.
요사이 국립극단의 ‘셰익스피어 공연’에서 보듯이 기성배우들에게도 완벽함을 기대하기 힘든 고도(?)의 연기를 막 입문하는 입시생에게 과도하게 요구하고 있는 게 불찰이다.
대학 자체에서도 자기들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못하는 높은 경지(?)의 연기를 입시생에게 무리하게 요구하다가, 되레 입시생들의 ‘선천적 재능’까지도 대학이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기에 충분하다.
현재 우리의 대학교육 수준은 제대로 된 호흡과 발성, 공명과 같은 기초교육을 수용하기도 힘든 현실에서, 이런 바탕에서 완성될 테크닉을 사교육에 미루고 대학이 뒷짐을 지고 있는 것은 단적으로 난센스다.
국립극단 공연의 ‘맥베스’를 관람한 적지 않은 배우들이 지적하는 것으로 이의 확인이 가능할 것이다.
1. 배우들이 말을 하지 않고 전달할 ‘내용’만을 읊조리고 있다.
2. 배우들이 소리만 지르지, 역할에 맞는 ‘품위’를 표현해 내지 못하고 있다.
3. 배우들의 목소리도 비슷하고 용모도, 의상까지도 비슷해 역할이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번역극인데다 대극장공연이라는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이는 현재 우리 연극계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테크닉’의 중요 과제인 게 확실하다.
사실 대극장에서, 한국배우가 번역극의 등장인물 형상화하면서 (번역극 대사를) 우리말처럼 구사해 ‘말을 하기’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번역의 문제가 뒤따른다. 번역자가 배우에게 ‘말을 하도록’ 유도하지 못하면 배우들은 이 함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를 위해서도 대학의 ‘기초교육’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서양 배우들과 달리 우리 배우들은 ‘번역문장’을 소화해 내야 하므로 해서 – 구조(어순이 다른)와 어감이 다른 언어를 구사해 내야 하는 처지에서 서양배우들 보다 연기력을 발휘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그래서 발성과 공명 등의 기초교육이 빨리 자리를 잡지 않으면 안되는 게 우리의 긴박한 현실이다.
그런데도 ‘입시전형’에서부터 ‘독백’으로 긴 번역극 대사를 입시생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말을 못하고 읊조리는 게 버릇이 될 수밖에 없으며, 부자연스런 연기를 처음부터 배우게 되는 게 우리 연극판의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의 대학교육이 50년의 전통을 갖고도 ‘무용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기대수명이 현재 80세에 이르고 있는 현실에서, 대학교육이 길어야 대학원까지 해도 겨우 6년 남짓이다. 그렇다면 한 배우가 배우로서 활동할 기간은 전 인생을 통틀어 자그마치 50년이 넘는다. 그렇다면 학창시절에 반드시 마스터할 게 기초교육인 게 분명하다.
따라서 학생들이 ‘워크숍’ 등을 통한 공연활동을 서두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대학교육은 대부분을 사회에서 해도 될 ‘공연활동’이 차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대학이 사교육에게 대사를 가르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사교육이 ‘연기공부’를 선행으로 실시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당장 ‘워크숍’으로 수업을 하려면 우선 학생들이 기본적으로 ‘대사’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역할’을 소화해 수업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교수업을 위한 연기테크닉을 입시생에게 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배우가 평론전공으로 입학해 연기를 못해 ‘놀림감’이 되어도 대학은 아무런 기능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왜? 대사구사력은 입시 전에 사교육에서 마스터해야 하는 ‘선행학습’이기 때문이다.
‘워크숍 수업’의 부작용
하지만 이런 식의 연기접근법, 워크숍 공연은 초보자인 학생들에게는 엄청난 부담감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선 ‘연극공연’을 하려면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노역’ 등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초가 약한 이들이 이런 역할을 소화하려다 억지스러운 잘못된 연기력(흔히 ‘쪼’라고 함)을 익힐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거기다 비록 ‘학생공연’이라 할지라도 객석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족, 친구친지들이 구경을 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생들이 ‘테크닉’을 우선시 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고, 이게 사교육에서의 ‘선행교육’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동숭동 배우들이 사교육의 난맥상을 지적해도, 대학은 자신들의 수업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도 사교육에 ‘선행교육’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긴 독백을 익히려다가 외려 쉬운 우리말을 못하게 되는 역현상이 나타나도 이를 묵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대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훌륭한 ‘방법론’을 구사하면 얼마든지 뛰어난 배우가 될 수 있음을 배우 이항나를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대학이 입시전형에서부터 ‘발상의 전환’을 할 필요가 있다. 사교육에 기초교육을 맡기기 전에, 또 스스로 기초교육을 실시하기 어려우면 우선 배우가 되기 위한 ‘타고난 재능’을 먼저 이해하고 이를 실천할 필요가 있다는 게 나의 주장이다.
