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 단편선: 마음의 오류/ 이예은

2013 산울림 고전극장 

<김동인 단편선 – 마음의 오류> 

 

이예은(드라마터그, 연극학 강사)

작:  김동인
연출: 박지혜
단체: 양손프로젝트
공연일시: 2014/03/14 ~ 2014/03/23
공연장소: 산울림소극장
관극일시: 2014.03.21.(금)

 

+ 묵독과 낭독 사이에서, 문학이 혹은 연극이 할 수 있는 일

 

소설이라는 장르의 기원적 힘은 묵독의 힘이다. 서구 유럽에서 어느 특권을 지닌 자들만이 향유할 수 있었던 문자 문화의 전통이 일반인에게 서서히 확산되었던 12세기 무렵, 로망스라고 일컬어지던 문학이 일반인에게 향유되기 시작할 무렵,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고도 언어 소통을 할 수 있었을 그 첫 무렵을 상상해 본다. 구어로만 접하던 인류 공동의 서사 같은 것이 자신만의 개인적인 문자 텍스트로 읽혀졌을 그 시기. ‘최초의 독서’를 접했을 그 당시 사람들의 충격을 상상해 보면, 소설의 기원적 힘이란 진정으로 묵독의 힘이었을 것이다. 입 밖으로 언술되는 구술 문학이 최초로 내면화된 문자 문학으로 읽혀졌을 때의 충격. 그들에게 최초의 정신적, 내면적 활력으로 다가왔을 어떤 마술적 황홀함. 소설적 황홀함이란 정신적인 것을 그 어떠한 발화로도 물질화시키지 않고, 정신적인 언어(=발화하지 않는 내면의 언어) 그 자체로써 접하는 황홀함 같은 것이었다. 정신을 정신 자체로써 접하는 것, 다시 말해 묵독. 묵독의 미학이 로망스 문학 이래 현재까지 살아있는 소설의 본질이다.

반면 연극과 영화는 끊임없이 장면화, 혹은 발화라는 물질화된 작업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 표현의 작업에 작품성의 성패가 달려 있다는 생각 때문에 연극과 영상 작업은 늘 성취감과 동시에 피로감을 동반한다. 그리하여 연극이나 영상 작업을 하다가 소설을 한 편 읽게 될 때면 그토록 평온해질 수가 없다. 그 어떠한 물질화도 필요로 하지 않는 내면성이 극도의 평온함과 안도감을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설을 공연의 무대 위에서 몸으로 표현한다고 했을 때, 어떠한 작업이든 묵독의 내면성을 무대의 물질성으로 창조해내는 작업을 거치지 않을 수는 없다. ‘2014 산울림 고전극장’ 시리즈 공연 프로그램으로 기획된 양손프로젝트의 <김동인 단편선-마음의 오류> 또한 묵독의 행위를 어떠한 방법으로든 낭독의 표현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거쳤을 것이다. 이제까지 문학이 연극 안에서 ‘사용’되거나, 혹은 ‘각색’되거나, ‘재창조’된 작업을 숱하게 보아왔으나, 문학이 온전히 연극의 형태로 창조된 작업을 본 적은 없기에 이 극단은 과연 어떠한 상상력과 표현으로 그 사이를 풀어갈지 무척 궁금했다.

 

+단 두 체의 몸이 만들어내는 상상력의 성찬

 

공연은 김동인의 단편 소설 네 작품을 두 명 혹은 한 명의 배우가 나와 연기를 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사진과 편지>, <감자>는 양조아, 양종욱 두 배우가 연기하였고, <태형>은 양종욱, <K박사의 연구>는 양조아 배우가 홀로 나와 연기를 하였다. 소설 속 문장이 몸의 움직임으로 유려하게, 끊김 없이 이어져 나온다. 드라마를 몸으로 연기하기보다는 소설성 자체를 몸으로 연기하는 것이기에 이 공연에서 배우의 몸은 인물의 몸일 뿐 아니라 풍경의 몸이 되기도 하고, 심리와 상태(희곡으로 말하자면 지문)의 몸이 되기도 한다. 이 공연에서 표현된 몸의 유연함이란 드라마적 유연함을 뛰어넘는, ‘초(Über)’유연성 같은 것이다. 그 몸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 공연의 쾌감 내지 즐거움은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메이어홀드가 그 어떠한 손실도 없는 움직임의 결정체를 생체 역학이라는 화두로 찬미하려 하였다면, 이 연극에서 표현된 몸의 역량은 그 최대치의 표현력을 조금 더 넘어서는 초월적 표현 역량이라고 말하고 싶다.

배우의 몸이 배우 자체와 배우 이상을 휘감고 있어서 단지 그 몸 자체로 모든 것이 표현 가능하다고 믿게 되는 이 기분은, 소설 안에서 유려한 문장의 표현력을 마주했을 때, 이것이 문장이므로 모든 것이 표현 가능하리라고 믿는 문학적 만족감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렇다. 이 공연에서 오로지 몸 하나로 모든 것을 표현해내는 그 유려함은 드라마적 유려함을 뛰어넘는 문학적 유려함이었다. 문장이 표현해낼 수 있는 유려함, 언어가 표현해낼 수 있는 상상적 영역의 유려함을 이 연극은 몸으로써 표현해내고 있었다.

