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꽃 울릉도-1974/ 최하은

사회극, 사회와 극 사이의 줄타기: 상처꽃 울릉도-1974

 

 최하은

원작: 최창남

극본: 양정순

연출: 김수진

예술감독: 임진택

협력연출/드라마터그: 김정섭

단체: 극단 길라잡이

공연일시: 2014.4.3-5.31

공연장소: 미마지아트센터 눈빛극장

관극일시: 2014.5.23 8pm 외

 

<상처꽃-울릉도 1974>는 그 제목이 말하는 대로 1974년 울릉도에서 있었던 실제로 있었던 대규모 간첩단 조작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서사극이다. 특별히 이 극은 서사극이라는 형식에 치유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그 이름을 서사치유연극으로 칭하고 있다. 간첩단으로 조작되어 모진 고문과 10여 년 간의 옥고를 치른 네 명의 피해자들은 2000년대에 들어서야 재심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상처꽃 치유센터’를 방문하여 심리치료를 받는다. 집단상담치료를 기반으로 연극, 음악, 미술 등 다양한 치료 방식을 경험해 나가면서 네 피해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간첩이라는 낙인 아래 결코 털어놓을 수 없었던 과거의 아픔을 되살리고 차근차근 상처를 치유해 나간다. 한편 이러한 치유의 과정 사이에 삽입된 막간극을 통해 극은 당시의 정치 상황과 간첩 조작, 국가 폭력의 실태를 풍자적으로 고발한다. 마지막으로 네 명의 피해자 모두에게 무죄가 선고되고, 피해자들은 마침내 길었던 고통에서 해방된 듯 행복한 표정으로 함께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른다.

 

연극 자체로만 평가한다면 선택한 작품 소재의 시의성이 우선 뛰어나고, 극단 <신주쿠양산박>을 이끄는 재일교포 연출가 김수진의 섬세하면서도 따뜻한 손길이 구석구석 닿아있으며, 마당극의 대가 임진택 예술감독의 해학의 미가 살아있고, 40대 배우들의 무르익었으면서도 절제된 연기력이 음악, 무대미술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다양한 연극인들의 하모니를 즐길 수 있는 수작이었다. 다만 이렇듯 국가폭력과 인권탄압의 사회적 문제를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극들의 경우, 연극 그 자체의 만듦새보다도 소위 ‘정치적’이고 ‘선동적’이라는 선입견과 먼저 싸워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극중 재판 장면에서 문재인, 이정희 의원을 비롯하여 저명한 진보 진영 정치인, 사회운동가, 종교인 등이 대거 초청되어 카메오 출연으로 무대에 오른 것이 화제를 낳기도 했다. 과거 군사정부의 폭거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러한 일들이 바로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미결과제’임을 강조함으로써 문제의식을 현 정부에까지 확장하고자 하는 시도도 엿보인다. 이러한 문제 제기의 방법으로 이 극이 택한 것은 인물(피해자)에 대한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감정이입, 분노와 연민보다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보다 심층적이고 이성적인 접근이다.

 

작품의 시간축이 시작부터 2014년 재심재판 시기에 고정되어 있고, 1970년대의 폭력과 그로 인한 상처의 기억들은 모두 회상 장면으로 단편화되어 표현된다. 관객들이 피해자들의 과거사를 일반적인 연대기로 따라가며 그 슬픔에 섣불리 이입하려는 찰나, 마당극 형식을 빌려온 막간극이 삽입된다. 막간극은 총 5회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설자와 1인다역 배우 두 명을 통해 당시의 시대 상황을 풍자적으로 설명한다. 이렇듯 일반적인 사건의 시간 순 나열을 배제하고 이성적인 해설자의 해설과 보다 감성적인 피해 당사자들의 회상을 교차로 편집함으로써 극은 이것이 단순한 ‘슬픈 이야기’로 빠져듦을 경계하고 있다. 무작정 슬퍼하고 분노하는 대신 관객으로 하여금 사건의 배경을 가급적 이성적으로 이해시키고 그것을 현재와 결부시켜 문제의식을 공유하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극의 초입과 막바지에 두 번 삽입된 막간극 ‘그들이 왔다’와 ‘다시 그들이 왔다’는 이러한 문제의식의 확장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다. 나치 치하의 독일 신학자였던 니뮐러 목사의 연설이었던 시인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를 인용하여 그려진 이 두 개의 동일한 막간극은 1974년에 ‘왔던’ 그들이 2014년에 ‘다시 왔음’을 주장하며 정치적으로 눈감고 있던 이들을 일깨우고자 한다.