이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1. 우선 배우에게는 타고난 ‘화술감각’이 있어야 한다.
2. 다음으로는 ‘악기의 성능’인 신체조건이 좋아야 한다. 왜? 배우의 ‘발성능력’은 타고난 배우의 신체조건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입시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테크닉보다는) 배우지망생의 ‘악기의 성능’- 신체조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왜 그럴까? 우선 ‘악기’가 좋아야 장래에 표현력(연기력)에서 빛을 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은 (나의 오랜 관찰에 의하면) 선천적인 화술감각보다 외려 뛰어난 발성능력을 뒷받침하는 배우의 ‘신체조건’이다.
왜? 화술감각이란 교사(교육)를 통해서 배워도 충분하지만, 발성능력은 태어날 때부터 갖고 나온 신체적 조건에다 일상을 살면서 목소리를 내는 오랜 습관에 의한 것이어서 배우가 되고자 하는 자신만이 절대적으로 ‘책임’(?)을 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굳이 ‘연기력’을 확인하려면 지망생의 화술능력이 아닌 ‘발성능력’에 따른 신체적 조건을 알아보는 게 더 쉽고 정확하다.
그 다음으로는 ‘정신(두뇌)작용’ – ‘끼’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3분 테스트’로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우리의 현실에서는 눈치로 판단할 수밖에 없어서 정확성에서 가치가 떨어진다.
따라서 확인이 가능하고 정확성도 높은 것은 ‘발성능력’뿐이다. 따라서 ‘입시전형’에서 ‘짧은 시간’에 이를 확인하면 된다. 왜? 이게 (우리의 현실에서는) 좋은 배우가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몇 가지를 더 첨부하면
1. 목이 길고 가슴이 발달하지 못하면 발성능력이 떨어진다.
2. 앞니를 치고나오는 게 발성이다. 따라서 앞니를 교정하면 위험하다.
3. 말을 할 때 사이너스 공명이나 코 공명이 잘 발달되어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울림이 좋아야 목소리도 좋고, 자연히 대사의 딕션도 좋아져 좋은 배우라는 평판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을 가진 배우로는 단연 원로배우이신 백성희선생이 계신다. 그분의 연기론에 대한 논문을 읽어보면 핵심이 신체적 조건에 따른 연기력인데도, 이에 대한 논의는 전혀 없다. 이에 대한 개념이 아직 우리에게 정착하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또 신체적 조건이라면 시극단의 배우 이창직, 발성으로는 (목소리도 좋은) 여배우 서은경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칭찬받는 연기력은 여기에 기인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거기다 발성능력이 떨어지면 당연히 몸의 자연스러운 움직임도 떨어진다. 왜? 배우의 걸음걸이, 제스처는 발성능력(호흡작용)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어서 그렇다.
따라서 ‘사교육’ 교사로부터 전수받아 실력을 발휘하는 ‘3분 테스트’에 의한 화술능력으로는 입시생의 ‘화술감각’마저도 측정하기 불가능하다. 즉 가르친 교사의 실력이어서 연기력 측정으로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교수에 의한 ‘방법론’이 관건
우리는 이항나교수가 러시아에 유학하지 못했으면, 그곳에서 자기의 재능을 발견할 기회를 갖지 못했으면, 스스로 연기에 재능이 없다고 인식하고, 지금쯤 한국에서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연기교육이 다른 예술장르와 차별화된 ‘개성적인’ 교육방법론을 갖지 않으면 전혀 효용성을 발휘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연기가 일상에서의 인간의 말하기와 움직임을 그대로 차용하는 것이어서 외려 이런 문제를 유발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역설적으로 인간의 평소의 일상생활과 유사성이 강해서 그렇다.
그러니까 노래나 춤은 별개의 테크닉을 익혀야 해서 별도의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연기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당연히 방법론도 달라야 한다. 그래서 오늘날 연극이나 현대미술은 과연 별도의 교육이 필요한가 하는 의구심이 생기는 게 사실이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다른 장르의 경우들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서울음대 ‘성악과’의 파행
서울대 ‘성악과’가 10개월째 교수임용으로 갈등을 빚다가 결국 대학본부로부터 ‘폐과’를 단행하다는 경고를 받는 망신까지 당하는 사태로 발전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럼 이런 갈등의 원인은 무엇일까?
