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후시딘/ 오민아

‘더 러부 스토리’에서 ‘어 러부 스토리’로

<젊은 후시딘 – 어 러부 스토리>

 

오민아

 

작:   윤미현

연출: 윤한솔

출연: 곽동현, 이필주, 임정희, 김효영, 이정호, 전선우, 정양아, 황미영

장소: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일시: 2014.02.21 ~ 2014.03.02

 

 

<젊은 후시딘- 어 러부 스토리>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차세대예술인력육성사업” 연극분야에 윤미현 작가가 선정되며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이 공연은 윤미현 작가와 윤한솔 연출이 함께하는 세 번째 작업이기도 하다. 이번 공연 역시, 윤미현 작가가 삶의 어두운 단면에서 건져 올린 언어들과 윤한솔 연출의 세상을 바라보는 비뚤어진 시선이 만나 기묘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해냈다.

무대는 젊은 후시딘의 가족이 사는 닫힌 공간 ‘집’과 모두에게 열린 공간 ‘공원’, 그리고 이 두 공간을 연결하는 길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공간 설정은 닫힌 공간으로부터 열린 공간으로 향하는 가족의 이동을 상징적으로 내포하고 있으며, ‘담길 방이 없어 떠도는 사람들’이라는 작가의 메시지 전달에 효과적이었다. 무대 위 젊은 후시딘의 집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대야, 양동이, 욕조, 변기와 같은 오브제들이 이러한 이미지 구현에 도움이 되었다. 지붕을 뚫고 떨어지는 빗물을 막아보려 노력하지만 결국 그 물에 젖어 퉁퉁 불어버린 가족들의 무기력함이 윤미현 작가가 재현하고자 했던 이 시대의 닫힌 공간 ‘집’을 구현해 내는 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작에서 발견되는 젊은 후시딘의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의 주된 이미지인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압도적인 양의 물’, ‘지하보도를 연상케 하는 습도’ 등이 무대에서 충분히 재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이 공연은 결국 집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집은 권력으로써 존재한다. 젊은 후시딘의 가족에게 월세를 요구하는 소유주, 도도한 여자는 젊은 후시딘 가족의 희노애락을 장악할 만한 영향력을 갖는다. 심지어 70대의 여자친구가 젊은 후시딘을 사로잡은 이유 또한 집이며 집을 향한 가족들의 노골적인 욕망 표출은 여자친구는 젊은 후시딘을 떠나가는 계기가 된다. 결국 집이라는 권력 앞에서 젊음과 청춘마저도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집을 소유한 이 두 여자들은 젊은 후시딘의 가족들에겐 결코 호락호락한 존재가 될 수 없으며 이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집 없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일면이기도 하다.

젊은 후시딘과 그 가족들은 무기력하다.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빼고는 대부분 방바닥에 드러누워 시간을 보낸다. 밑천이 안 드는 무당이나 꽃뱀이 되겠다는 엄마와 이를 평가절하 하는 가족들의 모습은 마치 집이라는 권력으로부터 양산된 우울증 환자들의 모습과 같다.