 

그러나 작품이 다루고 있는 사건의 성질상, 그리고 그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의 특성상 이러한 이성적 접근의 시도가 얼마나 유효했느냐에 대해서는 관객에 따라, 특히 관객의 정치성향에 그 평가가 천차만별로 갈릴 것으로 예상된다.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맹목적인 감정이입을 배제하고자 삽입된 막간극들 자체가 이미 정치적 편향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국정원인 당시의 국가공안기구들은 남파간첩의 숫자가 줄자 오직 예산을 타내기 위해 경쟁적으로 가짜 간첩을 조작해냈다’는 주장은 그 사실여부를 막론하고 대단히 도발적인 대목일 수밖에 없으며, ‘고문은 국가가 국민에게 베푸는 복지혜택이다’고 주장하는 희화화된 고문기술자에 대고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인다’ ‘짐승만도 못한 놈들’라고 욕설하는 시사토크 사회자의 모습은 관객들의 갑갑했던 가슴을 손쉽게 뻥 뚫어줄 수는 있어도 막간극이 삽입된 종래의 목적으로 유추되는 이성적이면서도 날카로운 문제제기의 의도에서는 사뭇 빗나간 것처럼 느껴진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평소 말할 때에 일본어를 섞어 사용했다는 사실이 은근히 강조되거나 고문기술자가 ‘일제 강점기가 없었다면 우리나라의 고문 기술이 이렇게 발전했겠는가’라며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펼치는 부분에서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분노를 국민감정을 통해 자극하기 위해 사건과 직접적으로는 연관이 없는 친일행각을 다소 억지로 빌려와 덧붙인 감도 있었다.

 

물론 이성적인 접근을 시도한다고 해서 국가폭력가해자들의 입장도 공평하게 옹호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박정희는 확실히 친일경력이 있는 인물이며 박정희 정부에서 행해진 국가폭력은 결코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는 악행이므로, 이들의 입장도 생각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형평성의 오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간첩조작사건은 그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백하며 피해자는 위로와 치유를 받고 가해자는 엄히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해설과 회상을 교차한 서사극으로서의 독특한 짜임새나 배우들의 과장되지 않은 연기 역량은 분명히 단발적인 감정보다는 오래 가는 이성에 호소하고자 하는 측면이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막간극들의 텍스트들은 부분적으로 거칠고 감정적이었으며 악역의 희화화에 몰두한 나머지 전체 극이 추구하는 맥락에서 어긋난 경우도 있었다. 비판의 근거에 감정론이 개입되었을 때 그것은 아무리 옳은 주장일지라도 설득력을 결여할 위험을 내포한다. 상식적인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꼬투리 잡기 좋아하는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극에 ‘빨갱이’라는 정파적 딱지를 붙이게 하는 약점을 내비치는 일이다. 이러한 위험을 사전에 경계하여 해설 삽입이라는 특수한 구성을 선택했고, 원색적인 비난보다는 피해 당사자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컨셉을 채택하는 등 심혈의 노력을 기울인 만큼 텍스트의 일부 조탁되지 못한 부분에 대한 아쉬움도 더 컸다.

 

사회극, 참여극, 정치극을 볼 때마다 항상 느끼는 점이 있다. 이러한 극들은 태생적으로 ‘사회’와 ‘극’이라는 두 개념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으며, 이러한 극의 제작자들은 어름사니로서 최고의 역량을 보이지 않으면 줄의 양쪽에서 던져오는 돌에 맞아 추락할 위기에 놓인다는 것이다. 특히 한때는 대한민국의 자존심이자 시대정신이었던 민주화의 기치가 이제 많은 젊은이들에게 ‘당연한 것’, ‘이미 옛날에 얻어놓은 것’, ‘굳이 더 말할 필요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지금 이 시대, 대학로로 밀려드는 상업극의 물결에 밀려난 사회극이 새로운 관객들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 점점 더 심화될 수밖에 없다. 노란 리본을 달고 촛불을 든 시민들이 3만 명 결집해도 뉴스에 한 꼭지도 보도되지 않는 먹통, 불통, 울화통의 시절에 사회극은 사회와 극 사이에서 지난한 줄타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싸움 가운데에서도 연극 <상처꽃-울릉도 1974>가 잊지 않은 연극의 한 가지 본질이 있다. 인간과 인간사에 대한 따뜻한 보듬음이다. 극은 ‘상처에서 피어나는 한 송이 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꽃을 피우기 위한 성찰과 반성, 관심과 지지를 촉구한다. 일부분 정파적이라는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더라도 극은 관객들에게 분명한 화해와 치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극장 출입구에 붙어 있던 관객들의 감상 메시지는 슬픔과 아픔보다도 큰 환희와 감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록 중간 중간 아찔한 순간들이 있었을지언정, 그것만으로도 이 극은 끝내 줄의 마지막에 성공적으로 도달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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