간단히 설명하면, 일부 교수들이 “박사학위보다 세계 유명 콩쿠르에서 입상한 최고 실력을 갖춘 교수를 뽑아야 하지 않나!”하는 주장과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수가 학위는 갖춰야 하는 것 아니냐!”하는 신규교수 채용을 갖고, 교수들이 양쪽으로 갈라져 싸우다가 빚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콩쿠르에 입상한 실력가일지라도 그의 학력이 정규 학위가 아니면 국내에서 학위로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학교 측이 전해에 그가 받은 미국 ‘아티스트 디플로마’를 박사학위와 상응하는 자격으로 인정한다고 내규로 정했다며 이를 밀어붙이는 바람에, 반대편 교수들이 ‘특혜’라고 주장하면서 생긴 소란이 결국 크게 번져 ‘서로 죽이기 싸움’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비학위자 교수는 교수들과 100여명의 학생들 앞에서 엄격한 오디션을 거친 ‘실력파’라고 한다. 따라서 음대학장은 “예술 계통의 특성상 박사학위는 교수임용의 필수자격이 아니며, 학위에 상응하는 자격이나 경력을 고려해 심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결국 ‘밥그릇 싸움’이 감정싸움으로 번져 노래 소리가 아닌 ‘저주의 목소리’가 뿜어 나오게 된 게 대충 사건의 전말이다.
이게 결국 상호간에 투서와 폭로전으로 발전해 도저히 ‘자정능력’을 상실해 대학본부측이 ‘폐과’을 단행한다는 협박(?)을 하기에 이르면서 ‘국악과 교수’가 학과장이 되는 난센스가 벌어진 것이다.
‘한국발레’의 현실
비교학적(?) 개념으로 ‘한국발레’의 현실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한국발레는 러시아(소련)의 개방으로 엄청난 성장을 이룬 게 사실이다. 많은 발레리나들이 러시아로의 조기유학을 통해 한국발레를 일으켜 세웠다. 지금 한국발레는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누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도 현재, 발전의 원동력이 된 발레리나들은 내심으로 걱정이 태산이란다. (이건 발레리노들도 마찬가지다) 젊어서는 뛰어난 기량으로 인기도 얻고 자신들의 성취욕도 만족시킬 수 있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발레처럼 젊은 나이에 은퇴를 해야 하는 실정에서는 더욱 그렇다.
왜? 그들에게는 ‘학위’가 없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러시아에서 기능만을 익혔을 뿐, 그리고 각국의 발레단에서 젊은 날을 무용수로 보냈으니 학위를 갖기 힘든 건 자명한 일이다.
거기다 당연히 조기 유학으로 국내 대학과의 연결고리도 없으니, 현역에서 은퇴를 하면 대학교수로 재취업(?)이 불가능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그들의 화려한 기량은 그만 사장되고 마는 결과가 되고 있을 뿐이다.
왜? 한국은 대학교수가 되려면 ‘학위’를 이수할 것을 요구하고, 거기다 ‘논문’까지 통과되는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에 대학을 제외한 변변한 교육 시스템 – 발달된 아카데미가 존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공공단체의 발레단은 국립 한 곳뿐이다. 하지만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도 절대로 더 만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학원에서 입시지도를 하는 게 고작인 게 현실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좋은 재능을 흡수할 시스템은 전무한 상태에 있다. 따라서 그들은 과거를 회상하며 여생을 보내야 하는 딱한 현실에 놓인 게 현실이고, 한국발레는 영원히 ‘좋은 교사’를 양성하지 못한 채, 지속적으로 기량을 익히려면 해외로의 조기교육에 의존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게 현실이다.
가수 ‘타블로’ 사건이 주는 교훈
이 사건은 ‘타블로’라는 연예인(가수)이 미국 스탠포드대학에서 ‘영문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고 자랑을 하는데, 이를 증명할 ‘논문’이 없다는데서 야기된 사건이다.
결국 이 사건은 사건의 주인공을 죽음 직전으로 몰아넣은 거대한 ‘스캔들’ 사건으로 발전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고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미국에서는 (석사학위를 논문이 아닌) ‘수필’을 써도 학위로 인정한다는 것을 한국인들에게 주지시키고 단락을 맺었다.