 

이 공연의 주축은 배우들이 읊는 소설 속의 문장들, 즉 말의 미감과 그 말을 온 몸으로 휘감는 몸의 미감에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자꾸만 환기되는 상상적 공간의 이미지였다. 어떠한 공간‘력’ 같은 것이 몸의 미감과 말의 미감 사이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말의 미감이 몸의 미감을 뒤따라가면서, 혹은 몸의 미감이 말의 미감을 뒤따라가면서 운동하듯 움직일 때, 자꾸만 그 틈새에서 공간의 얼룩 같은 것이 환영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래서 더더욱 문학성을 공연이라는 환영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에 성공한 작품으로 다가왔다.

 

이 모든 표현의 가능성은 이 극단을 구성하는 조촐한 인력들에 의해 빚어졌을 테지만, 그 텅 비어있는 공간에 그 순간 꽉 찬 활력을 불어 넣고 있는 것은 분명 두 명의 배우의 힘이었다. 특히 <사진과 편지>에서 양조아 배우의 연기는 그 무엇도 정해지지 않은 순간순간의 표현력 그 자체였다. 생김새에서부터 움직임과 에너지가 너무도 순간순간 자유자재로 구사되고 있는 느낌. 양조아 배우의 연기와 생김새를 보면서 나는 문득 소설 속의 문장을 연극으로 구사할 수 있는 연기의 망연한 표현 능력치에 감탄하고 있었다.

또한 이 에피소드에서 양조아 배우와 양종욱 배우의 합은 압도적이었다. 마치 운동 경기를 보고 있는 듯한 호흡을 바라보고 있다 보니, 이 두 배우가 만들어내는 이상적인 호흡은 오히려 그 모든 것이 부재하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생략되고 오로지 이 두 몸만 남은 무대. 연극적 ‘표현’ 치레들이 거세되고 온전히 문학적 자유를 허락한 이 연극 무대 위에서야 비로고 몸은 지극히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연극과 문학은 서로에게 서로를 덧대는 작업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벗기는 작업이 될 때 진정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양종욱 배우의 연기는 발레리나를 떠안고 있는 발레리노 같았다. 시종 안정감 있고 튼실했다. 그래서 두 번째 에피소드로 양종욱 배우가 홀로 나와 <태형>을 연기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오롯이 그의 몸 하나로 <태형>의 지극히 무게감 있는 내러티브를 끌고 나가는 능력이 원작의 실존적 무게감과 합을 이루었다. <태형>을 소설로 접했을 때 끊임없이 느꼈던 무언가 모를 축축한 기분, 그 땀 냄새와 기분 나쁜 살갗의 느낌, 그 불쾌한 후각과 촉각적 상상력이 연극의 몸으로 표현되는 것을 경험하였다. 이어지는 <K박사의 연구>에서는 양조아 배우가 홀로 등장하였는데, 홀로 등장한 그의 연기는 앞서 보여준 놀라운 운동성에 비해 조금 활기를 덜했다.

<태형>과 <K박사의 연구>는 원작 자체가 어느 특정 감각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작품들이었다. <태형>은 끔찍하리만치 축축한 촉각으로, <K박사의 연구>는 지독한 후각으로 이야기 전체가 둘러싸여진 소설이다. 이 극단이 굳이 이 두 작품을 선택하여 무대 위 몸으로 연기해 보인 데에는 어떠한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감자>의 표현력 가운데 인상적이었던 것은 숟가락으로 폭력적인 청각성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는데, 이 역시 감각에 대한 날선 강조였다. 이렇게 원작에 내재된 감각적 이미지를 이 연극은 무대 위에서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문학 안에 내재된 감각성을 연극화할 때 대개 그것을 연극적 감각으로 전횡하기가 쉬운데, (연극은 그만큼 강렬한 감각적 연출이 가능하므로) 이 작품은 문학적 감각을 연극적 감각으로 옮겨 놓는 적당함의 미덕을 알고 있었다. 조명과 음악의 사용이 그러했다. 군더더기가 없었고 굳이 과잉하지 않는 미덕. 두 배우의 몸만으로 표현이 가능한 공간의 상상력을 결코 조명이나 음악이 헤치지 ‘않아서’ 좋았다. 음악은 음악으로써, 조명은 조명으로써 그 필요한 입장만을 만들어 채워 넣었다.

 

매우 많은 몸짓으로 연극을 만들고 있으나, 동시에 원작인 문학이 최대한 훼손되지 않는 느낌. 이 극단이 만들어낸 이 영리하고 아름다운 작업에 박수를 보낸다. 오로지 그 솔직하고 아름다운 몸만으로 이 무대 위에서 최대치의 생명을 보여준, 그 알차고 경이로운 노력. 두 배우가 나와서 무대 인사를 할 때 그들이 들어가고 나서도 한참 동안 뜨거운 박수를 멈출 수가 없었는데, 그것은 단지 이 작품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단지 세 명의 배우, 한 명의 연출이 꾸려나가는 이 극단의 살아있음에 대해서, 그 생명력에 대해서 진심으로 깊은 응원을 하고 싶다. 앞으로 이 극단에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소설과 연극 사이에서 가능한 것들을 지금보다 조금 ‘덜’ 잘했으면 하는 것이다. 문학적 상상력의 광활함을 너무도 매끈하게 잘 구사해 놓고 있어서 문학의 어눌함 같은 것을 떠안을 수 있는 여지가 지금은 조금 부족해 보인다. 이 극단만의 방법으로 점 점 더 성장해 갈 앞으로의 작업을 계속 기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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