시대의 희망을 대변해야 하는 어린 마데카솔과 신신파스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집을 산다는 건 마치 전래동화에 나오는 심청이 인당수에 빠져 심봉사의 눈을 뜨게 했다는 거와 같은 거잖아요.”라는 냉소적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들에게 집을 소유한다는 것은 절대로 전복되지 않는 부동의 계급을 획득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마데카솔과 신신파스의 시선은 작가가 경계하는 시대의 시선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신들이 먹고 싶은 밑반찬 하나 사 먹을 수 없고 자신들의 몸을 편히 뉘일 집 하나 없는 젊은 후시딘의 가족들은 모두 성나있다. 배우들의 성난 화술을 접하며 관객은 이들의 비루한 삶에 남겨진 감정이 분노밖에 없다는 걸 눈치 챌 수 있다. 이들이 분노를 해결하는 방법은 가족구성원들이 서로에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뿐이다. 이들은 서로 상처받고 또 그 상처는 곧 단단해져 더 큰 상처 앞에서만 반응한다. 분노에 대응할 대상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출은 이 분노에 희극성을 부여한다. 관객들은 이를 만끽하며 분노와 웃음 사이의 복잡다단한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충분한 훈련이 되지 않은 상태의 화술이 어렴풋이 그 의도만 전달한 채, 그 의도 속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지는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젊은 후시딘과 그 가족 외에도 서민의 삶을 개혁하겠다는 국회의원이 등장한다. 그러나 막상 당선이 된 국회의원과 기득권 세력인 ‘누나’가 결탁하면서 서민들의 삶은 또 다시 지붕을 뚫고 내리는 빗물로 가득 차오른다. 대통령이라고 해서 국회의원과 별반 다르지 않다. 공연의 시작부터 끝까지 티브이를 통해 계속되는 대통령의 근엄한 주택공약 발표는 젊은 후시딘과 그 가족들이 겪는 불운함 사이의 괴리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실천되고 있지 않은 정부의 주택공약은 마치 이들의 삶과는 무관한 소음처럼 느껴진다.

대학을 나왔음에도 상자 같은 고시원에 살며 끊임없이 시험을 준비해야만 하는 수험생의 모습에서 우리는 또 다른 절망감을 경험하게 된다. 젊은 후시딘과 그 가족이 처한 상황과는 다르지만 고시생 역시 닫힌 공간인 ‘집’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꾼다. 그러나 고시생이 용기를 내보기 위해 찾아 곳은 젊은 후시딘의 엄마가 차린 점집이었다. 20년 동안 스스로 마주한 현실에도 변변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던 젊은 후시딘의 엄마는 고시생에게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실질적인 충고를 해준다. 이야기를 통한 경험의 공유 과정은 젊은 후시딘과 그의 가족의 ‘집’을 잠시나마 고통을 펼쳐놓고 직시하는 장소로 변모하게 만든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도 구제해주지 못했던 서로의 고통을 나눔으로써 자가 치유를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 공연에서 ‘집’을 염원했던 모든 등장인물들은 자의가 아닌 타의로 집을 떠나게 된다. 그들이 찾아가는 대안 공간은 열린 공간 ‘공원’이다. 이 공간은 열린 공간이기 때문에 그 어떤 권력도 작용하지 않는 공간이며 권력이 찾아오면 언제든 새로운 열린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비록 이들의 삶이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이란 이러한 열린 공간뿐이며, 자신의 영역표시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철새처럼 이동해야만 하는 단촐한 세간 살림을 소유하는 것이 전부이지만 아마도 권력으로부터 벗어난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적어도 서로에게 분노할 필요는 없다는 일종의 안도감을 안겨주지는 않았을까.

그들은 열린 공간인 ‘공원’을 ‘집’으로 결정하고 이주를 마친 뒤, 동그랗게 둘러 앉아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생각을 전환하는 것 밖에는 해결책이 없는 이들의 모습이 아이러니하게도 동시대 관객들의 가슴 한 켠을 시리게 한다.

결국 우리에겐 아무런 현실 대책이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 말미에 등장하는 허리를 숙인 채 정지한 젊은 후시딘 가족의 모습은 마치 액자 속에 전시된 그림과 같았다. 아마도 작가와 연출은 관객에게 젊은 후시딘 가족을 통해 동시대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그려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바로 이 자화상을 보며 관객은 고민하기 시작할 것이다. ‘나의 집은 어디인가?’, ‘나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 공연은 젊은 후시딘과 그 가족을 통해 이 가족의 집을 향한 애착, ‘더 러부 스토리’에서 출발했다. 작품소개에서 또한 “후시딘의 가족과 동네 사람들은 집이 없기 때문에 사랑에 실패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젊은 후시딘과 그 가족의 이야기는 자신이 담길 공간을 찾는 이 시대 대한민국 관객들과 교집합을 이루며 ‘어 러부 스토리’로 그 의미 확장을 시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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