지금 미국에서 소설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으며, 노벨상 후보에도 오르는 이창래라는 교포작가가 있다. 이 친구의 소설 데뷔작 ‘생존자’도 대학원에서 논문 대신에 쓴 창작소설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미국대학은 예술에 관한 한 ‘MFA의 개념’이 확실히 존재해, 어차피 소설가가 될 사람에게 구태여 ‘논문’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대학은 왜 연기를 전공하는 배우들에게도 대학원과정에서 반드시 ‘논문’을 쓰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를 당연시하고 있는 것일까?
1. 대학원과정에서조차 배우에게 ‘실기’를 가르칠 형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일 거다.
2. 그런데도 대학원 과정을 설치해 배우들에게 이를 이수토록 하면서 ‘논문’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기교수’를 소망하는 배우들이 ‘논문’을 쓰고 학위를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미국의 경우는 ‘MFA’라 해서 대학원 과정에서도 죽도록 ’연기공부‘를 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연극대학원은 배우들에게도 죽도록 ‘논문공부’를 시키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비단 연기만이 아니다. 앞에서 보듯이 극작이나 연출전공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논문을 쓸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론 전공자라면 몰라도 실기로서 ‘밥벌이’를 할 사람들에게 어째서 논문을 강요하는지 모를 일이다. 따라서 이런 결과로 ‘실기교육’은 당연히 뒷전으로 밀리고 있는 것이다.
3. 그렇다면 의구심이 커진다. 대학원과정을 운영하기 위한 편법인가? 아니면 교수가 되는 과정을 일부러 어렵게 하기 위한 것인가?
4. 이로 인해 ‘실기교육’이 발전을 멈추고 써먹지도 못할 이론교육을 배우들에게 강요해서 연극계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솔로몬의 지혜’(?)
어느 날 젊은 여배우로부터 전화가 왔다. 다짜고짜
“상담을 할 게 있어요”
“뭔데?”
“석사과정을 마치고 이제 논문을 써야 하는데요. 마침 출연교섭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지금 출연을 거부하고 논문을 써야 하나요 아니면 출연을 해야 하나요?”
“글쎄?”
“얼마 전에 논문을 써서 학위를 받은 선배가 논문 쓰지 말고 출연을 하래요. 그래 너무 헷갈려서 전화를 한 거예요.”
“그 사람은 왜 ?”
“논문을 써서 학위를 받아야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니 출연을 하는 게 더 실속이 있을 거래요. 자기도 후회 한다면서요”
“그래도 논문을 썼잖아”
“출연교섭이 없어 심심해서 썼대요. 그렇다고 출연을 하래요, 출연 기회를 잃으면 안 된다고요, 그런데 출연하다가 논문 쓰는 시기를 놓칠 것 같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어서 전화를 했어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그가 ‘내 자식’이라는 생각으로 대꾸를 한다. 내 자식이라면 논문을 쓰라고 한다. 왜? 들어간 학비가 아까워서다. 출연을 해서 어느 세월에 대학원 학비를 벌겠는가?
그래도 (국립극단에서의 경험으로 비쳐보면) 뚜벅뚜벅 학위를 딴 친구들은 극단이 해체된 후에도 ‘교수’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논문을 쓰라고 권했다. ‘논문’을 쓰면 희망이라도 있지, ‘배우짓’은 해봐야 영원히 희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아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도 국립이라는 단체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그 자들이 세월을 보냈으니 망정이지, 지금 당장 출연을 해야 하는 젊은 배우들에게는 내 의견이 절대로 옳은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정말 ‘솔로몬’ 이상의 지혜가 필요한 조언이었다.
교수임용의 실패 사례
한때 대학에 ‘연극과’가 생기면서 이른바 유명 연예인급 배우가 교수로 초빙되지 않는 대학이 없었다. 아마 유인촌 전 장관이 이에 선두주자일 것이다. 요사이도 스타 고현정과 설경구가 대학의 겸임(특임)교수가 되었다고 해서 화제다.
그런데 한 3년여가 지나자 대학에서 썰물처럼 ‘유명인’교수가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그 중에 몇 배우들은 스스로 대학원에 진학해 부족한 공부를 하기도 하는 진풍경(?)이 벌여지기도 했다. 그럼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일까?
새로 대학에 학과가 생기면서 반드시 필요했던 게 바로 연예인 교수의 ‘유명세’였을 것이다. 대학이 학과의 개설을 수험생에게 알리는데 이보다 좋은 홍보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대학이 이름이 알려진 배우들을 교수로 초빙했다. 그런데 이들이 썰물처럼 사라진 것은 또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한마디로 학교선생이 되어 남을 가르치려면 ‘교수법’이 있어야 하는데, 첫날은 자기 자신의 ‘인생이야기’로, 둘째 시간에는 ‘방송국이야기’로 때우고, 그러니 셋째 시간부터는 할 게 없어서 너무나 힘들었을 것이다.
차라리 ‘워크숍’ 시간을 배정받았으면 그나마 가르치는 게 가능했을 텐데, 이마저도 이론(?) 선생들에게 빼기고 나니 ‘교육방법론’이 없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게) 연기를 가르치는 교수가 되려면, 먼저 학생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방법론을 터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교육에서도 ‘사범대학’이나 ‘교육학과’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교재가 있어야 하며, 수업의 지침서나 참고서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유명연예인에게는 자기를 내세울 ‘얼굴’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저 신입생을 끌어오는 ‘광고모델을 하다가 그만둔 것이다.
그에 반하여 연기경험이 없는 이론 선생들에게는 수업시간에 ‘노가리(?)라도 풀 이론서나 논리서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도 학교에서 건재를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원에서 ‘논문’을 요구하는 것은 ‘노가리’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연기가 이론화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예술가에게 교육이 필요한가?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을 맞아 ‘예술가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가 흥미롭게 다가오고 있다. 요사이 흥미를 끄는 것은 ‘과연 이런 엄청난 작품을 쓴 사람이 정말 초라한 출신 신분의 셰익스피어가 맞는가?’하는 의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많은 작품을 쓴 게 셰익스피어가 아니라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의문을 갖는 사람들로서는 셰익스피어가 아닌 ‘다른 귀족’이 썼다는 의문을 갖기에 충분할 것이다.
귀족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궁중의 섬세한 법도를 알고 작품을 쓸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 관한 갖가지 의구심이 생기는 게 사실이고, ‘세익스피어의 실체’에 대한 논쟁이 치열한 것은 당연할 일일 것이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에서 대법관 3명이 나서 (순수한 법률적 견지에서) 모두의 주장을 모아 진부를 가리는 판단을 했지만 셰익스피어가 그 좋은 작품들을 쓴 작가가 아니라는 음모설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귀결되었다고 한다.
이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고전, 예술, 역사, 관습, 정치, 종교, 수사학, 의학, 법학, 체육, 군사, 천문학 등의 광범위한 지식을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의문이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이를 뒤집을 확실한 근거가 나오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과연 제대로 된 ‘학교교육’을 받아야 이렇게 좋은 작품을 쓰는 예술가가 될 수 있는가하는 의문과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처럼 대학교육이 전부라고 여기는 예술계에서는 말이다.
물론 이는 셰익스피어와 같은 천재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에서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예가 있다. 영화감독인 김기덕이다. 그는 한국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는 명문대학 출신도 아니고, 이른바 ‘가방끈’이 길지도 않으며, 연극영화학과에서 ‘박사학위’도 받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영화인 중에서 가장 세계적으로 알려진 영화예술가다.
이런 현상은 현재 연극계에서도 많은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연극계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는 극작가와 배우들 중에는 형편없는(?) ‘학위’의 소유자들이 많은 게 현실이다. 그런데도 ‘학위’가 예술성을 담보한다고 여기는 후학들을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든다. 그저 생각 없이 시대의 트렌드를 쫒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예술가에게 ‘학위’와 ‘논문’은 어떤 가치를 갖는 것일까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거기다 연극대학에서도 ‘학위수여’가 만발하는 실정에서는 더욱 이런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건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지금 창의성의 대명사인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 저커버거 등의 IT계의 거물들만 해도 모두가 대학 중퇴자들이다. 잡스는 대학교육을 부정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과학도도 아닌 예술가들이 학위를 따려고 나서고, 논문을 쓰느라고 고생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일류기업인 삼성이 매일 ‘위기타령’을 하는 것도 직원 중에 ‘학위자’가 없어서가 아닐 것이다. 새로운 ‘먹거리’를 찾기 위한 상상력과 창의성의 고갈을 염려하고 있기 때문일 거다. 이는 예술세계와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술가야말로 상상력이 고갈되어 ‘새로운 먹거리’를 마련하지 못하면 관객들의 외면을 받아야 하는 점에서 많이 닮았다. 그런데 상상력을 발휘할 연극인들이 날만 새면 ‘논문’을 쓰겠다고 과거(선배들)의 업적(?)만을 뒤지고 있어서야 말이 되는가?
그러니 예술가가 학위를 노리는 것은 단지 대학에서 교편을 잡아 좋은 ‘생활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자기의 소중한 두뇌를 남의 논문 뒤지는 것에 소모하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그래서 예술가가 학위를 따러 나서고 논문을 쓰기 시작하면, 예술가로서 생명은 끝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는 게 사실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단적으로 우리 대학의 공부라는 게 ‘창조’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학문의 세계는 주로 기존의 법칙을 탐구하는 게 주목적이다. 하지만 예술은 기존의 질서를 따르면 안 된다. 따르지 않아야 한다. 왜? 그러면 끝장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자기만의 독창적인 재능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배우 안석환은 ‘개성연기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니 예술가란 선배들의 발자취를 몰라도 그만이다.
단지 그들을 통해 ‘힌트’만 얻으면 되는 정도다. 따라서 대학에서 깊이 있게 과거를 더듬고 있으면 예술가로서의 생명은 끝났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대학교육은 ‘미래의 창조’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아니 과거만이 존재할 뿐이다. 과거에 누가 이런 주장을 했고 논리를 폈으며 반드시 이를 증명하는 주석과 참고문헌만을 제시하도록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대학원에 진학해 타인의 논리만을 열심히 쫒아 주석을 붙여 논문을 쓰면 예술가가 바라는 인생은 끝난다고 여기는 사람이 나다.
연극계의 조로현상도 우리의 교육과정과 무관치 않다. 어려서부터 자기의 생각을 발전시키고 상상력을 제고하는 ‘뇌 운동‘을 활성화시키지 못하고, 부질없이 남의 지식만을 익힌 결과다. 그래서 ’가방끈‘과 예술가의 재능은 서로 ’상극‘인 것이다. 특히 한국의 ’주입식‘ 교육은 더욱 이런 심각한 부작용을 유발시키고 있다.
혹 이런 내 의견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과거의 논리와 선배들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논리를 개발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나의 좁은 경험에 의하면 인간의 두뇌는 그렇게 자기 편리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두뇌
‘뇌과학’은 인간의 두뇌는 신체의 겨우 2%에 지나지 않지만 전체 에너지의 20%를 사용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인간이 생존에 필요로 하는 기본 에너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에너지를 뇌가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뇌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또 뇌는 근육처럼 발달시키는 대로 발달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왜? 뇌도 ‘뇌 근육’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일반근육처럼 많이 사용하는 부위만 발달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이 뇌의 어느 부위를 얼마나 사용하느냐에 따라 뇌 근육이 발달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이 어떻게 머리를 쓰고 뇌를 움직이느냐에 따라 인간의 정신활동의 결과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연극판에서는 자신들이 자기의 두뇌를 잘못 사용해서 연극이 발전하지 못하고 퇴보하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예술가에게 실시되고 있는 우리 대학의 ‘학위취득’ 과정은 좋은 제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기꾼은 남을 속이는 데에만 머리를 쓰는 사람이어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범죄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추리소설가나 범죄수법을 다루는 작가들은 이들의 조직적인 머리를 들여다 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예술가에게 필요한 상상력이나 창의성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예술가가 어떻게 머리를 써야 하는가가 너무나 자명해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대학이나 대학원은 예술가에게 ‘논문’을 쓰게 해서 오히려 인간의 두뇌 근육의 발달을 저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하고 있다.
‘논문’의 패러다임을 바꿔라
어쩔 수 없이 현장예술가에게 학위를 주기 위해 ‘논문’을 쓰게 하려면 대학은 논문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것이다.
‘한국연극학회지’에 실린 논문들을 보라. 이론가들은 그 많은 주석과 참고문헌을 토대로 글을 쓰는데 이거야말로 이론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글을 쓰는 방식일 것이다. 이를 현장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두뇌의 발달을 위해서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 현장인이 아닌 사람이 국립의 ‘예술감독’이 돼서는 안 된다고 외치면서, 대학원에서 공부는 비현장인들을 따라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현장 시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나는 어떻게 지진아에서 탈출했는가?’ ‘왜 연기는 테크닉이 아닌가!’를 쓰는 게 당사자에게도 그리고 다른 연기 전공자들에게도 더 이로울 것이다.
오래 전에 한국일보 명 칼럼이스트로 이름을 떨치던 (국무총리의 하마평에도 올랐던) 장명수 주필이 이런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대학이 입시로 막 논술고사를 실시하던 시절이다. 그래서 각 대학이 입시생의 편의를 도모한다고 대학교수들이 나서서 자기 대학의 논술고사 예문을 미리 제시한 적이 있었다.
그걸 읽어 본 그가 자신의 글에서 “내가 지금 대학시험을 치러야 한다면 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없을 것 같다. 왜? 나는 이런 어려운 글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탄을 한 적이 있다. 그 뒤에 논술고사가 많이 쉬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한마디로 권위의식의 발로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래 ‘학문의 세계’는 그렇다고 인정을 하자. 왜? 연극학회지에 글을 실으려면 최소한 그 세계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글 – 기호학이 아닌 암호학(?)으로 글을 써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학회지’란 팔려고 출판하는 게 아니라, 학회원들끼리 자기 과시(?)를 위해 글을 쓰는 게 목적이어서 그렇다 치자.
하지만 ‘예술의 세계’는 세상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세계여야 한다. 예술가가 창조를 하는 목표는 세상 사람들과 교류하기 위한 것이지 예술가끼리 읽고, 보기 위한 게 아니다.
베토벤이 작곡가를 위해서 작곡하지는 않았다. 이건 화가인 피카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작품을 갤러리에서 전시해 관객을 모으고 판매를 해서 어마어마한 수익을 얻어 거부가 되었다. 따라서 연극교육도 이 둘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과 같은 ‘학위논문쓰기’는 (현장인들의 입장에서는) 솔직히 읽어볼 가치를 찾기 힘들다. 그저 자기들끼리 ‘학위의 요건’을 충족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가장 크나큰 문제는 이런 방식으로는 영원히 좋은 실기교수를 배출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교수법’을 연구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현행 우리의 교수제도는 복잡하고 다양하다. 즉 명예교수, 석좌교수를 필두로 초빙, 특임, 객원, 겸임, 대우, 외래. 연구, 산학협력교수 등 너무나 다양하다. 따라서 논문을 강요하기보다는 이런 제도를 이용하면 좋지 않을까?
지금 대학은 논문을 쓰지 않거나 ‘표절논문’을 쓴 사회 고위직출신을 석좌교수로 임명해 대학의 이권에 개입시키고 있다고 해서 논란이 일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데 연극계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학위논문’을 쓰도록 요구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아직도 ‘스타니슬랍스키 연구’로 학위를 주는 것을 보고 있으면 답답한 마음이 앞선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자신의 작품 출연기(희곡분석)로 ‘연기논문’을 대신하니 이걸 연기를 위한 논문이라고 할 수 있겠나? 그러니 ‘학위논문’을 들추면 읽어 볼 게 없다.
솔직히 연극판에서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떻게 박사학위가 없는 교수가 박사과정을 가르치는지 모르겠어요. 교수가 되면 박사학위가 없어도 박사과정을 가르칠 수 있나요?”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훌륭한 교육부가 있는 나라에서는 이런 게 가능하다!”
이러니 우리 대학의 실기교육은 반세기를 넘어도 변화도, 개선도 기대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연극의 사회학 2
여기에도 ‘연극의 사회학’이 존재한다. 아무리 내가 길게, 상세히 ‘쓴소리’를 해도 이게 개선될 기미가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왜? 여기서도 절대로 자기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자존심’이 우리의 사회학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령 공연 프로그램을 보면 공연에 연기코치(보이스 코치) 등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무대의 현실은 전혀 그런 기미를 느낄 수 없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건 연출자가 자기보다 더 역량 있는 우수한 연기코치를 고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연출가가 그저 노력하고 있다는 시늉만을 내고 있을 뿐이어서 그렇다.
이건 한국의 모든 연극공연에서 엿볼 수 있는 ‘사회학’이다. 한국의 연출가들은 절대로 자기보다 우위에 있는 재능 있는 사람을 스텝으로 고용하지 않는 이유일 거다.
가령 공연을 본 관객들이 “정말 뛰어난 무대미술이다”하는 칭찬을 하면 한국의 연출자들은 내심 불쾌해 한다. 한마디로 자존심을 상해한다. 따라서 자기만 못한(?) 사람을 스텝으로 고용해 “제가 많이 가르쳤죠” 이런 말을 하고 싶어 한다. 따라서 실력이 뛰어난 스텝과 공동 작업을 하는 걸 은연 중 경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는 ‘흥행’이 절대적 권위를 갖지 못하는 현실 – 제작자의 입김이 약화된 체제와 일치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뮤지컬이 돈벌이를 위해 특출한 스텝을 광고하는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뮤지컬은 연출가나 안무가가 누군지도 모르고 구경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특히 국립극단과 같은 공공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리더십과 관객을 향한 노력이다. 공공극장은 리더십이 연출자들의 이기심을 막아내고 공연이 관객을 향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동양3국에서 제일 뒤떨어진 연극계가 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는 대학교육도 마찬가지다. 절대로 ‘주임교수’가 자기보다 뛰어난 실력 있는 교수를 채용하지 않으려 한다. 서울대 성악과 사건도 실제로는 여기에 기인하고 있을 것이다. 실력 있는 성악가가 교수로 부임하는 것을 막기 위해 벌린 사건일 것이다.
이런 옹색한 현실이 ‘연극과’가 생긴 지 반세기를 넘겨도 기초교육 하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실정이라면 100년이 지나도 마찬가지일 거다.
어떻게 대학 연극과를 다녀야 하는가?
우리나라는 대학졸업(대졸)이라는 스펙이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반드시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 하지만 입학한 후에도 대학이 챙겨주지 못하는 자신들의 연기적 ‘잠재력’을 테스트하기 위한 작업을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학교가 이를 수행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들이 이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 이건 연기만이 갖는 특성 때문이다. 자신이 자기의 재능을 확인할 길이 없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지 않은가. 따라서 자기의 재능을 직접 현장을 통해서 확인하는 게 상수다.
물론 사회에 나오기가 두려울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배우짓’을 하려면 사회에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배우지망생에게는 강심장이 필요하다.
현장으로 나가면 ‘노역’과 같은 자신에게 맞지 않은 역할을 소화할 위험성이 낮아지고, 분명한 것은 자기의 ‘잠재력’을 여러 선배들과의 작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으며, 대학에서 들을 수 없는 여러 조언들을 그나마 조금 일찍 선배들로부터 들을 수 있는 강점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찍 현장에 진출을 시도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결론
1. 대학의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좋은 교육체제를 가진 게 연극원이다. 따라서 교육부 소속의 일반대학과 달리 ‘MFA’과정을 만들어 ’논문‘을 없애야 한다.
이건 오순택선생의 기념잔치- 연극원 ‘제자 잔치’에서 오선생은 “처음 한국에 와서 느낀 게 ‘한국은 연기를 몸으로 한다’는 것을 잊고 있는 나라였다”는 말씀을 하셨다. 정말 안타까운 우리 현실을 단 한마디로 정리했다. 노배우의 말을 깊이 새길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대학도 먹고 살려면 ‘학위장사’를 해야 한다. 하지만 교육기관은 기업이나 장사꾼과는 달라야 한다. 왜? 교육이 잘못되면 해당 분야를 망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교는 장사를 해도 책임과 의무가 수반되어야 한다.
아무리 우리 정부에서 교육부가 제일 엉터리라지만 현재의 연극대학, 더 나아가 예술대학을 이렇게 운영하게 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연극계도 교육부나 학교운영자를 설득할 필요가 있다.
이런 식으로 운영을 지속한다면 방송에 나가서라도 공개적으로 ‘연극과 폐지’를 주장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 국민들에게 호소하는 게 유일한 개선책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3. 대학에 대해 발언을 하면 교육부에 핑계를 댄다. 그 말도 틀리지는 않다. 하지만 서울대 성악과처럼 교수들이 학내분쟁에서는 ‘피를 튀긴다’. 그렇다면 교육부에 대해서도 싸움을 걸 수 있지 않은가! 요즘 규제타파가 대세인 이런 기회를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논문 대신에 작품(공연)을 발표해도 학위를 주게 되면 대학이나 수강자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규제타파’를 외치는 이때 발 벗고 나서자, 모여 앉아서 허공에 대고 ‘박근혜 정부’ 성토만 하지 말고.
이글을 쓰고 난후에 박대통령이 공과대학 혁신안을 마련했다고 한다. 골자는 “논문만 써내는 공학교육엔 미래가 없다.”이다. 공대 졸업생이 연간 7만명 가량이 배출된다고 한다. 그런데 산업현장과 동떨어진 논문만을 양산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 이공계 출신인 박대통령이어서 문제점을 알고 있는 듯하다.
이걸 우리식으로 말하면 “논문만 쓰는 연극교육엔 미래가 없다.”가 될 것이다. 이 기회에 우리도 정부에 건의를 하자. 우리의 문제점을, 그리고 우리도 자기들의 제자를 위해서 개선을 해보자. 홍대 미대는 실기시험도 없앴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50년 역사를 자랑하는 연극대학이 아무런 시대정신도 없이 옛날을 답습을 하고 있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지금 연극대학은 외려 대학의 ‘연극동아리’들의 활동을 제약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반추해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